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10월 29일. 괴벨스의 39번째 생일. 히틀러가 선전부를 방문!
“우리는 단둘이 내 방으로 갔다. 그는 아주 다정하고 친근하게 이야기했다.
과거의 시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단결했고, 그가 얼마나 개인적으로 나를 좋아하는지를.
그는 내게 그렇게 감동을 주었다. 멋진 헌정사가 담긴 그의 사진을 한 장 내게 주었다.
……그와 단둘이 보낸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는 내게 가슴 속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걱정을 품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나를 신뢰하는지, 그가 내게 맡기려는 과업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1938년 6월 하순. 괴벨스, 히틀러의 생가를 전격 방문!
괴벨스는 '총통 각하'가 성장한 린츠 근처 레온딩을 방문했을 때, 다시 힘과 믿음을 회복했다.
그 마을 묘지에 있는 히틀러 부모의 무덤 곁에서 “여기에 그토록 위대한 역사적 천재의 부모가 잠들어 있다는 경외감”이 그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다. 오랫동안 무덤가에 서 있던 그는 묘지 건너편에 히틀러 부모의 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마치 '총통 각하'와 깊은 결속감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 집을 자기 부모의 집과 같은 모습으로 받아 들였다. 그는 이 집이 “아주 작고 소박하다.”라고 썼다. “사람들이 그의 영토였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작고 귀여운 방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계획들을 만들어내고 미래를 꿈꾸었다.” 마지막에 정원을 가로질러가면서 괴벨스는 여기에서 어떻게 “꼬마 아돌프가 밤마다 사과와 배를 땄는지”상상했다.
또 괴벨스는 히틀러의 학교 친구들로부터 그가 청소년 시기에도 “항상 우두머리”였으며 친구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해주었고 언제나 그들의 “좋은 동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어머니도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고 엄격했다.” 괴벨스는 그러한 출신 성분과 괴벨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 히틀러가 겪어야 했던( “합스부르크 정권의 무뢰한들에게 쫓기고 학대받고 체포되었다.”) 수난이 두 사람 모두에게 더욱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사명을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괴벨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행복하다”면서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모든 방들을 둘러보며 “이 집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1938년 8월 초. 원기충전한 괴벨스, 아내에게 자신의 애인을 소개하며 당당히 하렘을 꿈꾸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괴벨스와 마그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괴벨스는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전에, 괴벨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휴가를 리다 바로바와 함께 랑케에서 보냈다.
괴벨스는 그곳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8월 초가 되어서야 마그다에게 그 영화배우와 맺은 관계의 전모를 밝혔다.
그러나 괴벨스는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이 기쁘다”라고 하면서 특이하게도 자신이 직접 마그다에게 가지 않고, 리다 바로바를 먼저 보내 여자 대 여자로 자신의 계획에 준비하도록 하려 했다. 그 계획이란 앞으로 세 사람이 함께 결혼 생활을 하자는 것이었다.
1938년 8월 15일. 열받은 아내(마그다)가 히틀러에게 고소미.
그녀는 괴벨스가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참을 수 없는 그 상황을 끝내려고 히틀러에게 간 것이다.
히틀러는 “깊은 충격”으로 반응했으나, 2월의 블롬베르크 스캔들을 겪은 후라 또 다른 스캔들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녀가 요구하는 이혼을 금지했다. 히틀러는 이것이 “자신의 위신을 희생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마그다가 히틀러를 찾아간 이유는 괴벨스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괴벨스와 바로바의 관계를 인정했으며 실제로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는데, 쑥맥 괴벨스가 아내 앞에서 애인과 서슴없는 애정 행각을 벌였으니 마그다 입장에선 굉장한 수치심을 느꼈겠지요. 이단의 말로입니다!
같은 날. 히틀러, 괴벨스 소환 및 폭풍질타!
히틀러는 괴벨스를 당장 불러들여 “매우 긴 시간 동안 심각한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의무를 일깨우고 리다 바로바와 당장 헤어지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괴벨스에게 추가로 압력을 가하는 뜻에서 히틀러는 괴벨스의 정치 이력을 마그다와 결혼을 유지하는 것과 결부시켰다. 그리고 히틀러는 마그다에게 그녀가 이를 승인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물론 체코슬로바키아와 무력 분쟁을 앞두고 노련한 선동가를 잃고 싶지 않았던 히틀러는 시간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고 괴벨스의 부부 싸움에 “9월 말까지 휴전”을 명령했다.
괴벨스, 히틀러의 명령에 주저없이 무릎꿇다.
괴벨스는 “매우 깊은” 충격을 받았고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러나 곧 “매우 어렵고”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의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난 관 속에서도 이를 따라야 한다. 그외에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앞에 무릎 꿇는다. 완벽하게, 그 어떤 불평도 없이” 그는 저녁 늦게 리다 바로바와 “아주 길고 아주 슬픈 전화 통화”를 마지막으로 했다. “그러나 내 심장이 부서지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강하고 무자비하고 오로지 의무에 복무하는 삶. 청춘은 이제 지나가바렸다.”
……동시에 리다 바로바의 배우 인생은 완전히 쫑나게 됩니다.

1939년 여름. 괴벨스, 히틀러의 과격한 정책에 불안을 느끼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총통 각하'의 결연함을 선전장관은 계속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괴벨스가 더는 그를 숭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비극을 가져올 교만이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운명에 도전했고, 너무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거기에는 궁핌과 고통, 한마디로 말해 희생, 예전에 괴벨스에게 흔들림 없는 믿음을 주었던 그 희생이 결여되어 있었다. 회의의 순간들에 괴벨스는 팽창욕에 사로잡힌 히틀러를 평화 노선으로 유도하리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에게 이야기하고 그를 자신의 마력으로 끌어들이면, 괴벨스는 불안감이 새로이 밀려들기 전에 '섭리'가 그의 손을 이끌고 있다고 더욱 광신적으로 자신을 속였다.
1939년 8월. 괴벨스의 눈으로 본 독소불가침조약.
“유쾌한 흥분에 젖어 있다. 국민들은 이제 전쟁이 없을 것이고 만일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이 협정의 배후 의미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협정을 팽팽하던 긴장이 완화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떠도는 웃음들은 조금은 교활한 느낌을 주는 데, 그들은 이를 숨기지 않고 눈을 끔쩍거린다. 우리 언론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 나라는 바로 세계의 공적 제1호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일주일후 영국과 세계 분할 협정에 실패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전쟁 시기의 괴벨스 그냥 충견과 같은 빠돌이이기 때문에 별로 적을 이야기가...
ps.모든 자료는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에서 발췌함.
첫댓글 히틀러를 위한 삶을 산 1인. 괴벨스는 꼭 "1등이 될수 없다면 1등이 될 사람 옆에 서리라."라는 생각을 갖고있었던듯...
괴벨스 보다 더 한 인간이 루돌프 헤스였습니다.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의 후임이 될 수 없었던 반면에 "누군가의 손에 놓여진 밀랍인형이 된다는 느낌을 사랑했다"고 할 정도로 꼭두각시였던 헤스는 일찌감치 총통대리를 맡았지요. 물론 미쳐서라고 밖엔 볼 수 없는 영국 탈주(?)이후 국적이 되지만...
ㅋ 탈주..ㅋ
앞부분읽다가 게이물인 줄 알았음....
저도.ㅋ
두껍지만 꽤 재미있게 읽은 괴벨스 평전이었지요. 심리학 책인듯한 제목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 그렇지;
롬멜도 충신입니다.
롬멜이 충신이라고 보기에는 군인으로써의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죠...
히틀러보단 독일이란 모국의 충신이죠...
롬멜은 나찌맞고요, 사명감보다는 개인의 영달에 목숨 건 인간 맞고요, 사단장(전술) 이상의 자리(전략)에 오를 능력이 없었던 인간 맞고요, 아프리카 전선은 롬멜의 영광 하나를 위해 전력을 말아드신 블랙홀 맞습니다.
http://panzerkatz.egloos.com/1386321
애당초 지키라했는대 선빵한게 잘못인지....
첫 사진 보고 드는 생각 '역시 선전가는 혀도 두 개'
오 정말 그렇게 보이도록 찍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