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길’은 없을지라도
우리말의 ‘길’에는 다중적 의미가 있다. 이동을 위한 물리적 공간이나, 어떤 활동의 방향 그리고 일을 위한 방안이나 수단을 뜻한다. 이런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영어 단어는 ‘Way’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달라지면 말(단어) 또한 바뀐다. 그 예로, 차량이나 말이 다니는 길은 ‘road’, 산책길이나 걷는 길은 ‘path, lane, trail’, 방향은 ‘direction, course, route’, 태도나 방식은 ‘manner, style’로, 즉 전혀 다른 낱말로 표시된다.
이에 반해 ‘길’에 해당하는 다른 우리 말이 없다. 그래서 길 앞에 수식어가 붙는다. 예를 들면, 빙 둘러서 가는 멀고 굽은 길은 ‘에움길’, 집 뒤편 길은 ‘뒤안길’, 마을의 좁은 골몰길은 ‘고샅길’, 휘어진 길은 ‘후미길’, 낮은 산비탈 기슭에 난 길은 ‘자드락 길’, 강가나 바닷가 벼랑의 험한 길은 ‘벼룻길’, 눈이 소복 내린 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은 ‘숫눈길’, 산이나 숲 따위에 난 폭이 좁은 호젓한 길은 ‘오솔길’이라고 한다. 매우 정감이 있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길에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예술가들의 이름을 기리는 도로의 이름이 있으나, ‘철학의 길’이나 ‘철학자의 길’과 같은 추상성을 뜻하는 품격있는 길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哲學の道’는 일본 교토시에 있다고 한다. 이 길의 유례는 교토의 어떤 철학자가 이 길을 오가면서 사색을 하던 데서 비롯되어 본래는 ‘사색의 작은 길’ 이었던 것이 어느 사이에 ‘철학의 길’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독일의 ‘철학자의 길’이 연상되었던 모양이다.
독일 바덴뷔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주의 네카르(Neckar) 강변에 자리한 유서 깊은 대학과 고성(古城)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있다. 이곳 외에도 함부르크와 크론베르크, 등 다수의 지역에 같은 명칭의 아름다운 오솔길이 있다.
왜 독일에는 이 같은 ‘철학자의 길’이 있을까? 독일은 칸트와 헤겔 등 저명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이다. 독일철학은 ‘관념론’과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이상주의 철학’으로 대표된다. 관념론은 칸트의 비판철학에 자극받아 전개된 사상으로 흔히 유물론과 반대되는 사상을 일컫는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도 이 길이 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끼친 영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면 왜 독일에서 저명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되었을까? 그 환경요인은 무엇일까?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은 그의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에서 이를 해학적으로 설명했다. 즉, “영국인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지만, 프랑스인은 자신이 원하는 바 무엇이나 행동하는 반면, 생각은 다른 사람과 똑같아야 한다. 그러나 독일인은 행동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해야 하지만, 생각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라고 이 세 나라의 국민성을 비교했다. 이처럼 독립된 개인으로서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입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서의 생각은 어디에서 출발할까? 많은 분석을 할 수 있겠지만, 자연환경의 요인을 들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울창한 숲일 것이다. 독일이 국립공원을 조성한 역사가 500년이 된다고 한다. 식물학자들은 산림자원의 경영 차원에서 고령의 활엽수 남벌(濫伐)이 없었다면, 이 정도 수준에 이르는데 200년이면 충분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이면 왜 그곳에서 많은 철학자와 바흐, 브람스, 베토벤과 같은 고전 음악의 대가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숲길을 산책해보면 안다. 그곳에서 자연의 질서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깊게는 창조의 질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도 비 내리는 숲속을 걷다가, 번개의 두려움 속에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안나의 이름을 부르며 목숨을 살려준다면, 사제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칸트의 산책은 유명하다. 혼자서의 산책은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음악가는 아름다운 선율을 찾아내고, 철학자는 궁극적인 물음을 궁구해 볼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산림역사는 겨우 60년이 지나지 않는다. 지도자의 지혜로 산림녹화는 이루었지만, 그린벨트는 무절제한 개발로 몸살이 날 정도이다. 산을 허물고, 뚫어 급하지 않은 도로를 만들고, 무슨 집열판으로 상당한 규모의 숲이 사라졌다. 사람의 손이 닿은 곳이 곧 질서가 파괴되는 자리이다.
이제 이야기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곳 내가 5년 전 옮겨온 산동네는 지금 막 공사 중이다. 건너편 마을엔 오래된 집들이 거의 모두 신축공사를 한다. 그건 탓할 수 없다. 문제는 도시개발공사이다. 여의천 양쪽 길 일부 구간은 온갖 장비들이 동원되어 사통팔달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 기초공사를 하고 있다. 조용하던 여의천 들길이 얼마 후 차량이 폭주하는 소란한 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시냇가의 큰 버드나무와 동네 둑길에 상징처럼 서있던 벚꽃 나무들이 사라졌다. 이제 머지않아 청둥오리들과 백로와 왜가리들도 한적한 곳으로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서식할 아늑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최근, 이 지역에 대량의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도시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아파트와 길만을 만드는, 모든 자연의 도시화, 생각만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효율성, 편의성에 한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철학이나 미학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녹지가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한지, 불안한지 참 알 수가 없다. 숲은 인간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숲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나라에서 ‘철학자의 길’이란 연목구어(緣木求魚)처럼 기대난이다. 천박한 정치와 행정 편의주의가 언제까지 이 땅에서 지속이 되어야 할까? 건설장비들의 굴착 소리만 들어도 불편해지고 슬퍼진다.
그래서, 어느 시인의 시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