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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이사야 10,5-7.13-16 마태오 11,25-27
똥파리는 꽃밭의 한 무더기 똥을 보며 꽃밭을 안다고 말한다
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대화의 한자어를 보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Dialogue인데, 어원상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와 logos(말, 말씀)에서 왔습니다. 직역하면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로, 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쪽에서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잘 하십니까?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는 공중전화 줄이 길게 서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나오고서는 길을 걸어가면서 길게 통화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화로 길게 통화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메신저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메신저로 소통할 때도 유행어와 이모티콘 표현이 가득해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대화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화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꼭 필요한 대화이지만, 대화가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해도 많습니다.
이런 대화 부족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식 기도하는 것도 어려워하며, 메신저를 통한 간단한 대화처럼 짧은 기도에만 익숙해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만 마치고서는 밖으로 나가시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 곁을 떠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 짧은 만남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계속된 오해와 불통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전교 활동 가운데에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당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어렵고 힘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힘들다고 대화를 멈춰버리면 당연히 주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대화도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다면 과연 대화가 가능할까요? 대화가 되지 않고 가까운 관계도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 레싱).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11,27)
아버지를
너무도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그의 아버지를 알 수 있었네.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그의 아버지께서도
세상에서
어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보다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따르는
철부지 같은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철부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철부지들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철부지에게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철부지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모두가 사랑속에
살고 있음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철부지가 우리의
마음을 닦아줍니다.
철부지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볼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작고도 단순한
삶의 기쁨을
철부지들에게
배우는 행복한 날
되십시오.
즐겁고 신나는
철부지의 새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수요일>(7.1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6)
'단순함의 덕!'
오늘 복음(마태11,25-27)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나고, 철부지들을 통해 이루어졌음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11,25-2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철부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고,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철부지들인가?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이 아니라, '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 앞에 벌어진 사건이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영(靈)이 맑고 깨끗한 사람', 곧 '단순함의 덕(지혜)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지칭한 것인데, 그들은 진짜 지혜가 아니라 지혜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말재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많이 알고 있음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참지혜인 단순함의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말이 적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철부지들이 됩시다!
단순함의 덕, 단순함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철부지들이 됩시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언제 어디서나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