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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0: 1 - 2 유순하고 담대한
제 10 장 : 사도권의 참된 목적
1. 사도권 변호의 목적 ( 10: 1 – 2 )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고린도후서 10-12장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변증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대면할 때 겸손했다고 말한다. 그는 고린도에서 교인들을 대할 때 겸손한 태도로 대했었다.
지금 그들을 떠나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온화함으로 그들을 권면하기를 원한다.
‘관용’이라는 원어(에피에이케이아)도 ‘온유함, 온화함’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직분 자여야 한다.
고후 10: 1 유순하고 담대한 -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
공동 번역이나 RSV에는 주어 '나 바울'이란 표현이 문장 맨 앞에 나와 있다.
그것은 이 부분이 강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여 말을 시작하는 경우는 갈 5: 2와 살전 2: 18 뿐인데 이 두 부분에서는 바울의 강하고 확신에 찬 진술이 이어진다.
* 갈 5: 2 –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 살전 2: 18 -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본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아니라 바울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그에 대해 비난한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바울은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있을 때는 비굴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10절)
* 고전 2: 3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2]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고 비난 받았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이 사람들과 마주 대할 때 자신의 태도 및 요구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이라는 평은 사실 바울의 온유와 관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3]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이 온유(溫柔)와 관용(寬容)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온유한 자로 소개하셨다.
* 마 11: 29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 마 5: 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혹자는 예수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았다(Lowery).
또 혹자는 '온유함'을 기독교의 특징적인 덕목 또는 은사로 여겼다(Barrett).
* 갈 5: 23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갈 6: 1 –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골 3: 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지 간에 이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 나타난다.
바울 자신의 삶이 예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때 그는 예수를 본받아 '온유함'과 '관용'의 덕목으로 규정되는 삶을 살고자 했고 인내와 용서의 삶을 살고자 했다.
관용(寬容, Toleration)이란 정치, 종교, 도덕, 학문, 사상, 양심등의 영역에서 의견이 다를 때 논쟁은 하되 물리적 폭력에 호소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이념을 말한다.
종교상의 관용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 입장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의 관용은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입은 자임을 알아 타인의 죄과를 준엄하게 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의 덕목 중 하나이며 오래 참음으로도 번역되었다.
* 빌 4: 5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로 이러한 그의 삶이 적대자들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고후 10: 2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 -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하고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에 대해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여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담대(膽大)하게 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큼은 그렇게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1]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여기서 드러나는바 바울에게 가해진 또 하나의 악의적 모함은 그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이기적인 욕망과 육체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1: 17. 2: 17, 3: 5, 4: 2, 7: 2).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사도 바울을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육체에 따라(사르키코스sarkikov") 행한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오직 인간 본성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 행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런 사람은 자기 육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과 불순한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자로써, 세상의 욕심과 명예심을 가지고 행할 것이다.
복음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그렇게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육체대로 행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지키기 위해 그런 자들의 중상 모락에 대하여 담대하고 단호하게 대처했다.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에서 잘못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겸손과 온유함과 온화함으로 대하려 하였으나, 자신을 그릇되이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으로 대하려 하였다.
2]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이 말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로 하여금 강경한 태도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잘못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때에도 사도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의 지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바울이 하는 일마다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마음을 침울하게 했다. 물론 비난에 대해서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러려고 애쓰지 않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변명은 구차스러운 일이고, 또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하나님께 맡겼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선이므로 자기를 변명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었다. 악한 때에 세월을 아끼는 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었다.
본문 1절에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이란 말로 시작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자기들과 대면하지 않을 때는 몹시 담대하지만, 자기들 앞에서는 매우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멀리 떨어져서는 편지를 쓸 수 있으나, 자기들 앞에서는 편지에 썼던 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들과 대면해서도 말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도록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지란 어떤 면으로는 위험하다. 보는 앞에서 차마 할 수 없는 신랄한 말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면하면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텐데 편지를 통하다가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바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편지로도 쓰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바울이 인간적인 동기로 행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행동이나 힘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바울도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인도자가 되시고 그의 능력이 되셨다.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울이 ‘육체’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도 다른 사람과 같은 몸을 지닌 인간에 불과함을 의미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없는 삶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또는 육체대로 행치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나는 인간의 몸을 가진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적인 동기의 지배를 받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아니한다. 나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고 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생활이다.
우리는 육신을 지니는 동안 육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무리 성도라 해도 사람의 약점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다른 편지에 보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 7-8)고 했다. 신앙생활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다.
운동선수들이 경기하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감동을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피눈물 나는 훈련을 하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기장에서 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광과 수치를 각오하고 달려가는 경주자다.
잘하면 메달을 받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훈련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에 살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이 능력을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운동선수들의 말을 들으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에서도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 자신과 싸움을 해야 한다. 여기서 이기면 승리자가 되고 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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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