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堂 漫筆>
‘꼰대(kkondae)’ 유감(有感)
박 성환 언제부터인가 ‘꼰대’란 말이 젊은 층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듣기에 별로 유쾌스럽지 못하여 바람직한 말이 아닐 것임은 그 의태어적(擬態語的) 내지 의성어적(擬聲語的) 발화(發話)에서 짐작이 된다. 이 말은 ‘번데기’의 영남 사투리 ‘꼰데기’에서 나와 ‘꼰대’가 되었단다. 번데기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흉물스러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윗사람이 자기 생각을 일반화하여 나이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큰 진리의 말씀이기나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떠벌이는 사람을 폄하(貶下)하는 말이다. 영국 BBC방송에 의해 ‘kkondae’라는 단어로 해외에도 알려진 바 있다. 젊은 세대들의 일상용어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는 늙은이들의 불평과 자신들을 타박하고 훈계조의 말만 늘어놓는다는 젊은이들의 반감 사이에 이 ‘꼰대’라는 얄궂은 말이 두 세대를 경계 지운다.
세대차나 단절에서 오는 갈등은 비단 우리 사회만 겪는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제너레이션 갭(generation gap)’이라는 말이 일반화 되어있다. 이는 희랍신화의 올림퍼스 신들의 탄생과정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다. 태초에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os)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 사이에서 태어난 크로노스(Cronos: ‘시간의 신’)는 ‘꼰대질’하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처치한다. 밤이 되어 우라노스가 내려와 온몸으로 여신 가이아의 몸을 덮치니 남근(男根)이 부풀어 올랐다. 이때 장막 뒤에 숨어 있던 크로노스는 품고 있던 낫으로 우라노스의 남근을 베어 등 뒤로 던져버린다. [‘시간’은 그 애비조차 처치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거세하고 크로노스는 대신의 지위에 오른다.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크로노스
한편 크로노스는 자기를 거세할 자식이 나오리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내 레아(Rhea)가 낳는 자식들을 낳는 족족 삼켜버린다. 레아는 크로노스의 이런 황당한 꼰대 짓을 견디다 마지막 6번 째 자식 제우스(Zeus: ‘광명’)를 빼돌린다. 크로노스의 눈을 피하여 장성한 제우스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Metis)에게서 비약(秘藥)을 얻어 크로노스에게 먹여 삼킨 것을 토하게 한다. 삼킨 것(과거)을 토한 그는 위력을 잃는다. 제우스 도 아버지를 거세하고 올림퍼스의 주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 신화에서 보듯이 윗세대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제 자식을 삼키는 무참한 일조차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늙은 세대는 스스로의 덫에 갇혀 일방적이고 수긍될 수 없는 ‘자기 추측’이 현실화 될 것으로 확신하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힌다. 이들의 꼰대 짓은 자기들끼리의 모임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자기주장만 늘어놓고 옆 친구의 말을 막는다.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자기와 털끝만큼이라도 연결되는 대목이 나오면 그의 말을 끊고 자기 사연을 이어놓는다. 그러면 친구의 이야기 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엉뚱한 데로 흘러가버린다. 그들 끼리 이렇게 ‘꼰대 질’이 벌어지면 주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소리 지른다. 젊은이들은 이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며 불문곡직, ‘꼰대’라고 낙인찍고 외면한다. “능력도 없으면서 나이만 내세우고 콧대만 높이는 꼰대들”, “우리 자리 다 차지하고 앉아 우리 희망을 앗아 가버린 늙은 구렁이들”, “혐오스러운 늙다리들... 어쩌구저쩌구” 한다. 늙은이가 “나 때는 말이야”라고 자기의 과거사를 늘어놓기라도 하면 “라테는 말이야”라는 조롱한다. 늙은 세대는 그야말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흉물스러운 늙다리”로 전락하여 설 자리가 없어진 잉여인간(剩餘人間)으로 치부되고 만다.
크로노스에 의해 베인 우라노스의 남근은 ‘피의 정기’와 ‘사랑의 정기’가 함께 서려있었다. 우라노스의 남근의 피를 뒤집어 쓴 가이아는 그 정기로 ‘분노의 여신’을 낳는다. 그리고 크로노스가 내 던진 우라노스의 남근은 바다에 떨어져, 뿌리에 남아있던 ‘사랑의 정기’가 바다의 ‘거품’과 어우러져 이윽고 아름다운 여신—비너스(Venus)를 빚어낸다.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으로 인간에게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해준다. 우라노스는 남근이 잘렸기에 자식에게 분노하지만, 분노와 상반되는 사랑도 지니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 신화는 은유하고 있다. 삶이 부과하는 온갖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젊은이가 저지르는 잘못은 관습이나 이성으로만 나무랄 수 없다는 것을 “늙어보지 못한 너희 젊은 놈들은 모르지만, 젊어본 적이 있는 우리 늙은이들”은 알고 있다. 늙은 세대는 분노를 접고 젊은 세대를 사랑의 마음으로 감살 수 있다. 하여 세대 간의 단절 갈등은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먼저 보듬어 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리라.
기성세대의 이런 자세는 세대 간에 서로 흰 눈으로 흘겨보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공감(共感)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理解)에서 출발한다. “오리에게 수영은 희망사항이 아니듯이 이미 가진 것을 원하지 않으리라[버나드 쇼]”는 것쯤 헤아릴 수 있는 정도의 관심과 존중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 관심과 존중하는 마음이니까 이해하는 거라고 에둘러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감은 상하관계이기보다 동등관계라는 맥락이 내재한다. 공감은 “나는 너와 다르지만 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너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공감이라는 영어 ‘empathy’는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감’이다. 그래서 공감은 노력해야 작동하는 자질이다. 상대방 의견에서 내용의 타당성을 찾아내면 그 의견에 공감하게 된다. 이해를 거쳐 공감하게 되거나 공감을 거쳐 이해하게 되면 단절 갈등은 녹아내린다. 얽히고설킨 문제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여 이해와 공감을 끌어내야 풀 수 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소통(疏通:커뮤니케이션)이다.
젊은 세대와 원만한 소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나이든 쪽은 원칙을 너무 강조거나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일은 삼가야 한다. 무협지에서 고수(高手)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유연한 사람이다.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성급한 판단내리지 않고 자기 의견에의 맹종을 유도하지 않아야 한다. 현대는 모든 경계가 소멸해가는 시대이다. 자신의 잣대로 그어놓은 경계를 과감히 넘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同時代)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두 세대에게 요구되는 것이 많다. 그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양 세대는 ‘우리’로 살아가는 공동체에 소속된다. 어둠을 밝히는 양초는 만들어질 때 기름이 굳어서 고정된 과거로서의 시간이 양초의 모습으로 남는다. 제조과정에 굳어진 “과거 시간”이 들어있다. 양초는 스스로 녹아내리면서 과거로 불을 밝힌다.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능성을 비쳐주는 것이다.
젊은 세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명제가 그러나 일부 기성세대로 하여금 인기에 편승하려는 포퓰리즘에 기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도리에 맞지 않으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아야 한다. “젊을 때 사회주의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 처칠의 말은 젊은이들의 주장에 줏대 없이 무조건 따르면서 젊은 사고를 지닌 척하는 인기 영합적 행태를 경계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고 나이와 친해질 때 가장 좋아 보이고 성숙의 미를 보여준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을 것이다. “낄끼빠빠”라는 신조어가 있단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는 말이라고 한다. 습관, 취향 심지어 신념 등에서 어제를 버려야 한다. 늙다리로 취급받지 않으려면 낄끼빠빠해야 한다. 낄끼빠빠는 하지 않으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우기는 것은 경직된 사고를 낳을 뿐이다. 늙은 남자의 빨강 머리 염색이나, 늙은 여자의 젊은 여자 흉내 낸 긴 생머리는 처량하고 청승맞아 보인다.
요즘 정권의 포퓰리즘적 사회주의 정책과 얼치기 진보좌파 세력을 지지하면 ‘생각과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수구 꼴통’이라고 낙인찍어 ‘꼰대 프레임’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강남좌파’라 불리는 부류로, 또 다른 형태의 ‘꼰대’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은 2005년 전북大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가 386 인사들의 자체 모순적 행태를 비꼬는 말로 쓰면서 사용되기 시작됐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서 경제성장의 과실은 다 따먹고 온갖 혜택을 누리며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입으로만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는 이중적 ‘부자좌파’를 일컫는 말이다. 자신들의 부유한 삶을 가능케 한 자본주의체제를 부정하는 자기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꼰대들’이다. 자기는 부유하기만 한 속물(俗物)이 아니라 지성과 교양도 갖춘, 자본주의의 천민적 부르주아 계층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도도한 계층이라고 자만하는 부류들이다.
어느 늙은 강남좌파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미투’운동을 촉발한 최영미시인은 최근 시에서 “이것이 진보라면 밑씻개로나 쓰겠다/ 아니! 더러워서 밑씻개로도 쓰지 않겠다”라며 얼치기 진보좌파의 허위를 고발했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공산사회주의의 허위와 교조적 맹신을 고발하고 좌파적 전체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영국판 ‘강남좌파’에 해당하는 부류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강남죄파’ 중에는 최근 J장관 사태에서 보듯이 자신은 이타적이라며 온갖 옳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실제 행동은 사익추구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있다. 말과 행동과의 먼 거리가 위선(僞善)이다. 이들은 매사에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이중 잣대로 재단한다. 요즘말로 ‘내로남불’, 간악한 안면몰수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짐승이 갖지 못한 인간 고유의 성정(性情)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런 자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그 몰염치가 국민의 성정(性情)을 교란, 문화적 황폐화를 초래한다. 국민의 성정이 교란된 사회는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져 야만사회로 전락, 모두가 불행해지는 망조(亡兆)가 든다. 역지사지할 줄 모르는 치졸한 출세주의, 입신양명, 안락한 보신주의를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속물적 보수들의 폐해도 이들 못지않다.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로부터 ‘꼰대 만세!’ 라는 추켜올리는 비난인 동시에 깎아내리는 칭찬에 지나지 않는 비아냥거림과 비웃음을 받지 않아야한다. ‘꼰대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세대 간의 단절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다. 그것은 늙은 세대의 몫이다. 늙은 세대가 ‘노추(老醜)’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그 반대 모습, ‘아름다운 늙은이’--‘노미[老美: P시인의 新造語]’의 자세를 보이며, 자신들의 분수를 지키는 모습을 보일 때 젊은 세대들의 호감을 잃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의미로 환대의 환호성, ‘꼰대만세!’를 외칠 것이다. 자기의 분수를 지키는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보는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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