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5:1~3
지난 한주동안 장례를 통해 두 집안에 복을 던져놓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두 집안에 변화가 보였고, 구원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힘든 한주의 시간들이었는데 5년 만에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에 모두 완벽하게 수행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피하고, 맞기고, 다른 이를 보내고 했는데 지난 한주는 모두 감당했습니다. 모두 성도님들의 기도 덕분입니다. 저의 이 발자취는 모두 성도님들의 가정의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기본적인 장례에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부담이 덜 되지만,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을 주실 때 그때가 가장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항상 말씀을 전하기전에는 이유를 모르지만 말씀을 선포하고 난 이후 정말 완벽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판단하는 입장이 아닌 전하는 자의 역할을 잘 하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화, 수요일 사역은 그나마 쉬웠는데 목요일 사역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목사님 집안이었지만 불신자 집안이어서 수많은 목사님, 많은 성도들을 데리고 와도 예배를 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제가 첫 예배 말씀 선포자이고, 모인 모든 유족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한주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순간부터 날마다 나를 비우고 예수님을 채워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 하고, 그로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하나님의 좋은 것을 매일 공급받고, 공급을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오늘 산상수훈의 교훈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교훈입니다.
산상 수훈을 듣는 대상
* 무리 =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등의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죠.), * 예수님의 제자
앉으시니 = 최고의 권위자는 서서 가르치지 않는 유대 풍습 중 한가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앉으셔서 가르치셨다는 것은 당신의 가르침은 최고의 권위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현재도 권위 있는 자들이 가르칠 때는 앉아서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 서서 가르치는 이유는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있음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대독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회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심령이 헬라어 프뉴마티는 심령(마음, 영혼)이 겸손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의 기본적인 바탕의 중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는 헬라어 프라오스는 온화함의 뜻입니다. 즉 겸손을 포함하는 온화함을 뜻하는 데요. 마음씨가 착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성품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나를 조롱하는 자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하고 부드러운 자비가 나가는 것. 저는 그 순간 이렇게 돼야 하는데 화가 먼저 치밀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되더라고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겸손은 헬라어 타이페노스의 뜻은 ‘짓눌린’입니다. 겸손의 한글 뜻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나추는 태도를 말하는 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은 한글 뜻에 한 단계 더하신 뜻입니다. 상대방에게 짓눌린다 할지라도, 환경적으로 천한 존재로 여겨지고 초라한 낮은 신분의 등급 같은 대우를 받아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상대방을 높이고,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령이 하신 것은 나의 마음은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너희에 어떤 마음, 생각, 행동도 용서(긍휼과 자비)로 포용할 수 있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헬라어 프토코이는 신약성경에서 34회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난한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난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자는 *가르치는 것보다는 배우는 것을, 명령하는 것보다는 순종하는 것을, 자만하는 것 보다는 겸손한 것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기를 원하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마음과, 끝까지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감사함을 자신을 내어 드리는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신을 내어주고 주님을 채우는 가난한 심령에게는 자신이 내어준 겸손의 그릇의 분량만큼 이 세상에서나 미래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8가지 복의 대한 말씀 중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찾자 봤습니다. 어떤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 “복이 있나니”는 말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헬라어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이 말이 사람들의 행복을 가리켜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되면 내가 복 받는다. 이런 어감으로 “복이 있나니”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하면 하나님이 행복해진데요. 즉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국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 받기 원하느냐? 그럼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심령이 가난한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님이 나로 인해 행복해 하신다. 너희도 나처럼 살면, 하나님이 행복해 하실 것이고, 그럼 너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거야. 라고 산에 모인 무리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엄청 놀랍지 않나요.
앞서 말씀드린 심령이란 단어에 숨어있는 뜻을 통해 예수님의 기본적인 마음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으로 무리들을 대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구원하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행복해야 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왜 내어주었을까요?
그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습관 때문이 아닐까요?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 안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믿지 못했기에 보지 못한 결과로 십자가 못을 박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항상 행복하게 해드리는 예수님은 그럼 어떤 생활을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는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만큼 가난한 분이 없었고<머리 둘 곳도 없으셨다>, 예수님만큼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은 사람이 없었고<툭하면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만큼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 지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령의 행복입니다. 즉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다시 반복하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내어드린 만큼의 빈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 하나님의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해 하시도록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생각이 출발하는 그 시점에 5초 기도를 할 수 있으면 심령이 가난한자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생활에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이 기도문을 예수님의 성품 8가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믿음 생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생활, 여호와를 기뻐하는 생활을 모두 포함해서 이렇게 기도하면, 그리고 그런 생활이 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8가지 성품으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린 것처럼, 이 기도 하나로 하나님을 매우 행복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될 것을 확신하면서 심혈을 기울여서 5초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잊지 마세요.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내 안에, 생활에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 짐으로 나타나는 가장 근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의 본 바탕인 온유와 겸손이 내 심령에 쓰여 가고, 채워짐으로 하나님이 행복해 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되어 천국을 받고 선물로 끊임없이 무한대로 나눠주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