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할 그 생사고(生死苦)를 여의길이 바로 그 한 생각 단속하는데 있는 것.
송담 큰스님
원래 불법은 무슨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연구해서 지식을 많이 얻어 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보거나 선지식의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거기에서 신심과 분심을 일으켜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을 보고 법문을 듣는 것이지, 경을 보고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의 지식을 넓혀 가지고 아는 것이 많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을 많이 보고, 법문을 많이 들어서 아주 아는 것이 풍부해지면은 그 사람이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참 많이 했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랑을 삼고, 남들도 그러한 이부럽게 생각하신 분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마는, 이 불법은 무엇을 많이 보고 듣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해서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알고, 많이 듣고 해서 잔뜩 속에 쌓아두고 있는 것보다는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하나라도 더 많이 잊어버리고, 버리는 데에서 오히려 불법에 공부가 더 많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병에다가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병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자꾸 쏟아서 버려서 깨끗한 빈 병으로 만드는 거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학문, 학설, 일체 이론은 다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해야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그 들으신 것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랑조랑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서 그분이 오늘 법문을 잘 들으신 것이라고는 꼭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 시간 동안에 걸쳐서 그 여러 가지 법문을 들었지마는 한 말씀도 옮길 말씀이 없고, 다못 알 수 없는 ‘이뭣고?’한 생각만 속에서 간절히 일어나고있는 그분이야말로 오늘 법문을 누구보다도 잘 들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무슨 경을 많이 봐 가지고 누구한테라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무슨 불교에 대한 교리를 알고 싶어서 밤낮 책을 뒤적거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어쨌든지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이 간단한 이 한 말씀만에 의지해서 걸어가실 때나, 앉아 계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실 때나, 또는 식사를 하실 때나, 변소에 가실 그런 때까지라도 생각 생각이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가 들어지고, 화두를 들을라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참 부처님 제자가 되는 길이 바로 거기 있는 것이고, 입니다.
첫댓글 _()()()_
()()()
이 뭣고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