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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묵상글 (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 바닥 영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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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바닥 영성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바닥 영성
바오로의 회심은 바닥으로 엎어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 있다가 바닥으로 엎어지는 것,
높은 곳에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이것이 회심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고만장한 사람은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닥이란 실패로 치면 한두 번의 실패가 아니라 거듭된 실패요,
내려가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닥까지 내려감은 더 이상 내려갈 것은 없고,
이제 잘만 하면 올라가는 것만 남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한 곧 주저앉아버린 사람은 올라가지 않고,
빛 곧 희망을 본 사람만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빛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빛을 보기 전에 그리고 빛을 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뒤집기입니다.
주저앉은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되지만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됩니다.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지 않고 뒤집어야 하늘을 보고,
바닥에서 빛을 보게 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도 엎어지며 큰 빛을 봅니다.
아니 실은 큰 빛을 보기 전에 큰 빛에 의해 쓰러지고
그런 다음 큰 빛에 의해 일어서고 올라갈 것입니다.
여기서 큰 빛이란 하느님한테 한 대 크게 얻어맞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지금 바닥에 엎어진 것이 실은 내 실수나 인간의 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한테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임을 크게 깨닫는 겁니다.
갑자기 큰 빛을 보게 되면 일시적으로 눈이 부시고 멀게 되듯
큰 빛은 먼저 우리 눈을 멀게도 하지만 보게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빛은 세상 것을 보게 하지만
큰 빛은 세상 것을 보는 눈을 멀게 한 다음 하늘을 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순서에 따라 회개의 단계를 정리하면
-엎어져 바닥까지 내려가기
-바닥에서 뒤집기
-바닥에서 희미하게 하늘을 보기
-엎어진 것도, 눈이 먼 것도 큰 빛에 의한 것임을 크게 깨닫기(바오로 경우,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
-이제 큰 빛과 새로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땅에서 살기
이런 회개의 상태를 오늘 독서는 하나니아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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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5)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삶을 신앙생활의 원리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그분이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고, 깨우쳐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듣고 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파견한 분에 속한 이가 우리의 신원이요, 파견한 분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복음전파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입니다.” 그러니,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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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는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회심은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거침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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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남자를 키워주는 여자의 덕목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감각이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감각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예전에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감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의 장군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궁궐에서 배웠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이 잘 된다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원하지 않고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셋째는 용서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비록 상대의 실수로 다툼이 있을지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감성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부부가 같은 감성을 나눌 수 있으면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좋습니다. 배우자가 일을 통해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면 지친 어깨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더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여자를 키워주는 남자의 덕목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년 동안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의 덕목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본이지만 신앙 때문에 잘못된 것을 감추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 사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의 눈으로 기사를 검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직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신문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직원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덮어주고, 상대방의 장점은 드러내면 좋습니다. 조직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부의 원인도 있지만 내부의 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직원들이 서로 도와주고 화목하게 지내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저는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앙인의 덕목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제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십자가고 지셨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하였음을 삶으로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는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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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진실한 회심은 후회하면서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잘못을 미워하고 후회는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잘못과 실수 때문에 자책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죄인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면 그 안에는 더 이상 희망과 빛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곧 죽어버린 삶이 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영혼을 파괴하려는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주님을 만나기 전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바오로 사도는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납니다. 빛나는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깊은 암흑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시 바라봅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잘못을 깊이 뉘우칩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인자라 낙인찍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으로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어둠에 사로잡혔던 보상으로 빛을 향해 걸어 나갑니다. 이것이 참 회심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우리 역시 회심의 기회를 얻습니다. 내 모습을 바라보고 주님께 우리 모습의 부끄러움과 추악함을 고백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고 용서하는 것을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용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빛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어느 곳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것과 반대되는 빛의 길을 걸으면 됩니다.
오늘도 회심의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후회라는 바위 위에서 희망이라는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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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줄 긋기
어릴 적 옆 짝지와 티격태격하면
언제나 그어졌던 줄
책상을 정확히 가운데로 나누었던
검디검은 줄
그 줄을 넘는다 싶으면
으르렁거렸던 기억들….
왜 그랬을까요?
그럴 필요 없었는데요.
지금 그 짝지를 만나면
정말 잘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책상 위에도 그런 줄이 그어져 있을까요?
내 마음 그 줄을 넘을성싶으면
으르렁대는 그 불편한 줄 말입니다.
있다면 지워보세요.
저처럼 후회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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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말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말은 긍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7:3의 비율로 부정적인 감정어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부정적인 감정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비판은 두고두고 생각나는데, 어떤 이의 칭찬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나를 향한 화가 난 얼굴은 지워지지 않지만, 나를 향한 미소 짓는 얼굴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액수가 똑같아도 이익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우리입니다.
부정적 편향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긍정적 편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심리 법칙인 ‘4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나쁜 일 한 가지의 강한 영향력을 상쇄하려면 좋은 일 4가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와 다투었다면 다정한 대화를 네 번은 해야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이 법칙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했으면 몇 번이나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잘해야 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최하 네 번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을 갖고서 관계 회복을 아예 포기하면서 거리 두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려고 하십니다. 거리 두는 관계로는 그 사람하고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도 안 좋아집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정적 편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셔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런 체험이 바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부정적 편향에서 벗어나, 이제 긍정적 편향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나요? 주님과는 거리 두는 관계가 아니라, 친근하고 밀접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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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누군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은 없다(조지 산타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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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여정
-안으로는 회심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 -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오늘로서 1.18일부터 시작한 일치주간도 끝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서 공히 참 좋아하는 성인이 바오로 사도,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일 것입니다. 제가 프라치스코 세례명을 갖게 된 것도 예전 개종하기전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분들의 특징은 전격적 회심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중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정말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극적입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주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기다렸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당신 사람으로 점찍어 놓은 사람은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성 스테파노의 거룩한 순교 장면을 시종일관 겪었던 사울이었으며 아마 주님은 이후로도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렸던 듯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셨던 것은 바오로 사도의 한결같은 불같은 열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22장은 바오로 사도의 일장 연설중 자기의 전 회심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가 얼마나 신자들의 박해에 극성스러웠는지 바로 그때에 주님이 개입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바오로의 회심에 앞서 주님과의 극적 만남의 장면이 너무 생생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바오로 사도를 비추자 그는 바닥에 엎어졌고 이어지는 주님의 개입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이 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신바람이 납니다. 주님은 바오로가 박해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새삼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행위는 그대로 주님께 하는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후반부 최후심판(마태25,31-46) 이야기중 다음 대목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회심으로 이끈 이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을 바오로 사도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불덩이 같은 선교열정의 원동력이 되었을 체험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을 다정히 부를 때를 연상케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얼마전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을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답하던 사무엘의 모습도 연상됩니다.
당신의 때가 되자 주님은 전광석화, 일사불란하게 바오로를 사로잡으니 바오로는 완전히 주님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이미 예비한 당신의 사람 하나니아스가 주변을 대변하여 주님의 뜻을 전합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당신이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나 회심과 더불어 눈을 뜨니 이젠 예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주변은 그대로 이나 보는 내적 눈은 완전히 바뀌어졌을 사울입니다. 이제 주님의 증인으로서 새로운 선교사명이 사울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불이 되어 곳곳에 마침내 로마에까지 복음의 불을 붙이니 활활 타오르는 복음의 불은 미구에 전 유럽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오로의 눈부신 전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말그대로 오늘 다음 복음의 사명을 수행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무슨 복음입니까?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모두가 이런 주님과 일치되어 무지와 허무의 노예살이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복음 선포의 궁극 목표입니다. 생명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진리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 아닌 복음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산불처럼 번지는 복음의 불, 사랑의 불, 말씀의 불,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불이요, 지금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선교의 불, 복음의 불입니다.
주님께 만약의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바오로가 없었다면? 부질없는 질문이요 이미 주님께서 예비한 당신 복음의 일꾼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섭리의 “필연”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시 산대도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아갈 복음 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과 더불어 깊이 성찰해야 할 우리의 회심의 여정입니다. 바오로의 결정적 회심으로 회심을 끝났을까요? 분명히 확신하건데 아닐 것입니다. 순교의 그날까지 계속되었을 회심의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첫 순교자처럼 생각되는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가 떠난지도 11년째요, 그가 만들어 정자에 붙여놓은 “回心亭(회심정)” 명패는 여전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친교의 여정,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삶을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덕(聖德)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과 함께하는 선교의 여정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본질적 사명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과 회심의 “친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친교와 선교, 수렴과 확산의 리듬에 따라 날로 복음화되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열매, 회심의 열매, 친교의 열매를 세상과 나누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끝으로 우리 정주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 자체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장이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에서의 환대를 통한 섬김과 나눔의 선교, 저는 바로 이것이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라 부릅니다. 이를 요약한 고백시를 나눕니다. 회심의 친교 열매는 환대의 선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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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라, 그리고 되어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나의 벗이여
가만히 있지 말고
가라 기꺼이 가라
나의 벗이여
결코 멈추지 말고
가라 힘차게 가라
나의 벗이여
잊힌 이에게 가라
그리고 사랑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슬픈 이에게 가라
그리고 기쁨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움츠린 이에게 가라
그리고 희망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배고픈 이에게 가라
그리고 밥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어두운 이에게 가라
그리고 빛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살맛잃은 이에게 가라
그리고 소금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외로운 이에게 가라
그리고 곁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지친 이에게 가라
그리고 힘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묶인 이에게 가라
그리고 해방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쓰러진 이에게 가라
그리고 살림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가만히 있지 말고
가라 기꺼이 가라
나의 벗이여
결코 멈추지 말고
가라 힘차게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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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5.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 은사는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러한 표징과 능력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것들에 관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는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육적으로 행하였던 바를 지금도 날마다 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구마 은총으로 신자들에게 안수하고 악령이 신자들의 정신 안에 살지 못하게 할 때, 그것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어떤 신자든지 속된 옛 삶을 버리고 거룩한 신비를 말하며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권능을 거듭 찬미할 때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선한 권고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을 제거하는 사람은 ‘뱀을 집어 드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표징들은 영적이기에, 곧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고양시키는 수단이기에 더 위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원하기만 하면 이러한 표징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말씀을 선포하시오(2티모 4,2).
“만물을 이용하라”는 말의 셋째 의미는,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라, 즉 가난할 때도 부유할 때도 하느님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그분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유혹의 손길이 미치든 미치지 않든 간에, 고통을 겪든 겪지 않든 간에 그분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두 개의 물통을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가 더 무거울수록, 다른 하나는 더 가벼워질 것입니다. 포기하면 할수록, 그만큼 포기하기가 더 쉬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달걀을 버리듯이 온 땅을 쉽게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면 줄수록, 주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고통을 견디는 것도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10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애매한 본당 신부의 태도
10월 13일의 저 대이변 이후에도 그의 친구들이 겨우 설득시켜 고바 다 이리아로 데려갈 지경이었으니 그의 심중은 어떻든 간에 적어도 공중 앞에서 아직도 의혹의 껍절을 벗어 버리지는 못했다. 틀림 없이 이 신부는 리스본 대주교가 “파티마에 관한 어떠한 종교 운동에도 관여치 말라”고 교구 성직자들에게 발포(發布)한 명령을 너무 옹색하게 지킨 것이다.
그런데 직책의식이 강한 신부는 마지막 발현 이틀 후에 직책상 사건의 경위를 대주교에게 보고하였는데 그 서한에는 퍽 객관적인 태도가 나타나 있음을 엿볼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 메데스 빼로 추기경은 관헌의 박해로 그 교구에서 추방되었다. 로마 성청에서는 교구이사로 쟌 들 리마 위달 주교를 임명하였다. 새 이사는 다음날 11월 3일부 서면으로 회답하고 이 충실한 본당 신부께 발현과 기적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해서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도록 부탁했다.
본당 신부는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와 주된 목격자를 불러 진술하는 것을 기록하여 만 1년 6개월에 걸쳐 아주 신중하고 엄밀한 조사서를 작성하여 1919년 4월 28얼에 그 보고를 마쳤다.
그동안 레이리아 교구는 교회법에 준한 복구가 있었으나(1918.1.17) 1920년까지 주교 임명은 없었다.
따라서 파티마 문제는 쓸데없이 시간만 흐르게 하고 공연히 민심을 초조하게 했을 뿐이었으니, 교회 당국의 결정이 늦어지자 페레이라 신부도 오랫동안 괴로움과 불안 속에 버려져 있었고 따라서 세 아이들에게도 속히 위로를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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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