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三田渡)의 눈물 능봉수와 심즙이 적진에서 쫓겨온 뒤, 임금은 대신과 비국당상(備國堂上) 을 인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일이 여기까지 이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하고 통탄했다. 영의정 김유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일이 급하오니 화친하기를 청하는 것이 상책인 줄 아뢰오." 하고 화의를 주장했다. 임금은 한숨을 쉬고 "그럼 이번에는 좌의정이 호판 김신국(戶曹判書 金藎國)을 데리고 가오. 만일 용골대가 기어이 왕자를 보내야 된다 하거든 대군들이 지금 강화에 있으니 화친이 되는 날이면 추후로 보내겠다 대답하오." 하고 분부를 내렸다. 다음날 홍서봉과 김신국이 산성을 나서서 섬전도로 용골대를 찾으니, 용골 대는 당장 세자를 볼모로 보내지 아니하면 화친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 이하 백관들은 안색이 변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임금은 다시 대신들을 불러 세자를 적진에 보내는 가부를 결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가 감히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음, 모두들 말이 없으니 그럼 세자를 보내란 뜻이구료. 모든 사람들의 뜻 이 그러하다면 보내지." 임금의 얼굴은 흙빛과 같이 참담하였다. 밖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섰던 동양 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어전에 급히 나와 "안 됩니다. 동궁을 보내시려면 먼저 소신의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으니 만좌는 모두 얼굴빛이 푸르러졌다. 신익성의 말이 떨어지자 다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들어와 영의정 김유를 보고 "영의정이 동궁 전하를 적진으로 모시자 했다니 이런 변괴가 어디 있소. 다시는 대감과 하늘을 같이 일 수가 없구료." 하고 준절히 면박했다. 뒤미처 홍익한, 윤집(尹集), 오달제 등이 "간신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했으니 분규를 일으킨 장본인을 목베어야 하 오." 하고 연거푸 상소를 올렸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적병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부분적인 싸움이 벌 어졌다. 원두표와 이시백이 나가 싸워서 원두표는 적장 양고리(楊古利)를, 이시백 은 오상(吳祥)을 각각 죽임으로써 사기를 떨치었다. 이때부터 적은 사, 오일 동안 싸우던 군사를 내보내지 아니하고 진문을 굳 게 닫고 포위마 했다. 이제 산성에서는 사람 먹을 군량미가 떨어졌다. 적 병은 산성 안팎을 겹겹이 둘러싼 채 군사 하나 꼼짝 안하고 있다. 아무리 이쪽에서 싸움을 돋아봐도 적병은 그저 들은 척 만 척 결진만 하고 있다. 산성에선 모든 사람이 갑갑증이 나고 초조해 배길 수가 없었다. 이때 이 외로운 산성에 일루의 희망이 잠간 비치기 시작했다.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과 충청감사 정세규가 응원병을 거느리고 산성 근처까지 왔다는 소 식이 들어온 것이다. 산성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검단산(儉丹山)에서 호 병과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 싸움은 며칠이 가지 않았다. 정세규와 권정길의 군사는 청나라 군사에게 전패하여 내빼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감히 근처에 응원해 오는 군사가 없었다. 청병들은 산성에 있는 조선군이 밖으로 연락을 할까봐 목책(木柵)을 성 밖 으로 둘러치고 군데군데 쇠방울을 달아 사람이 목책을 넘기만 하면 방울소 리가 요란히 나도록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한산성은 완전히 두겹 세겹 적진 가운데 둘러싸인 외로운 성이 되고 말았다. 정축년 정월이 되면서부터는 청나라의 황제가 직접 나와서 항복하라고 독 촉했다. 최명길 등이 임금의 분부를 받아 답서를 써보냈다. 그 내용인즉 그대로 아무 조건 없이 싸우지 말고 전과 같이 형제국으로 지내자는 것이 었다. 호진(胡陣)에서는 이 국서(國書)를 받고도 한 동안 아무 기별이 없었다. 며칠 뒤 좌의정 홍서봉이 적진으로 가서 답서 재촉을 했다. 그러자 적장 용골대는 빙글빙글 웃으며 품안에서 간지 두 장을 꺼내 홍서봉에게 주었 다. "대감 그것을 읽어 보오." 홍소봉이 그것을 받아 보니 바로 봉림대군이 상감에게 올리는 친필이다. 첫대목부터 호천망극 넉자를 쓰고 강화도가 함락되어 원손(元孫)은 행방을 모르고 빈궁과 봉림, 인평 두 대군은 적군에게 볼모로 붙들려 있고, 원임 대신 김상용은 폭약으로 자진하고 원임 윤방만 살아서 역시 적군에 붙들렸 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강화 검찰사 김경징과 부사 이민구(李敏求)는 하나는 영의정 김유의 독자 요, 하나는 병조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로 모두가 권신의 자제들이다. 처음 강화도 피난이 묘당에서 논의될 때 김유는 즉석에서 자기 아들과 이 민구 두 사람을 천거하였다. 임금은 이때 "경징과 민구는 모두 백면서생으로 큰 일에 대하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다. 경의 천거를 의심치는 않으나 직책이 중한 만큼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유는 "소신이 어찌 감히 자식의 재간 유무를 모르고 국가의 중임에 천거하오리 까. 경징은 비록 미거하오나 일찍이 소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인(異 人)을 만나 도술(道術)을 배웠다 하옵기로, 이제 국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 만일의 도움이 될까 하와 추천하는 이외에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이리하여 김경징은 임금으로부터 상방보검(尙方寶劍)의 하나를 받으며 "강화도에 있는 문무백관과 수륙 제군으로 경의 명령에 복종치 않을 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 하여도 무방하니라." 하는 교서까지 배수하였다. 강화로 들어온 김경징은 앞에 큰 강이 있으니 안심된다고 하면서 대안(對 岸)의 김포와 통진(通津)의 관곡(官穀)을 가져다가 먹어대며 매일 같이 연 미정(燕尾亭) 근처에서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군관도 장교들이 무슨 긴급한 정보를 보고하거나 처분을 물어 오면 "그따위 쓸데없는 일은 그만 두고 술이나 한잔 마시라." 하고 사무는 도무지 살피지 아니했다. 이러던 중 청나라의 예친왕 다이곤(睿親王 多爾袞)의 대병은 강화도를 포 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먼저 인천(仁川), 부평(富平), 통진, 김포 등을 함몰시킨 후 한강 상하에서 선척을 압수해 가지고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깨쳐서 전선(戰船)을 노획했다. 그리고는 즉시 조수 밀리듯이 바다를 건너 기 시작했다. 김경징은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고 깔깔대면서 "저놈의 군사가 몇 만이나 되는진 몰라도 나의 호령 한마디에 바닷속 고기 밥이 될 것이니 응전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라." 이 말에 모든 장졸들은 대장의 하는 일이 매우 맹랑하고 추측키 어려웠지 만 그래도 군률을 지켜 움직이지 않고 오직 대장의 거동만을 구경하게 되 었다. 적병의 승선이 점점 육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려 김경징은 술법을 쓴다고 칼을 빼어 공중을 가리키며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장(神將)은커녕 날씨는 쾌청한 채 적병을 실은 배는 평온한 바다 를 미끄러지듯 자꾸만 육박해 왔다. 갑자기 김경징의 얼굴은 흙빛이 되는 동시에 허겁지겁 장대 아래로 내려와 바닷가에 매어 논 조그마한 어선을 잡아타고 어디로인지 도망쳐 버렸다. 강화도는 이렇게 해서 어이없이 함락이 되고 말았다. 강화에는 여자들의 피난민이 많아 적병들은 여자를 잡아 제멋대로 희롱했다. 김경징의 어머 니와 처도 적병에게 잡혔으나 그들은 비겁한 경징의 행동과는 반대로 스스 로 목숨을 끊어 여장부의 기개를 보였다. 이밖에도 조관과 부녀의 순절하 는 사람이 매일같이 속출했다. 강화도의 함락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으로 하여금 최후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외로운 성 안에서 적을 대항하던 것도 묘사를 위하여 굴치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모두가 허사가 되었다. 내 이제 누구를 위하 여 항전하며 우리의 군사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할 것이냐." 이런 비통한 하교와 함께 출성 통지의 사신을 적진에 내보냈다. 최후의 어 전회의에서 국서(國書)의 초안을 잡은 최명길은 붓을 놓고 하염없이 눈물 을 흘렸다. 옆에서 김상헌은 그 국서를 집어서 찢어버리며 "사나이가 국가 패망하는 이 마당에 한 번 목을 찔러서라도 외롭게 죽지는 못할 망정 손가락으로 이 글을 짖고 있어. 아, 해괴한지고." 일변 꾸짖고 일변 땅에 엎디어 울며 일어나지 못했다. 동양위 신익성은 칼 로 기둥을 찍으며 통곡했다. 최명길도 눈물을 흘리며 "대감! 시생은 대감의 의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올시다. 시생 역시 대감만 한 의기와 기백은 가졌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오니까." 찢어버린 종이 조각을 다시 수습하여 이어대기 시작했다. 정축년(丁丑年) 정월 삼십일, 임금은 오십명의 시위군사를 인솔하고 곤룡 포(袞龍袍)대신 남포(藍袍)를 입고 서문으로 내려섰다. 성에 가득한 신하와 백성들은 통곡하며 임금의 행차를 받들어 보낸다. 청왕(淸王) 홍타시는 삼전도(三田渡)에 진을 치고 아홉층 단을 나룻가 남 쪽에 모은 뒤에 황색 장막과 황색 일산을 꽂고 단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조선왕 인조는 진 앞 백보 밖에서 말을 내려 걸어 들어갔다. 세자궁도 말 에서 내려 부왕 뒤를 따랐다. 진앞에 이르러 용골대는 조선왕을 인도하여 단아래 자리를 펴고 북면(北 面)하여 절하기를 청한다. 인조는 잠간 주저하다가 호인의 풍습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 이것이 항복하는 식이다. 조금 있다가 용골대는 다시 임금에게 단에 오르기를 청한다. 거기에는 이 번에 출정 나온 청나라 왕자와 몽고의 왕자들이 동서 양편으로 갈라서 앉 아 있다. 임금은 동편에 서향을 하며 앉았다. 건너다보니 맞은쪽 서편 끝 자리에 강화도에서 볼모로 잡혀 온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있다. 아, 얼마 나 반가우랴. 두 대군은 눈으로 목례를 보내며 다만 소리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 다음에는 행주례(行酒禮)가 있었다. 군악소리 웅장하게 울리는 중에 임금 은 청왕에게 술을 부어 올렸다. 수치스럽기 한량없는 광경이었다. 행주례 가 끝나니 청왕 홍타시는 임금에게 수달피 웃옷 두 벌과 백마(白馬) 한 필 을 하사했다. 다 저녁 때가 되어 청왕은 임금에게 당일로 서울 환궁할 것을 허락하고 왕 세자와, 빈궁과,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눌러 진에 머물게 하니 장차 볼 모로 심양(瀋陽)까지 데리고 갈 생각인 것이다. 임금의 일행이 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니 청병의 일부대가 임금을 호위한다 고 뒤따랐다. 일행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창경궁에 다다랐다. 사십여일만 에 다시 보는 대궐! 그러나 대궐들은 이미 차디찬 재가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