성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9)
O 처음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이후 배교를 뉘우치고 자수하여 순교함
o 1799년 : 경기도 송도(현 개성)의 몰락 양반 집안에서 출생
o 1839년 : 형조 전옥서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된 뒤 장살로 순교
정국보: 프로타시오는 1839년 4월 18일(음 3월 5일) 조정에서 대왕 대비 순원왕후(純元王活) 김 씨의 명의로 박해령인〈사학 토치령 (邪學討 治令)〉을 공포한 뒤 가장 먼저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는 처음 체 포되었을 때 고문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배교했었으나, 이후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고 스스로 형조를 찾아가 체포되었고,포도청 에서 장살로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불명예를 씻었다.
프로타시오는 1799년 송도(현 개성)의 몰락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품이 순량하고 겸손하였으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늘 온유함 과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본래 그의 조부는 관직에 있었으나 과실을 범 해 처벌을 받으면서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고, 이후 프로타시오의 부친은 신분을 숨긴 채 살다가 어느 해엔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장성한 뒤 프로타시오는 선공감(譜工監 : 조선시대 토목이나 영선을 맡아보던 관청)에 들어가 미천한 사령(使令)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2> 그러다가 30여 세에 이르러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는 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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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설에는 정국보의 이름을 ‘군보’ 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과 김대건 신부의 기록,『기해일기』등에는 모두 ‘국보’ (Kouk po 혹은 Coucpo)로 나온다(『순교사 비망기』,p. 386 :『순교자 약전』, p. 72 :〈김 대건 신부의 보고서〉,338쪽 :『기해일기』,98쪽).
2) 『기해, 병오 재판록』회차 6, 김 가타리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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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끌려 열심히 교리를 배웠으며, 수년만에 ‘ 프로타시오’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3>
이때부터 프로타시오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1834년 초에 입 국한 중 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본명은 여항덕)신부는 그의 성실함으로 보고는 홍살문 거리 떼 집을 한 채를 사서 그의 가족이 거주토록 하였고, 시골 교우들이 성사를 받으러 올라올 때면 그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그는 가난한 생활속에서도 놀라운 박애심과 정성으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시 련은 계속되 었다. 집 이 아주 가난한 데다 가 항상 병이 그의 몸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육신의 괴로움이 큰 때문이 었다. 또 14 명의 남매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차례로 사망하여 한 명 도 남지 않게 되었 다. 그 와중에도 프로타시오는 이러한 시련이 주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놀라운 인내심으로 견디며 고통 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신 부와 회장들의 강론 듣기를 즐겨하였다. 이 때 문에 그는 일찍 부터 교우 들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칭송도 받았다.
1839년 3월(음 력),기해 박해가 시작된지 얼마안 되어 정국보 프로타 시오는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면 서 문초 와 형벌을 받았지만,온갖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게 신 앙을 지킨 뒤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그는 형벌을 받으면서 갖 가지 감언이설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형관의 유혹에 넘어가 굳은 신심이 흔들리고 말았고, 형관들은 ‘ 마 침내 그가 굴복 하였다.’ 고 좋아하면서 즉시 석방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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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해일기』, 98쪽.
4)다른 증언에는 ‘구리개(현 남대문로1가〜충무로1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살 았다.’ 고도 나온다(『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94, 서 야고보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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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프로타시오는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배교를 뉘우치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침식을 잊고 참회의 기도를 바쳤 으며, 주야로 통곡과 울음을 그치지 않았지만,다시 신앙을 증거할 용기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때 그를 알고 있던 열심한 교우 하나가 그를 찾아 와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용덕을 불어넣어 주자,그는 여기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내 프로타시오의 발걸음은 형조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간 사령 들은 ‘석방된 놈이 무엇 하러 다시 왔느냐?’ 고 하면서 안으로 들여보내 지 않았다. 그가 "나는 마음이 용렬하여 배교했었지만,지금에 와서는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제 이전의 배교를 취소하고 참 신앙인으로 돌 아와 죽음으로 속죄하려고 합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사령들은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하였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 였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던 그는 그 다음날 다시 형조를 찾아가 세 번째 로 자수를 시 도했으니,이 때가 5월 12일(양력)이었다.5>
그때 프로타시오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본래의 신병 이 도진 데다가6> 상처가 심 한 탓에 걸을 수조차 없었고,할 수 없이 가마 꾼을 불러 형조까지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문간 사령들은 여전히 그를 막아 세웠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였다. 할 수 없이 물러앉은 프로 타시오는 근처에 앉아 형조판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형조판 서가 가마를 타고 나오자,프로타시오는 가마를 막은 채 어리둥절해 있 는 판서에게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저는 배교를 한 천하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뉘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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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의 날짜는 앵베르 주교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541 쪽)
6)훗날의 증언에는 프로타시오가 배교하고 나와 집에 있던 중에 염병 (즉 장티푸 스)에 걸렸다고 한 내용도 있다(『기해, 병오 재판록』, 김 가타리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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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 천주교인으로 배교의 죄를 속죄하고 싶어 예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법에 따라 죽여주십시오.7》
형조판서가 “미친놈이 하는 말을 내가 어찌 믿으란 말이냐?” 하고 소 리치면서 물러나라고 명하였지만,프로타시오는 가마를 따라가며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천주교인으로 죽기를 원합니다.” 하고 울부짖었다. 그 러자 형조판서는 “에이,천주학쟁이들은 평범한 족속이 아니로구나. 여 간해서는 떨어질 놈이 아니다. 저놈을 전옥으로 끌고 가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프로타시오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 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고, 옥중의 교우들은 그의 손을 잡으 며 격려와 축하의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순교의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힘과 용기로 모든 형벌을 참 아 받았다.7 8 9>
5월 19일에 프로타시오는 형조 전옥에서 포도청으로 이감되었다. 그 리고 이튿날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치도곤 25대를 맞아야만 하였 다. 이미 병과 상처로 신음하던 그에게 내려진 이 형벌로 인해 그는 초죽 음 상태가 되어 옥으로 끌려갔고,5월 20일(음력 4월 8일) 밤사이에 마 침내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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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페레올 주교의 보고서〉, 885쪽 :『기해일기』, 99쪽.
8)〈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541〜543쪽 :〈페레올 주교의 보고서〉,
885〜887쪽 :『순교사 비 망기』,386쪽.
9)〈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543쪽.『기해일기』(W0쪽)에는 ‘4월(음력)’로, 다 블뤼 주교의『순교사 비망기』(386쪽)에는 ‘5월 20일과 21일 밤 사아 로,『순교자 약전』에는 ‘5월 21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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