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5]영화 <댓글부대>는 무엇인가?
고향집에 내려와 이 새벽 컴퓨터를 켰다. 3월 20일 <찬샘별곡 Ⅱ-56>을 쓴 게 마지막이니 꼬박 열이틀 만이다. 이 글은 용인 집에서도 별곡을 그치지 않았으니 65편이 된다. 별곡Ⅱ의 1편을 쓴 게 지난해 10월 31일이니, 5개월만에 65편, 이틀에 한번꼴인 셈이다. 지난 토요일 친구 아들의 혼사로 많은 친구를 한자리에서 만났다. 어느 친구가 “넌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 진짜 괴물같다”고 한 것은, 나의 무작정, 무대뽀 글쓰기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칭찬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할 일은 아닐 것이고, 만약 내용이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지 않으면 그뿐일 테니까 말이다.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아래의 글인 영화 <댓글부대>에 대한 나의 인상비평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아내와 모처럼 화제의 영화가 될 게 틀림없다는 <댓글부대>를 재밌게 보았다. 아니, 무서운 마음으로 보았다. 재밌는 영화와 무서운 영화는 무엇이 다른가? 왜 동시에 그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우리는 정말 재주있는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소위 SNS의 악플에 시달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 많이 보았다. 탤런트 최진실, 배우 이선균 등 열거하자면 무지기수일 것이다. 이 영화가 마침 그것을 다루었다. 악의적이고 비난 일색의 댓글을 우리는 ‘악플’이라 하고, 그 반대를 ‘선플’이라고 한다. 어느 유명인에 대하여 악플과 선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보라. 5년 전, 검사공화국이 시작되기 직전, 우리는 불길한 조짐을 보았다. 교수에서 행정가로, 이제는 정치인이 된 조국 가족을 멸문지화로 만든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에 실상과 관계없이 무작정 비난일변도로 악플을 단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물론 이런 지독한 수사에 항의하는 반대집회도 있긴 있었다.
조국은 심장에 털이 났을까? 아무래도 강심장强心臟인 모양이다. 그를 지지하는 나로서는 “장하다.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내 평생 처음으로 불굴의, 불후의 정치가 김대중 선생이 네 번이나 도전할 때에도 정당 가입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조국혁신당>에 대번에 가입했다. 지난 13일 전주 경기전 앞에 오후 3시에 온다길레 일부러 올라가 악수를 하며 “조대표님, 끝까지 해내시오잉”이라고 말했다. 인증샷도 하고 싶었으나 바쁜 양반을 놓고 욕심같아 포기했다. 아무튼, 어느 70대초 아줌마가 달려와 조국을 안으며 “살아있어줘 고맙다”며 울먹거렸다. 오죽하면 조국을 알지 못하는 김주대라는 시인도 ‘살아돌아와 고맙다’는 장시를 썼을까? 그렇다. 노무현도, 노회찬도, 박원순씨도 그렇게 죽을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분들은 유명짜하기나 했지, 이름없이 극단선택을 한 사람은 무릇 기하이던가.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27/조국曺國의 시간]조국祖國을 생각하는 시간? - Daum 카페
<댓글부대>는 어느 사람을 몰빵 비난일색으로 궁지에 모는 게 아니고, 어느 대기업의 공작工作을 비호하거나 라이벌 회사의 기술을 가짜로 만들어버리는, 여론몰이의 댓글부대를 다룬 영화이다. 마지막까지 봐도 그런 ‘댓글부대’가 있었는지, 아니면 pc천재 청소년 3인방의 장난인지도 불분명하다. 말하자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호하다. 그 가운데 열혈기자만 죽을 쑨다. 소설가 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를 원작으로 만들었다는데, 충분한 제작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가짜 뉴스’이다. 일반인이 어떻게 ‘가짜뉴스’를 판별할 수 있을까? 거기에 혹하여 무조건 욕하고, 어쩌면 레게시 언론들이 만드는 가짜뉴스 프레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 많이, 아니 질리도록 봐오지 않았던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든 얼굴에 쬐금이라도 표가 나기 마련이고, 가슴도 쬐금은 두근두근할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탐지기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들의 거짓말은 어떤 표시도 나지 않고, 기계와 기계 사이를 사정없이 춤추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들의 얼굴이나 가슴을 볼 수 없는 ‘신종 병기’나 마찬가지이다. 일일이 그 악플에 답장을 한다는 것도 말도 안된다.
완벽한 거짓은 간혹 진실을 담는다는 말도 있고, 독일 괴벨스가 “100%의 거짓말보다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가 있다”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진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거짓말은 꾸준히 만들어진다는 것. 혹자는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며 거짓말, 엄청난 거짓말 그리고 통계숫자가 그것이라고 했다. 가짜뉴스를 양산量産하여 종횡무진 날뛰는데, 어떻게 ‘팩트뉴스’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 영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한 pc천재 소년의 고백으로 반전이 되지 않던가. 오죽하면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전문적인 책이 서점에 깔려 있겠는가.
아무튼 완벽한 거짓에는 당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그 거짓에 무고한 사람이 마음앓이를 하도 죽어나가고, 전망있는 중소기업이 망하고, 대기업은 계속 흥하는 짓꺼리들이지 않겠는가. PC, 인터넷, SNS는 무섭다. AI는 누구도 못말리는 신종 병기일 것같아 두렵다. 편리를 좇다 세상이, 사람이 망하게 생겼다. <댓글부대>는 이러한 세상에 대한 지극히 ‘미미한 저항’인 듯도 하다. 일간지 기자를 하다 때려치우고 소설가로 변신한, 전직장의 후배 장강명은 만나본 적은 없으나 소식은 많이 들었다. 문학상을 다수 거머쥐었다는데,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해 미안할 뿐. 책 띠지의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합니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임실도서관에 들러 몽땅 빌려와 읽어봐야겠다. 아무래도 영양가 있는 신예작가같다. 영화평론가가 아니고 영화 문외한이기에 이 글은 영화를 보고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단상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상경하자마자 21일 아내-큰아들과 같이 본 오컬트 영화 <파묘破墓>는 관객이 왜 1천만명을 넘었는지 의아하고, 크게 느낌이 오지 않으나, 그래도 수일내 조금이라도 정리를 해볼 생각이다. 오랜만에 서울서 열흘 체류하며 영화도 두 편 보고, 만나고 싶은 분들과 생각지 못하게 좋은 분들을 또 사귀게 되어 좋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만남, 인연)> 시리즈가 몇 편 늘게 됐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