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리는 100m정도에서 유효, 실제적인 사격은 50m정도에서 이뤄지며 10몬메정도의 철포면 60mm가량의 나무를 관 통하며 30m에서 일본갑옷을 충분히 관통가능했답니다.
아래는 기록상 일본의 철포 동원양입니다. 연도로 표시했지만 일본에서의 어떤 군사적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은 보시는 분이 심심풀이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시기 |
사용철포수 |
병력대비 철포장비수 |
| 1575년 |
3,000 정 |
30% |
| 1592년 |
60,000 정 |
30% |
| 1597년 |
50,000 정 |
30% |
| 1600년 |
80,000 정 |
40% |
| 1614년 |
100,000 정 |
30% | 최초 도래시기에 철포한정은 무려 1천금입니다. 현재의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무려 1,155만엔. 오다 시대에는 철포한정이 10석~12석 가량이었다죠. 현재 일본돈으로 9석이 54만엔이라는군요. 토요토미 시절에는 6몬메 한정이 9석, 30몬메가 40석.
서양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16세기동안 여전히 전투에 동원됐지만 실효성은 줄어들으며 총을 휴대한 보병들이 전투의 핵심세력이 되어갑니다. 1605년에 출간된 돈 키호테(Don Quixote)는 점점 사라져가는 기사들을 처철하게 비웃어 버리죠. 비록 여전히 기사들은 그에 대해 반발하려 했지만...
총알로 인해 절망적일 정도로 무겁게 만들어진 갑옷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머스킷이 도입되면서 대부분의 갑옷이 거의 쓸모 없게 됩니다. 전신 갑옷은 16세기에 들어서며 없어지기 시작하며 16세기 중반이후로는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과 투구 정도로만 남겨집니다. 덕분에 갑옷은 장식용이자 전리품으로, 혹은 만약을 위해 입는 정도로 변하게 됩니다. 또한 무거운 갑옷은 병사들에게 경시됩니다. 갑옷 값이 그들의 급료에서 공제되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한편 총은 위력을 제외하고도 전쟁을 더욱 경제적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활은 숙련된 사수가 쏠 경우 총보다 훨씬 우위의 발사속도와 장거리 명중률을 보여줍니다. 능숙한 총병들이 보통 50 야드정도의 사거리에서 1분당 1발을 쏘아댈 수 있었지만 활은 능숙한 사수라면 300야드 의 적에게 같은 시간에 2발이상을 퍼부어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숙한 사수란 점은 총과 활이 전혀 다릅니다. 능숙하게 총을 다루는데는 고작 1달정도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능숙하게 활을 다루려면 1달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몇년씩이 투자되야할 지경이었죠. 영국이 그들의 장궁병을 키우기위해 일정한 토지가 있다면 주말마다 파핀제이를 쏘게 법으로 정한 것을 보시길 바 랍니다. 과연 이런 판에 활을 든 사람들이 전장에서 어느정도의 맥을 이어갈 수 있을런지 자명한 사실입니다.
더욱이 총은 그저 들어올려 견착하고 조준한 뒤 방아쇠만 당기면 되고 장전문제만 해결하면 1명의 훌륭한 사수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발사할 때 활처럼 근력이란건 필요가 없었고 백병전 상황에서 총을 몽둥이 삼거나 허리의 칼을 휘두를 때만 근력 이 필요합니다. 어느 이슬람 기병의 말대로 아녀자와 어린애도 전사를 죽일 수 있는 비열한 병기였죠.
여기에 기존의 석궁병을 총병으로 다시 훈련시키는 것은 까다로울게 전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석궁사수들은 석궁의 기계장치와 발사될 때의 반동에 익숙했고 조준법도 총과 비슷했죠.
생산기술이란 면에서도 총은 대중적인 기술과 폭넓은 장인층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렴하다는거죠. 평시에는 쓸모없는 활제조업보다 평시에 금속가공업을 하다 총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큰 잇점입니다.
총의 위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명중률의 문제는 총의 사거리를 100야드에서 50 야드가량의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 은 것으로 제한하는 큰 원인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전장식 활강총들은 아주 실망스러운 명중률을 가집니다. 사람만한 표적을 150 야드에서 조준해서 쏘는건 달을 맞추겠다고 작정하는 것만큼 쓸모없다고 말해질 정도였죠.
전장식 활강총의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점은 먼저 그 구조에서 연유됩니다. 이른바 유극(windage)이라 불리는 것 덕분이죠.
총강의 지름(구경)과 총알의 지름이 같다면, 즉 유극이 작다면 적어도 명중률이 심각하게 나빠지는걸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총강에 꽉 끼는 총알은 그만큼 장전이 힘들며 장전속도를 떨어트립니다. 부차적으로 아직은 나무로 만들어진 장전봉(ramrod)를 부러트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유극이 큰, 총강보다 작은 총알이 사용되는 경우 장전은 매우 쉬워집니다. 그저 총알을 총구에 굴려넣어도 그만이니 장전속도는 더욱 빨라집니다. 문제는 유극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명중률은 감소됩니다. 또한 유극사이로 빠져나가는 가스는 화약이 내는 힘을 총알에 전달하는데 나쁜 영향을 줍니다.
주물로 만들던 총알이 잘못되어 유극을 크게 하며 아울러 비행중 탄도를 불안정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통 여가시간을 활용해 총병들이 직접 납조각을 작은 국자에 녹여 주물에 부어 총알을 만들었는데 이때 충분히 식어 굳지않은 상태에서 주물을 벌려 총알을 빼내면 흔히 총알은 알게모르게 이그러지게 됩니다. 덜식은 것을 완전히 식히려 물속에 빠트리면 이런 일은 적어지지만 이 역시 믿을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어느정도 굳기 전까지는 주물을 벌리지 않는게 좋은 총알을 만드는 요령이었죠.
이런 식으로 불규칙하게 제작된 총알은 당연히 총강내에서 더 큰 유극을 만들며 또한 비행중 부정확한 탄도를 형 성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오랫동안 총알 제작에 경고됐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시된 적이 적지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총알을 만들고 식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이었죠.
한편 총의 정확성을 높이고자 patch라는 것이 애용됩니다. 그리스를 먹인 가죽이나 두터운 천으로 구슬모양의 총알을 감싸 들어가는건 어느정도 쉽게 하면서 유극을 작게 만 들겠다는 것이죠. 물론 발사하면 총알을 감싼 가죽이나 천조각은 총구주변에서 떨어져버립니다. 일종의 송탄통(sabot) 역활을 하는 것이죠. 이 방법은 후일 전장식 라이플이 사용되면서도 계속 사용됩니다.

종종 병사들이나 사냥꾼들은 좀 더 딱들어맞는 총알에 빡빡한 천이나 가죽조각을 대고 망치로 장전봉을 쳐가며 장 전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면 장전시간은 더걸리지만 명중률은 상승됩니다.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활강식 전장총에서도 잘 감싸고 장전할 경우 50 ~ 100야드부근에서 10발당 8발은 4인 치 원안에 적중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100야드에서 3피트정도의 오차는 감수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명중률이 나올 정도로 총알을 감싸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고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죠. 이런 답답하고 세심한 방법보다는 집중된 화력을 마치 거대한 산탄총처럼 뿌려대는게 전투에서는 효율적이고 또한 당시 지휘관들과 군사전문가들도 인지했던 사실입니다.
하여튼... 명중률 덕분에 전투는 흔히 혼전으로 치달았고 명중률을 보완할 어떤 방법이 동원되야 했습니다. 바로 총병의 밀집과 일제사격으로 화력을 통한 명중률의 보완인 것이죠. 겸사겸사 누군가가 총을 다루는 순서를 불러주어 박자를 맞춰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군가처럼 노래로 불려졌을지도 모르죠.) 장전과 발사의 순간들을 지휘자가 일치시켜 사고와 불발을 방지하고 또한 화력마저 통제 가능하다는거죠.
또한 사격속도의 공백을 치고 들어오는 기병의 돌격을 막기위해 창병(pikeman)의 호위가 첨가됩니다. 총을 장전하는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나며 연속된 일제발사도 장전중의 무방비 상태를 막지는 못합니다. 이 무방비한 틈에 창병들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죠. 그들의 엄청나게 긴 창(22피트정도로 6m가량)은 그리스의 팔랭스만큼이나 길었습니다. 당시 창병의 지휘관들은 부하들의 어떻게 장창을 잘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지도 모르죠.
'알아서, 잘.'
창병들의 고슴도치같은 진형은 기병들의 돌격에 대해 효과적이었으며 총병들에겐 이상적인 엄호라는 것이 입증됩 니다.
종종 장창은 자루의 엄청난 길이로 인하여 잘라낸 역적이나 적의 목을 꿰어두는 효수대로서도 아주 유용하게 사 용됩니다. 덕분에 장창은 봉사가 아니라면 충분히 보이는 것이었고 여기서 명백한(as plain as pikestaff)라는 숙어가 등장 합니다.
최초로 전투중 총병의 밀집대형과 일제사격을 행한 것은 유럽의 종교전쟁이 한참이던 때입니다. 대략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반쯤이죠. 당시 총은 화승격발식(matchlock)의 아쿼버스와 머스킷이 사용되던 때였고 특히 신교도(Protestant)의 군대들은 새로운 가볍고 다루기 쉬워진 머스킷을 의욕적으로 받아들인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16 ~ 17세기 초반의 머스킷은 6피트 정도의 길이로 4피트 정도인 아쿼버스보다 길고 더많은 화약과 긴 총신으로 더 강한 위력을 가졌던 것이죠. 다만 무거워서 받침대는 필수적으로 필요앴고 다루기 불편하며 장전속도는 아쿼버스의 2배정도가 더 필요했죠. 아울러 가격은 4배정도 더 비쌌고. 그러나 이런 결점도 17세기에 들어서며 총신제조법이 발전하며 사라집니다.
한편 영국인들은 꽤 오랫동안 장궁에 집착합니다. 그나마 능숙한 장궁사수들을 많이 보유한 덕분이었죠. 그러나 1535년, 영국조차 장궁을 폐지해 버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국에 최초로 도입된 머스킷은 해군용의 소형대포처럼 사용됐다는 겁니다. 종종 스프라이트(spright)라는 작은 화살을 발사하거나 2발의 총알을 6인치의 철사로 연결한 사슬탄(chain shot) 을 발사하여 돛과 삭구를 베어냈는데 문제는 둘다 총자체에 문제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때로 영국의 소형대포로서의 화승총들이 스프라이트나 사슬탄을 쏜 것처럼 화공용의 불붙은 화약뭉치등 이 달린 화살모양의 탄도 발사됐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이런 화공용 화살(?)을 쏘는 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은 전통적인 이른바 불화살이며 왼쪽은 총에 이런 불화살을 넣고 쏜다는 것을 보여주죠.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의 총류탄들(rifle grenade)의 먼 조상이라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1630년 무렵, 머스킷은 점차 가볍게 만들어졌기에 총신을 받쳐주는 받침대 없이 쏠 수 있게 됩니다. 아쿼버스보다는 아직은 좀 느렸지만 2분간 1발의 발사속도를 보여줬고. 이런 머스킷의 발전은 아쿼버스를 역사속에 묻어버렸으며 이후 소총을 의미하는 단어로 머스킷이란 단어가 꽤 오 랫동안 사용되게 됩니다.
신교도 군대들은 새로운 총의 채택외에 총을 사용하는 법도 실험합니다. 그들은 총병들을 2열 이상으로 세워 차례로 일제사격(salvo fire)을 퍼붓는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프랑스 종교전쟁(the French Religious Wars)에서 Henry of Navarre 휘하의 위그노들(Huguenots)이 이 방법을 처 음 실전하며 곧 네델란드인들이 스페인의 총병에 대항해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마침내 스웨덴의 Gustavus Adolphus 휘하의 총병들이 밀집대형과 일제사격을 사용하며 30년전쟁(the Thirty Years War)이 한창이던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Battle of Breitenfeld)에서 훨씬 많은 병력의 기병들이 돌격하는걸 저지합니다.
이 시기에 사격의 연속화를 위해 사격대형은 더욱 정교해지며 흔히 총병부대는 횡으로 6열이상으로 늘어서서 한열 씩 사격을 가합니다. 사격을 끝낸 열이 앉거나 종종 뒤로 빠져나가 장전을 하는 동안 그 뒤의 열이 사격을 했으며 충분히 두터운 열을 갖춘다면 총병의 대열은 마치 거대한 산탄총을 연달아 쏘는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밀집되고 정리된 사격대형은 지휘관들에게 사격통제의 용이함과 총병들이 장전시 까다로운 총을 다루며 일제사격을 퍼붙는데 좀 더 유리했습니다.
총이 전장을 지배하면서 참호와 방책의 존재는 더욱 커집니다. 의외일지는 모르지만 총의 발전은 활의 시대보다 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해줍니다. 총병들은 시간이 나면 기병을 막을 전통적인 나무 목책과 참호를 파야했습니다. 이 목책과 참호, 특히 목책은 이미 활의 시대에도 궁병들에게 통용되던 것중 하나입니다.
흔히 전방에 나무를 깍아 비스듬히 세운 목책을 세워 기병이 돌진하지 못하게 하면서 종종 그 목책사이에는 삼발 이 형태의 쇠못이 뿌려지기도 하죠. 이 목책과 장애물 뒤에 호가 파여지고 호에는 나무와 흙으로 보강된 벽이 세워지죠. 이 호속에 총병의 대열이 들어가 전투를 벌입니다.
이는 지금과도 그 기본적인 것에서는 별다른 차이점은 없습니다. 다만 영화등에서 흔히 전투는 열을 지어서있는 병사들끼리의 평지에서 서로 우둔할 정도로 총격전으로 펼치므로 이런 사실은 흔히 간과되기 쉽습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구덩이를 파고 숨어서 일제사격을 펴는 총병은 100야드 안으로 접근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고용됐던 그 용감하고 단창으로 흔히 무장했던 스위스 용병들조차 총병들에게 쓴맛을 보고 다시는 건드 릴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방어적인 자세이며 적은 이 방어적인 총병을 피해 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래서는 적의 세력을 파괴한다는 것이 어려워지죠. 좋으나 싫으나 적과 대면해야 전투가 되죠.
더불어 대군은 언제나 좋은 길을 요구합니다. 넓은 평원은 그만큼 좋은 이동로가 되어주는 것이고 만약 양측이 제대로 정찰을 안하며 전진하다 조우하면 참호를 파고 어쩌고할 시간도 없이 전투를 벌여야하죠. 당시 정찰은 소규모의 기병과 척후병으로 이뤄졌으며 무전기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평원에서의 조우와 죽고 죽이는 총격전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한편 스웨덴인들은 12사도 대신 더욱 간편한 페이퍼 카트리지(paper cartridge)를 채용하며 덕분에 능숙한 사수의 장전속도는 1분에 가깝게 단축됩니다.
그림은 1770년대의 머스킷 및 라이플용 페이퍼 카트리지를 만드는 법이지만 페이퍼 카트리지에 대한 개략은 설명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A는 사용된 종이의 치수입니다. 탄약을 감싸는 종이는 흔히 방수와 장전시의 편의를 위해 기름이 먹여지며 후일 인도에서 영국군은 실전부대의 건 의를 무시하고 소나 돼지의 지방분을 사용하다 이에 반발한 인도인 용병 세포이의 항쟁에 피를 흘려야만 했죠.
A의 종이를 B처럼 총알과 총알과 비슷한 지름의 막대를 댄 다음 말아서 C와 같은 둥근 원통을 만듭니다. 원통이 만들어지면 막대를 빼내고 D처럼 종이 원통의 앞부분을 꼬거나 묶어서 막습니다.
그런 다음 E처럼 총알이 들어간 부분을 다시 묶습니다. (안묶어도 됩니다.)
그리고 F처럼 적당량의 화약(소총의 경우 흔히 손가락 마디 2개정도의 높이)을 넣은 뒤 G처럼 뒤를 꼬거나 묶어버 립니다.
이렇게 완성된 페이퍼 카트리지는 탄약통에 넣어집니다. 탄약통 내부에는 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어진 페이퍼 카트리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탄약통이 병사들의 탄대에 매달리게 되는거죠.
사용법은 G의 완성된 페이퍼 카트리지의 H처럼 뒷부분을 찢어서 총구에 대고 화약을 부어넣은 다음 I처럼 총알과 겉의 종이포장을 통채로 총구에 대고 J처럼 장전봉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답니다.

고운 가루상태로 만든 점화약은 별도로 작은 통(touchbox)에 넣어져 휴대되며 총의 화약접시에 부어집니다.
활을 몰아내고 전장의 주역이 된 총은 명중률을 화력으로 보완하게되며 차차 군사방면의 연구자들과 지휘관들은 화력우위에 빠져들게 됩니다. 더 빨리 더 촘촘한 화력을 퍼부을 것인가가 주요관심사였으니.
이런 분위기에서 불붙은 화승이 필요없는 방식이 요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