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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병대원들의 추상같은 군기는 역사적인 전투에 참전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군참모총장·해병대사령관·해병사단장의 간곡한 당부를 각자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장병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천 앞바다에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됐습니다. …이 작전은 불법 남침한 북한 괴뢰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구해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15일 오후 상륙을 준비 중인 한국 해병대 용사들에게 함내 방송을 통해 간곡히 당부했다. 손제독의 훈시에 이어 신현준 사령관도 장병들에게 새로운 각오와 용전분투를 촉구하는 인사말을 방송했다.
조국과 민족을 구하는 전투, 이 한마디가 장병 개개인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심어 주지 않았을까. 나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해병대 용사들의 엄정한 군기가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고 본다.또 한 가지는 손제독과 신사령관이 끝까지 전선을 지키며 장병들의 든든한 배후가 돼 주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서울 수복작전이 끝날 때까지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작전을 지휘했다. 참모총장과 사령관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큼 든든한 위안은 없을 것이다.
9월15일 하루 동안 인천에 상륙한 양국 병력은 1만3000여 명에 달했다. 450대의 차량을 포함해 많은 장비와 보급품이 양륙돼 적 배후에 강력한 교두보를 조성한다는 1차 목표가 달성됐다.인천 해안 교두보를 넓혀 나가기 위해 한미 해병대는 시가지 소탕작전에 주력했다. 폭격과 함포 사격을 받은 중심가 해안 지역에서는 적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해안선 북쪽의 묘지고지 일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북쪽 해안지역에서 인민군은 한미 해병대 병력의 상륙을 막기 위해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맞서 약간의 인명 피해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후속 상륙 주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력과 전차의 위력에 압도당해 이내 패주했다. 인천 지역 방어를 담당했던 인민군 경비여단은 동쪽으로 후퇴, 서울 방비 강화를 꾀하는 것 같았다.
상륙군에게 적군보다 무서운 것은 어둠이었다. 가랑비 속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시가지는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어디서 무엇이 날아올지 모를 공포와 긴장감 속에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하며 건물과 가로를 확보해 점령지를 넓혀 나가는 작전이 밤새 계속됐다.
16일 새벽이 밝은 뒤 시내에 인민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미 해병대는 서울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하고 한국 해병대는 시가지 잔적소탕 작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미 인천을 포기한 적이 철수한 뒤여서 격전은 없었다. 상륙 사흘만인 9월17일 인천 시가지 소탕 작전을 끝낸 한국 해병대는 곧바로 서울 탈환을 위해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했다.
이때 나는 손제독을 수행해 해병대 작전을 보좌했다. 손제독은 신사령관과 함께 부평과 주안 중간 지점에 지휘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인접한 미 제5해병연대 지휘부를 찾아가 한국 해병대의 공격 진로를 협의했다.그때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던 손제독의 시야에 부평 평야를 가로질러 오는 적의 T - 34 탱크 9대가 포착됐다. 이 긴박한 상황을 부대에 알리려고 벌떡 일어나는 순간 전투기들이 날아와 폭격을 시작했다. 항공모함 시실리 호에서 날아온 함재기들이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