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헤밍웨이는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EU 본부에 전시되어 있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가 반란군으로 정권을 잡아서, 이후 프랑코는 긴 세월 장기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은 무기 실험장이었고, 그 무기들은 2차 대전에서 사용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대전의 전초전이었다.
히틀러의 전투기가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그 참상을 알린 것이 스페인이 조국이었던 피카소의 작품,’게르니카‘로 탄생했다.
생텍쥐페리, 조지 오웰도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종군하였다.
스페인은 1932년까지 2,400만 인구 중 0.97%의 지주가 농지의 42%, 2%가 65%를 소유했다.
1932년에 공화파에 의한 일부 농지개혁이 행해졌으나 단 90,000 헥타르, 그것도 비경작지만 분배되었을 뿐이었으며 보수 세력과 중도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페인 군부는, 공화국 정권의 군부 개혁 노력에 반발해 극우화의 길을 걸었으며 1932년에는 호세 산후르호 장군을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공화파는 위기를 맞았고 결정적으로 노선의 차이로 인해 1933년 총선에서 공화파, 급진파,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연대가 해체되자 중도(급진공화당)와 우파들은 좌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교체했다.
급진당과 CEDA의 연합정권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아사냐 정권의 각종 개혁 정책들을 후퇴시켰지만 군대를 동원해 무리하게 노조운동을 탄압하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아스투리아스 혁명).
설상가상으로 정치 스캔들이 겹치면서 지지가 바닥으로 치달았다.
레룩스를 중심으로 한 급진공화당 및 CEDA의 연립정권이 부정부패로 몰락하자 중도우파 성향이었던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는 내심 레룩스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더 이상 전망이 없는 중도우파-우파 연정을 내치고 반공산당, 반 CEDA 중도세력을 결집 시키고자 아직 의회 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우파 내각을 대통령 권한으로 강제 붕괴시킨 다음 중도파 바야다레스를 총리로 내세우면서 '코르테스'(스페인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 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총선 패배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좌파는 1936년 총선에서 우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동 단결 하기로 결정했다.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공화주의 좌파 및 디에고 바리오가 이끄는 공화주의 중도파와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과격한 사회주의 좌파가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결성했으며 이에 맞서 우파 역시 반혁명 국민전선(Frente Nacional Contrarrevolucionario)을 결성했다.
반란 이후 단 며칠 만에 국민파가 갈리시아, 카스티야이레온, 라 리오하, 나바라 등 북부 지역과 카나리아 제도와 발레아레스 제도, 스페인령 모로코를 장악한 가운데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이자 스페인군의 최정예 병력이던 프랑코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수송 지원을 얻어 본토에 상륙하면서 급속 진격하여 엑스트레마두라와 안달루시아를 장악하자 국민파가 통제하는 영토가 하나로 이어지게 되었다.
반면 공화파 군대는 혼란에 빠져서 한때 수도인 마드리드의 일부 지역까지 국민파에게 내 주었지만 소련에서 들여온 T-26, BT 전차, I-15, I-16 등의 무기와 해외에서 몰려온 국제여단의 분투로 간신히 프랑코의 진격을 막았다.
이로 인해 내전은 고착화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민파의 프랑코가 점차 내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코는 평소 상당히 굼뜨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파의 공세가 성공하였다. 그 이유는 공화파의 자폭이었다. 점점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공화파는 선전의 목적으로 공세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지면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비스탈린주의자 장병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비난하고 숙청했으며 덕분에 알아서 병력과 장비를 까먹게 되었다.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우파 정권이 독재를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