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온 글) "난 軍에서는 내 부하 목을 한 사람도 자르지 않았어요. 반드시 5분 동안 잘못을 지적하면 10분 동안은 좋은 말로 타일렀지요. 군대의 지휘관은 엄한 아버지와 형님, 인자한 어머니와 누님의 성질을 가지고 부하를 대해야 해요." 군대의 지휘관은 엄한 아버지와 형님, 인자한 어머니와 누님의 성질을 가지고 부하를 대해야 해요. 난 내가 할 수 없는 건 부하한테 시키지 않았어요. 깨끗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고 진짜 改革者(개혁자)가 될 수 있다는 原理(원리)의 표상이 韓信(한신) 장군이다. 나이는 박정희보다 다섯 살이 아래였지만 육사 2기 동기 사이다. 韓 장군은 6·25 南侵(남침)전쟁 때 가장 잘 싸운 장교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서 포항 전선에서 북한군의 南進(남진)을 저지하였다. 5·16 군사혁명엔 가담하지 않았으나 혁명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아 깡패 소탕 등 사회질서를 잡는 데 主役(주역)이 되었다. 軍에 복귀한 그는 1軍 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정신력을 강조하였으나 軍人의 정신력은 '잘 먹고 잘 자야' 생긴다고 확신하였다. 士兵(사병)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앞장섰다. 1986년 10월호 月刊朝鮮 인터뷰에서 韓信 예비역 대장은 오효진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으로 싸울 때, 안강 기계 지방에서 사흘간 포위당한 채 전투를 했거든. 옆에 있던 부대가 다 밀려나서 우리가 포위된 거요. 그때 우리 연대가 참 잘 싸웠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산다, 여기서 죽을 각오하고 싸우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여기가 최후다, 이러면서 싸워서 우리가 이겼지. 그 뒤에 옆으로 부대가 진격해 와서 포위가 풀렸어요. 하여튼 일본 學兵(학병)으로 징집되어 갈 때는 어떻게든 죽지 말자고 했지만, 6·25 때는 내가 매일 오늘 죽는다는 각오로 一日一生(일일일생)의 정신으로 싸웠소." 韓信 장군엔 청렴결백의 神話(신화)가 많다. 그는 상당 부분은 과장되었다고 말하였다. 1959년 육본 감찰감으로 있을 때의 일화. "당시 조달감실 피복 부정사건이 있었어. 그걸 철저히 조사해서 처벌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경무대 郭(곽) 비서관한테서도 잘 봐줄 수 없느냐고 전화가 오고, 국회의원들한테서도 그런 전화가 오고 그래요. 내가 절대로 안 된다니까 나중엔 국회의원 8명이 찾아와서 막 협박하다시피 하잖나 말야. 그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지금 집집마다 아들, 손자, 남편, 이런 식구를 군대에 안 보낸 가정이 없는데, 그 사람들 입힐 피복에 부정이 생겼는데, 뭘 어드렇게 봐주나. 우리 군대가 그 사람들 잘 입히면 얼마나 좋아하겠나, 그런 걸 떼어먹으면 어드렇게 되겠나, 절대로 봐줄 수 없으니, 내가 잘못 조사한 게 있으면 그걸 지적하시오', 그랬지.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참모총장한테 찾아가는 거요. 그래 내가 총장실에 뒤따라 가서 그 사람들이 앉아 있는 데서 총장한테 말했어요. '총장님, 이분들이 피복문제를 저한테 얘기했는데 그건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총장도 안된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것 좀 봐요. 그 8명 가운데 4명이 다시 내 방에 와서 '韓 장군이 그렇게 올바르게 하는데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겠소. 참 고맙습니다' 이러잖아요." 1950년대 軍에서 깨끗한 장군으로 꼽힌 분들 명단에는 朴正熙, 韓信 두 사람이 반드시 들어간다. 韓 장군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진실하고 듬직하고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분 같았지. 근데 지금도 朴 대통령에 대하여 잊혀지지 않는 게 있어. 그분은 자기 친척은 절대로 자기 옆에다 안 둡니다. 친척은 항상 먼 거리에다 둬 두고 봤어요. 내가 내무부 장관을 할 때 그분이 하루는 나를 찾아요. 그래서 가 보니까 자기 친척과 처가집 사람들 이름을 죽 대면서 이 사람들이 어디 가서 나쁜 일 안하는지 봐달라 이거야. 利權(이권)운동이라도 안하는지 그걸 조사해서 자기한테 꼭 보고해달라 이거야. 그분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했어요." 그는 1961년에 혁명정부의 내무장관으로서 겪었던 이야기도 했다. "청주엘 갔더니 市長(시장)이 '아이고 이렇게 누추한 데를 오셔서 고맙습니다' 이래. 난 그게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어. 시장이 보고를 하는데 계속 시청건물을 다시 짓는 얘기만 하고 있어. 그래 내가 그랬어. '국민들의 血稅(혈세)로 좋은 집 지을 생각 말라. 이 집이 무너져서 시민들이 제발 市廳(시청)을 다시 지으십시오 할 때까지 그대로 써라. 시청이 낡았으면 어떠냐. 나무 그늘에 멍석 깔고 일을 봐도 좋다. 국민들이 잘 살도록 하는 데만 힘써라'. 나는 거짓말 하는 걸 젤 싫어합니다. 기회를 주어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서 그만두게 했어요. 난 軍에서는 내 부하 목을 한 사람도 자르지 않았어요. 반드시 5분 동안 잘못을 지적하면 10분 동안은 좋은 말로 타일렀지요. 군대의 지휘관은 엄한 아버지와 형님, 인자한 어머니와 누님의 성질을 가지고 부하를 대해야 해요. 난 내가 할 수 없는 건 부하한테 시키지 않았어요. 상식적으로 통할 수 없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韓 信 대장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8/01 요 약 정 보 ● 한문 : 韓信 ● 생몰연대 : 1922.12.27-1996.5.6 ● 출신지역 : 함남 영흥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미 동성훈장, 중국운마(雲摩)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상 세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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