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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여기-가톨릭인터넷언론 원문보기 글쓴이: 지금여기
지금여기 인터뷰| 김정대 신부(예수회)
촛불 미사는 정의롭지 못한 삶에 투쟁하는 것이다
수도자 시국미사 이끄는 김정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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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7.28. 박오늘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 |
천박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촛불을 들다 지난 5월 2일 광우병을 우려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한 여중생의 제안으로 촉발된 촛불 집회가 석 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촛불정국과 관련하여 침묵하는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많은 신자들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촛불 정국과 관련하여 지난 6월 8일 처음으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예수회 소속 정만영 신부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 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주최의 시국미사가 있었고, 6월 22일에는 처음으로 남녀수도회와 천정연 중심의 시국미사가 봉헌된 가운데 지난 7월 26일까지 여섯 차례의 시국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불러일으킨 천주교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의 시국미사는 6월 30일 3만여 명의 신자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사제단이 철수하면서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제 수도자들의 시국미사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이 주최가 되어 시국미사를 드리게 된 계기와 배경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저와 같은 예수회 정만영 신부가 시국미사를 봉헌하는 문제를 관구장 신부한테 의논하는 메일을 보내고 제가 남자수도회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위원회 위원장이니까 저한테도 의견을 물었어요.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건지 위원회에서 해야 하는 건지 하는 어떤 절차적인 문제에 대한 것들이었는데, 정평환의 이름으로 드리는 미사는 제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니까, 그리고 마침 주일이었으니까 신부님이 주일미사를 시국미사로 드리면서 신자들을 초대하라고 했죠. 그렇게 정 신부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두 번의 미사를 드렸고 이어서 천정연의 이름으로 시국미사가 이어졌죠.
정만영 신부
그 뒤 남녀수도회에서 주관하는 시국미사를 여자는 여자수도회장상협의회 사회사목분과에서 남자는 남자수도회장상연합회 정의평화환경위원에서, 그리고 평신도와 같이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되어 평신도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회와 결합할 수 있도록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6월 22일과 28일에 두 차례 미사를 하고 6월 30일에는 사제단 미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시국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정만영 신부가 시국미사 문제를 제기하였고,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시점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게 된 거죠. 6월 30일의 사제단 미사가 기폭제가 되어 7월 초까지는 쭉 인원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본당 일을 해야 하는 신부들인지라 끊임없이 이 문제를 잡고 있을 수는 없죠. 사제단이 단식을 접는 순간 정부가 서울광장을 봉쇄하면서 (기운이) 조금 꺾였죠. 그렇다고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죠. 그러면서 저희가 4차, 5차 미사를 드렸는데 조금 김이 빠진 상태인 것만은 맞아요. 개인적으로는 저도 조금 힘들기도 하고요. 약간 회의적으로 이게 의미가 있는 건가, 의미가 있다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또한 이런 방식으로 계속 하는 게 맞는지 하는…. 그렇다면 이번 주말(7월 26일)에 천주교 시국회의에서 준비한 시국 토론회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동력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촛불미사를 통해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촛불 정국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로 촉발됐지만 단지 소고기 문제만은 아니죠. 그것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아이들이 끌어냈잖아요. ‘미친 소’ ‘미친 교육’ 하면서. 그러면서 촛불이 꺼지지 않고 점점 불어난 것 아니겠어요. 철없는 애들 그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정부가 감추고 있던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거죠. 저는 정책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지금) 정부가 만들고 추진하려고 하는데 소고기 문제만 해결되면 이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정부는) 소고기를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을뿐더러 사악하고 행동이 아주 부도덕하죠. YTN에 지난 대선 때 홍보특보였던 인물을 앉힌다든지, 낙선된 사람들은 이미 검증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공공기관이나 중요한 자리에 앉히면 안 되는 거예요. KBS 공영화하려는 움직임이라든지, 사람들이 반대를 하면 재고해 봐야 하는데, 재고의 여지가 없이 강행하는 식이죠. 그런 것들이 굉장히 천박해 보이고 부도덕해요. 나는 (지금) 정권이 조폭 같다는 생각을 해요. “국민을 접수했어!”라는 식이거든요. 이렇게 해결의 의지가 없는 부도덕함으로 아마 5년 내내 우리나라가 촛불에 휩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이야기가 한참을 건너뛰었습니다만, 그렇게 촛불 정국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5년 내내 촛불에 휩싸이다 보면 지금의 비폭력 평화적인 촛불 시위가 변질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거든요. 그렇게 정부가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우리가 인내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쎄 저는 사제단이 (지난 번 시국미사로) 새로운 역할을 했던 게 (사람들한테) 윤리성을 준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 그동안 외로우셨죠.” 이 한 마디는 그전까지 폭도로 몰렸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거든요.
폭력이라고 똑같이 폭력이라고 하면 안 돼요. 앰네스티 보고에서도 시위대가 한 폭력과 경찰이 한 폭력은 다른 차원이라고 했어요. 경찰은 공권력을 남용한 거지만 시위대는 자기방어를 위해서 결과적으로 폭력이라는 외형적인 결과가 생긴 거죠. 노골적인 폭력을 행한 사람도 있겠지만 얼마 안 되죠. 이걸 똑같이 폭력이라는 틀에 싸잡아서 말하면서 시위가 폭력적으로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독재정권에서 쓰던 방식 아닌가요?
제도가 우리를 올바른 사회로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우리 마음이 그 제도를 통해서 뭔가 좋은 세상으로 가게 하겠죠. 그런데 절차적으로 민주화된 사회 안에서도 저렇게 마음이 사악하면 아무것도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과거와는 달리 국민들이 정부 권력의 불의한 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일정하게 깨어있는 거죠. 그리고 불의하고 부정한 정부에 저항하려는 의지가 촛불을 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국민들이 깨어 있는데도 정부의 부당한 정책을 저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법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입법가들이 만드는 건데, 우리와는 전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 정권을 장악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일정하게 많은 국민과는 다른 정책이 계속 실현되면 우리는 엄청난 무력감과 좌절감을 경험하면서 더 큰 충격의 무엇을 찾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5년을 이렇게 어떻게 살겠어요.
지금 정부에서는 “이제는 경제를 살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하거든요. 마치 경제를 촛불을 든 사람들이 망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들었던 촛불을 내려놓을 수 있는 답을 주지 않는 그들이 무능한 거죠. 사악하기도 하지만 무능하기도 한 정권이에요. 석 달 가까이 무정부 상태로 방치한 거거든요. 여기에 대한 낭비는 엄청난 거예요.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여러분 외로우셨죠.” 그랬단 말이에요. 거기서 사람들 마음 깊이 파고들어간 것 같아요. 그전까지 폭도로 몰린 사람들에게 교회가 “여러분, 올바른 일 한 겁니다." 하고 이야기해 준 거였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폭도가 아닙니다." 하고 얘기해 준 거죠. 사람들이 엄청난 위로를 받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폭도라는 두려움 때문에 철저하게 비폭력, 평화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저항이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들어갔는지, 그건 약간 아쉬워요. 촛불집회의 집약되고 창조적인 힘, 그건 맞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영국 예수회원이 서강대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하고 갔는데 그이한테 제가 촛불집회에 꼭 보고 가라고 했어요. 이게 한국이라고, 한국 사람이 얼마나 창조적이냐면서. 그 사람이 “그래서 뭘 이루었어? 이룬 게 뭐야?” 하더군요. 나는 그것도 의미심장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지적한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했는데 무얼 이루었는가 하는 것, 제 자신한테도 던지는 질문이 그거예요. “그래서 뭘 이루었나?” 어떤 면에서는 좌절에 좌절을 경험하는 건데, 이렇게 해서 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비폭력, 평화 맞아요. 그런데 거기에 좀 더 큰 저항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요.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과거에 했던 저항보다 더 큰 저항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우리의 희생이 크겠죠.
김정대 신부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다양한 심포지엄과 토론회 등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촛불은 진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얼 이루었느냐에 대해선 섣불리 어떤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당장 소고기 문제만 해도 중요한 것은 그냥 넘어갔잖아요. 다른 거야 조금 더 기다리면서 계속 촛불을 들면서 대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여전히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고기가 수입되는 거고 최근에 와서는 방사선 검역을 통해서 들여오겠다고 하고.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명백하게 이룬 게 없는 거죠. 물론 촛불을 통해서 우리가 창조적인 우리의 힘을 확인한 건 맞아요. 그건 우리가 이룩한 거죠. 그런데 그것만 확인하고 말 건지, 글쎄 좀 실질적인 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렇게 소고기 문제에 걸리니까 앞으로 못 나가는 건데, 여기서 아주 여러 가지 문제가 나왔잖아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문제 등 갖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난 거죠. 우리가 정치학습을 엄청나게 한 거죠. 이명박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아, 5년이 쉽지 않겠구나 하고 예상을 했죠. 그런 시간이 된 거죠. 사실 촛불의 시작은 나였잖아요. 대의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인 데서 시작된 거죠. 그렇지만 거대한 물결을 이루면서, 광우병 소고기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결실은 없지만, 정부의 부당한 각종 정책에 대해 눈을 뜨는 일종의 진화 과정을 거치고 있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은 스스로 깨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늘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교회는 지금 이렇게 진화하는 촛불 속에서 드러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있는지요? 일전에 한 신자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자기 본당에서 촛불이 60일 이상 타오르고 있는데 본당신부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를 안했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 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는 후보를 일으켜 세워서 소개를 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지지를 했으면서 말입니다. 울먹거리면서 분개를 하더라구요. 모든 본당신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무 실망스럽다는 거죠. 제가 볼 때는 일부 사람들이 깨어있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가 왜곡된 언론으로 조중동을 말하지만 교회 언론이라고 하는 가톨릭 신문과 평화신문에는 촛불정국에 대한 기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허하죠. 사회문제를 같이 이야기해야죠. 복음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게. 가까이 지내는 노동운동 활동가 한 분이 오십이 넘어 세례를 받았어요. 작년에 세례를 받고 올 부활절 즈음해서 교회 못 다니겠다고 하더군요. 신부님이 강론 때마다 “사랑하십시오.” 하는데 처음에는 동의를 했으나, 매번 그 소리 그 틀을 벗어나지 않고 그러는데 공허하더래요. 어떠한 상황에서, 왜,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거예요. 너무 공허한 거죠. 사랑 못하는 우리는 뭐냐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성당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무슨 말을 못 해줬어요.
정의롭지 않은 신앙은 공허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촛불 정국 안에서 우리 삶을 신앙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나요? 사실은 정의 문제 아니겠어요. 소고기 문제도 이기적으로 좋은 것 잘 먹고 잘 살자 이게 아니고 정의 문제예요.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 국민의 자존심과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오로지 경제적인 효율성만을 위해서 협상에 사인을 한 거잖아요. 이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더욱더 많은 부를 창출한다고 하더라도 이게 가난한 사람들한테 가는 구조가 아니잖아요. 부익부 빈익빈 사회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그런 맥락에서 소고기 수입문제가 불거진 까닭에 정의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가장 큰 피해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죠.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당신 개인의 죄만 열심히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러면, 글쎄 우리가 정말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정의롭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어요. 정의가 있어야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경쟁이 치열한 이 사회에서 사랑하십시오, 이 말이 얼마나 공허한가요?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적인데, 경쟁상대자인데, 밟고 넘어가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딴 데서 몰래 시험지 답안을 미리 받아다가 보면서 적는 건데, 그러면서 내가 그 사람보다 먼저 올라가야 되는데, 여기서 무슨 사랑을 실천해요. 잘못된 거죠. 통합된, 삶과 신앙이 통합된 상태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상태에서 교회 안에서 열심히 사랑합니다, 이것밖에 더 되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반드시 이야기해 줘야 해요. 말도 안 되는 구조 안에서 사는 거잖아요. 교회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교회가 세속주의에 빠져서 세상의 흐름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요. 세상의 흐름을 신봉하면서 교회가 (따라)가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사회 구조와 문화가 반복음적인데도 그걸 복음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신자가 몇 명 늘었는지로 복음화를 측정하니까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가난을 잊어버린 거 아닌가 싶어요. 가난에 대해서 너무 이야기를 안 해요. 가난을 구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소박한 삶에서 벗어난 것 같기도 하고. (6월 30일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할 때, 사제들이 제단을 향해 입장할 때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아니었어요. 이 사람들이 “신부님, 사랑합니다.” 그랬거든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할 때 빨마가지 들고 환영했다는 장면이 연상이 되었어요. 정의에 대한 어떤 굶주림이 있었던 거죠. 그 사람들이 천주교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우리 (교회)는 정의를 중요시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죠. 촛불 정국에 침묵하는 교회 언론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왜곡된 언론을 조장하는 조중동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엄중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줄의 촛불기사도 싣지 않는 교회 언론에 대해선 왜 아무도 항의를 하지 않는지 참으로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조중동에 그렇게 분노하면서 정작 시대의 징표를 읽고 깨어있어야 하는 교회 신문의 침묵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요? 요즘은 광고주 압박도 하고 불매운동도 하는데 말입니다. 교회도 체질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세상과 더욱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특히 정의문제에 더욱더 많은 개입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더욱더 많이 헤아려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그런 데 관심이 없는 교회라고 한다면 돈을 주면 안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조중동 불매운동도 하는 판인데, 교회 신문도 그럴 것 같아요. 구독을 안 해야죠.
촛불미사는 정의롭지 못한 삶에 대한 투쟁이다 교회는 아마도 이런 것을 정치 참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언론, 정확히 말해서 교계언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지금여기>에 김유철 선생이 '미디어 흘겨보기'라는 코너에서 줄곧 비판해 왔지만 교계언론이 이런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톨릭인터넷언론-지금여기>에서라도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른 언론과 교회 지도층은 우리들의 활동을 보고 자꾸 정치 참여라고 말하죠. 그렇지만 저는 정치활동을 하는 게 아닙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 문제가 아닌 겁니다. 이건 정치투쟁이 아니고 삶에 대한 투쟁이에요 내 삶의 자리가 정의롭지 못한 정책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예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 내 삶을 위해, 그리고 그게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삶의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다. 정치참여라고 자꾸 말하는데, 그리고 또 하나 정치와 삶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어요? 저는 정치활동을 한 게 아니고 삶의 활동을 한 거예요. 올바로 정책을 못 만들면 내 삶이 깨지기 때문에 정책을 올바로 펴라고 저항을 하는 거예요. 오히려 이것을 정치활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더 정치적이지요. 촛불을 든 사람들은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시국미사를 봉헌한 사제단의 조연 역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그 이야기 한 것은 사람들이 사제단만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사제단이 끌고 가는 것은 옳지 않아요. 사제단은 충분히 그 몫을 했잖아요. 나머지는 우리 사회가 알아서 해야 될 문제에요. 이게 무너졌을 때 사제단이 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조연 역할이라고 한 거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거는 “정의롭지 못한 구조에서 여러분들이 저항한 것은 옳았습니다.” 하고 짚어준 걸로 충분하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더 기대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직엔 한계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가 볼 때 어느 신부도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없어요. 사제단이 그렇게 나선 거는 자기 주변에 고통 받는 사람, 올바른 사람이 폭도로 몰리고 그런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그것을 올바로 짚기 위해서 나온 거죠. 굉장히 용감한 거죠. 어쨌든 사제단은 철수했고 수도자들의 시국미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국 토론회를 기점으로 해서 한 발 더욱 진화된 어떤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는 앞이 안 보이고 동력도 떨어지는 것 같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이걸 매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계속 하는 것에 대해서 (관계자들과) 이야기 좀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매주 하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한다면 매달 좀 더 다른 주제를 가지고 세상을 배우는 그런 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계속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사실 여기서도 저는 제 역할밖에 못하는 거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는 아니고. 우리 상황과 현실을 보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봐야 하는데, 요즘 미사 나오는 이가 100명에서 150명이에요. 그런 면에서 사제단은 대단해요. 사람들이 기대를 하고 당기는 힘도 있죠. 실제로 큰 역할을 하기도 했죠. 그러면 우리 수도자들 시국미사는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징검다리라고 생각해요. 큰 목적지를 향해서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 그게 우리 몫이라면 기꺼이 해야죠. 사실 미사를 조직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저 혼자 계속하는 것도,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뻔하잖아요. 새로운 사람들이 오기를 기대하는데 이게 힘들어요. 서운한 거는 남자수도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참여를 안 해요. 그게 안타깝더라구요. 앞에서 교회 이야기하면서 마치 무풍지대의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을 이야기했는데 우리 수도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런 면이 안타까워요. 6주째 하고 있는데 좀 지쳐요. 그리고 또 그 일 외에 다른 일이 몇 가지 있어요. 기륭전자 노동자들 일도 있고, 밤에는 이곳(삶이 보이는 창)을 지켜야 하니까 지치더라구요. 함께하는 사람이 많으면 저도 신이 날 텐데, 함께하는 사람이 적으니까 저도 위축됩니다.
정일우 신부(예수회) 우리 삶을 떠받쳐 주는 미사 그렇게 힘들 때 신앙에서나 삶에서 모델이 되는 스승은 누군가요? 예수회 안에서는 정일우 신부님, 신부님이 저한테 가르쳐주신 게 뭐냐면 “세상을 위에서 보지 말고 밑에서 보라.” 하셨어요. 그러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볼 수 있을 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신부님은 늘 현장에 계셨어요. 저도 현장에 있는, 현장에 가까이 가는 삶을 사는 건데, 신부님한테 배운 거죠. 그리고 문정현 신부님, 굉장히 힘 빠지는 일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오래 할 수 있을까 싶어요. 며칠 전에 가라지의 비유 복음을 읽으면서 문정현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확 뽑아버리면 끝났을 텐데 안 뽑고 끊임없이 싸우면서 아직까지 현장에 계시잖아요. 속이 시꺼멓게 타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맑게 현장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존경스러워요. 오늘의 교회, 오늘의 신앙인들의 삶, 지금 이 촛불정국과 관련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한 건데 좀 더 정의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디 가서 강론을 하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데, 가난과 정의와 관련해서 그러는가, 가난한 사람 처지에서 이야기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개인차원의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정말 개인의 행복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 공동체가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신앙 안에서 찾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가족, 나만 따지면 소통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다른 데 관심 가질 수도 없거든요. 그리스도교는 공동체의 종교잖아요. 연대성을 버리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죠. 이 맥락에서 우리가 공동체성을 확보하면 교회의 세속화 물질화도 줄어들겠죠. 서로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까. 사실 있어야 나누는 거 아니잖아요.
성체성사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부서져 나뉘는 삶, 그게 전례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삶 안에서도 성체성사를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미사가 우리의 삶을 좀 떠받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 삶이 미사를 떠받치는 이상한 꼴이 아니라. 미사를 통해서 우리 삶이 창조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나눔도 창조적으로 되고. 지금까지 살았던 방식과 다르게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관심도, 기도에 대한 주제도 단지 나와 내 가족을 넘어서 우리와 우리 문화에 대한 불합리한 측면을 성찰하고 기도하고 바꾸고자 노력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데, 죄인 맞는데,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이에요, 사실. 그걸 마치 저주받은 죄인인 것처럼, 그래서 저주받지 않으려고 미사를 떠받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미사를 통해서 우리 삶이 떠받쳐지는, 그런 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지금까지 바라봤던 방식에서 많이 바뀌어야겠죠. 그런 게 부활 아니겠어요. 지금까지 바라보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보고, 하느님을 보고, 나를 본다면 그게 부활이죠, 사실은. 촛불집회 촛불정국에서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의 성찰과 신앙이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여러 문제를 짚어봤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정의 실현 문제, 우리 사회구조를 정의롭게 하는 문제를 강조하셨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을 믿으며 계속해서 이어질 수도자들의 시국미사를 기대합니다.
박오늘/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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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7.28. 박오늘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