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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수필가(11) - 견일영
견일영은 1935년에 구미시 선산읍 이문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공직 생활로 어머니는 객지로 떠돌아 다녔으므로 유년기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전형적인 농촌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선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니고 중학교는 아버지가 계시는 안동에서 다녔다. 안동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안동은 성장기를 보낸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선산에서 보낸 유년기는 견일영 작가에게는 아주 강한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골목 친구와 학교를 다닌 일, 땅 따먹기를 하였던 일, 더군다나 암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들판으로 나갔던 일이 그의 수필에 자주 등장한다. 유년기의 시골 생활은 견일영의 작품 세계에서 아주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만큼 견일영의 수필에는 짙은 서정성을 드리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
그가 회고하는 안동에서 생활도 영호루, 낙동강, 그리고 검은 연기를 뿜으며 치이익 칙 소리를 내던 기차 이야기가 나온다. 도시에서 보낸 수 십 년보다 더 강하게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진학하여 1958년에 졸업한다. 이때부터 그의 평생 천직이 된 교직 생활을 41년 4개월 간을 한다. 교사 - 장학사 - 교감 -장학관 -교장으로 이어진다. 1999년에 경북고 교장 직을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은퇴한다.
그의 회고담에 성장기 때의 문학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국어교육과로 진학하여 4학년 때 체신부에서 공모한 우체부의 노래에 가사가 당선되었다. 그 후로 교가를 위시하여 많은 노래 가사를 지었다. 견일영에게 특이한 점이라면 교직 생활을 할 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이다. 재직하는 학교에 음악 선생이 없으면 음악을 가르쳤다. 학교의 교가를 지어준 학교도 여럿이다. 교가는 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짓는다. 교직 생활에서 문학 창작을 하였으리라.
그의 초년에는 문학보다는 어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대학원에서도 어학을 전공하였다.
문학 단체에서 활동이 두드러지지게 많지 않다는 것도 특이하다. 일찍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영남수필 문학회, 대구문협 그리고 한국문협고과 여백문학회, 선주 문학회에 관여하고 있다 그의 수필 작품 활동은 영남수필문학회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982년도의 제 15집에서야 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영남수필에 참여하여 30년 이상을 작품 발표를 하고 있다. 이 자료만으로도 그가 수필을 쓴 기간이 짧지 않다. 그런데도 대구 문단에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문단 활동에 소홀한 탓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견일영 수필의 특성이라면 서정성이 아주 짙다는 것이다. 이 년배의 작가들이 의미 내용을 강조하는 교시형 수필이 주종을 이룬 반면에 견일영은 감성적인 호소력이 강한 글을 썼다. 수필 이론으로 따진다면 앞 시대의 수필가보다는 한 걸음 앞선 글이었다. 첫 번 째 수필집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에 실린 글들은 더욱 그러하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에서 맛볼 수 있는 선비의 맛도 느껴진다.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에서 보듯이 서정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인사도 없이 떠나보내는 현대 사회의 냉정함을 고발한다. 나는 서울의 따님을 만나러 가는 것을 소재로 한 ‘망월사 역에서’는 내가 수필을 쓰는데 롤 모델로 삼았던 적도 있다. ‘기간제 교사’를 평한 신재기 교수의 평글도 유명하다.
2013년에 발간한 수필집 ‘산수화 뒤에서’는 앞서 발표한 그의 수필과는 다른 글이다. 단순히 서정성 짙은 글이 아니다. 인생을 깊이 통찰하는 글이다. 일반적으로 인생을 통찰하는 글이라고 하면 재미도 적고, 실제로 깊은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글이 많다. 그러나 ‘산수화 뒤에서’에 실린 글은 의미 내용이 아주 강하다.
그의 수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의견이나 주장으로 하지 않고 이야기 속에 담아 낸다. 수필을 모두 읽고 나서야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의미 내용을 깨닫는다.
그의 말대로 백혈병이라는 병을 앓으면서 쓴 글이라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좋은 글을 써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으로 성숙되어야만 가능하다. 이 수필집에는 주옥같은 글들이 많다. 글을 배우는 사람이거나, 수필을 쓰는 사람에게도 이 수필집을 권하고 싶다.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년 퇴임을 하고 남부도서관, 서부도서관, 북부도서관, 효목도서관 등에서 수필 강의도 하고, 평생 교육에도 관여하면서 노후를 보낸다. 어떤 면에서 그의 수필 문학은 노년에 와서 꽃을 피운다고 봐야겠다.
그가 쓴 수필문학론에 의하면(나의 작가 노트) 문장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였다. 퇴고도 문장 다듬기이다. 퇴고를 몇 번이나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문장은 결코 미문은 아니다. 읽기가 수월하고 유연하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문학적인 표현을 더 중요시한다고 하였다.
내가 느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단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고 조용히 글만 쓰시는 분들이 대구 문단에서는 소홀히 다루었다 싶다. 대구 문협에 관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크게 반성해야 겠다.
2010년에 대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수필집
1. 1997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천인사)
2. 2006 아름다운 영혼(그루사)
3. 2012 탁영금(소설)
4. 2013 산수화 뒤에서(수필 미학사)
아름다운 영혼
견 일 영
하릴없이 시간을 헤아려 본다.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손가락을 꼽는다. 쉼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 어떤 영혼이 존재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영겁의 세계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그 시간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다는 상대성 이론은 천재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지 그 시간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남은 세월을 조바심으로 헤아리지 말고, 지나온 세월을 한탄으로 되새기지 말아야지. 간이역에 잠시 머무는 완행열차처럼 조그만 역 주변의 소박한 풍경을 가슴에 담아 두고 추억만 간직한 채 훌훌 떠나가자. 우리는 어차피 떠나야 할 운명이 아닌가.
사랑했던 사람도 미워했던 자신도 다 잊어버리고 떠나야 한다.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영혼만 남는 것이니까.
어린애의 웃음소리, 소녀의 아지랑이 같은 꿈, 장년의 진취적 용기, 노인의 무한한 자비가 모두 아름다운 영혼이며, 이 영혼 속에 젖어들면 잠시 시간도 머무르게 된다.
가을비가 멎고 찬 기은이 엄습해 온다. 모든 것을 떠나게 하는 늦가을, 하늘이 수정처럼 맑게 개어 있다. 아름다운 영혼은 가을 하늘에 머물다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의 미소로 다독거린다.
11월의 끝자락에서 팔공산 순환도로의 청단풍은 여름내 이루지 못한 아픈 사랑을 빨간 색으로 물들이고 더 머물지 못할 대지 위에서 삶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누구나 떠난다. 남아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시간을 보석처럼 가슴에 담고 떠난다. 아름다운 영혼으로 정지했던 그 순간을 꼭 껴안고, 유성처럼 떠나간다. 자신의 외모를 아무리 다듬어 봐도 남은 시간을 더 늘릴 수 없고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즐겨 봐도 시간은 더 짧게만 느껴질 뿐이다. 오직 아름다운 영혼만이 영원한 시간으로 변용시킬 수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오래오래 머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허전해 하고, 이 좋은 세상에서 무릉도원을 찾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도 고독 속에 방황하고 있다. 나는 외로움을 타는 입양아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그리움에 방황하는 천애 고아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주어도 허전하고 그에게 생명을 바쳐도 성이 차지 않으니 어디에서 방황의 끝머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남고 싶다.
신은 죽었다고 설파하며 외로움 속에 생을 마감한 니체도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로 외로움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더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나 아예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사랑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은 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영혼은 혼자 독립할 수 없는가. 외로움을 타지 않고 혼자 꼿꼿이 살아갈 수는 없는가. 고독이라는 바이러스는 스님이고 수녀고 내 자신에게까지 마구 침입하여 아무도 평온하게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외로움을 벗겨줄 수만 있다면 어떤 신이든 동거할 수 있겠다.
죽음 앞에서 아무도 인생을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가 아닌가. 결국 영혼은 외로움을 벗어날 수 없고 그 고독과의 투쟁에서 실낱같은 사랑으로 연명하고 있지 않는가.
늦가을 산자락에 떨어진 단풍잎이 찬 서리에 곱다.
산수화(山水畵) 뒤에서
견 일 영
산수화를 보면 어느 것이나 내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 나지막한 오두막집이 보이면 우리 집과 닮은 데가 있는가 찾아본다. 귀소 본능인가.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내가 산수화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데는 자연에 대한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으면 세상의 온갖 두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고(先考)께서도 산을 은신처로 삼으셨던지 호를 요산(樂山)이라 했다. 염량세태에 실망할 때마다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 시골로 내려가려고 하셨다. 그러나 한 번도 고향에서 며칠이라도 유하시는 걸 보지 못했고, 산속에 들어가 산수 속에 자적하시지도 않았다. 결국 산수화 뒤에 숨어 세속의 따가운 눈을 가리기만 하셨던 것이다.
나의 호도 솔뫼다. 산을 방패로 내가 욕심이 없고, 자연 친화적이고, 늘 푸른 꿈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현수막만 내걸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타인의 시선을 산수화에 묶어 놓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정선(鄭敾)의 금강전도(金剛全圖)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했다. 정선의 그림은 사물을 단순하게 실경(實景)으로 재현하지 않고, 회화적 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미학적 안목이나 이론에 궁한 나는 그 그림의 참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금강산의 사실적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지만 나는 그 그림 속에서 금강산의 진면목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오래 그 그림을 눈여겨봤다.
진경산수화는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탐승유력(探勝遊歷) 풍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그 사상이 어떻게 금상산의 예각적인 바위 봉우리들을 날카로운 수직 주름으로 요약하여 표현했는지 잘 모르겠다. 진경산수화는 내가 그 뒤에 숨어 은자연(隱者然)하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내 몸을 산수화로 감싸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남들이 정선의 금강전도처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난해한 경지로 높여 주었으면 하는 허욕을 부려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실경산수화 뒤에 숨어서 자연에 순명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다.
내가 젊었을 때는 내 모습이나 남의 모습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실경만 보았다. 나이 드니 진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깊은 속뜻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진경(眞景)은 안 보이는 곳을 표출해 내는 것이고,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형상화한 회화(繪畵)라고 본다. 불국사 아래 영지(影池)에는 석가탑이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는 물속에 비친 유영탑을 보고 뛰어들었다. 그의 가슴에 비친 탑은 진경이었고, 그래서 그는 단순한 익사자가 되지 않고, 사랑의 화신이 된 것이다.
심리학자 중에는 자기 능력이나 태도나 주장을 가급적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리적 경향을 요나 콤플렉스라고 한다. 나의 능력이나 태도나 주장을 가급적 감추고 드러내려 하지 않는 속마음은 어쩔 수 없는 무의식적 본능인 것 같다. 나는 절대로 도를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고, 모난 짓도 하지 않고, 모든 시비에 말려들지도 않는 중도(中道)만을 걸으려고 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처세술이 늘어났다.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이 되어 위장술을 쓰게 되었다. 적을 만들지 않아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꾀를 쓴다. 내가 바보가 되었을 때보다 잘난 체했을 때 적의 시선은 날카롭게 나를 겨냥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연히 남들 앞에 나를 폄하하는 데 익숙해졌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구차하지만 장수하고 싶었다.
나는 아마 태어날 때부터 요나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아무 욕심 없이 고향에 가서 산수나 즐기겠다고 하는데 누가 나를 욕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던 요나처럼 바다에 빠지고, 큰 물고기에게 먹혀 결국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른다.
도연명도 도피 심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맞붙어 대들지 못하고, 은자(隱者)의 이름으로 방패를 삼아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지만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는 군(郡)에서 감독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향리 소아(鄕里小兒)들에게 허리를 굽히기 싫어 고향 농촌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했다.
내가 숨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산수화 뒤다. 그러나 가엽게도 내 이상과는 달리 고향에는 내 몸 하나를 지탱할 방 한 칸도 없다. 귀원전거(歸園田居)하는 꿈도 내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차피 나는 오류와 동거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나는 언젠가 전원에 돌아가 의고(擬古) 시나 지으며 살아가고 싶다.
불쌍하게도 나는 이런 도피 심리, 공포 심리, 우유부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 산수화의 뒤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와 자유롭게 이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