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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우리는 얼마나 나를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자인지, 귀신이 우리에게 항복한 것으로 얼마나 많이 기뻐하였는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 10:20).
나야말로 툭하면 내가 행한 일로 나를 자랑하고 내 이름을 드러내고자 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낸 일이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신문 1면 톱기사로 내보냈을 겁니다.
나에게는 이런 나의 의 곧 자기주장의지로 가득한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 중 하나인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나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 옛 사람 곧 나의 옛 자아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로 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습니다(갈 5:24).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욜 1:1-12
제목 : 귀를 기울여 들어라, 울어라, 부끄러워하며 슬퍼하라.
1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0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 나의 묵상
본서를 기록한 저자 요엘의 이름은 요(여호와) 엘(하나님)으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요엘은 주전 9세기에 남유다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이다.
당시는 유다 8대 왕인 요아스가 통치하던 시대로 특히 남유다 전역에 닥친 대재앙이었던 메뚜기 재앙을 배경으로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을 강력하게 전파하였다.
요아스가 유다 왕위에 오르기 전 유다의 정치적 상황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북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과 친분이 두터웠던 남유다 4대 왕 여호사밧은 자신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난 딸 아달랴를 결혼시켜 혼인 동맹을 맺었다(왕하 8:16-18).
여호사밧을 이어 남유다의 왕이 된 여호람의 왕비 아달랴는 그의 친정 모친 이세벨의 종교적 성향을 그대로 답습한 아주 불경스럽고 사악한 여인이었다.
결국 아달랴는 그의 모친이 했던 것처럼 남유다를 우상 숭배로 오염시켰다.
이 아달랴와 여호람 사이에서 아하시야가 태어났고 그가 여호람을 이어 남유다의 6대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 역시 북이스라엘의 왕가와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자주 방문하였다.
그가 북이스라엘을 방문하였을 때 예후가 북이스라엘 왕 요람을 살해하였고, 이를 본 아하시야가 도망하다가 그 역시 예후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왕하 9:27).
아하시야가 왕국 밖에서 죽자 태후인 아달랴는 남유다의 정권을 잡고자 자신의 손자들인 아하시야의 아들들 곧 다윗 가문의 왕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 와중에 아하시야의 누이동생이자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세바가 그의 남편인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갓난아기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한다.
그렇게 구출한 요아스를 성전 안에서 6년 동안 숨겨서 키운다.
한편 자신의 손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아달랴는 남유다를 통치하지만, 다윗 가문에서 유다의 왕위가 계속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한 자이기에 그는 결국 7년 만에 죽어 그 정권이 끝장나고 만다.
이런 혼란한 정세 속에서 남유다의 8대 왕으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정권 초기에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에 대한 의존도가 컸으므로 그의 도움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등 신앙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바른 통치를 하였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과거에 걸어왔던 신앙의 길을 버리고 여호와를 떠날뿐 아니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을 떠난 요아스를 꾸짖자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이는 극악한 일까지 자행하였다(대하 24:15-22; 눅 11:51).
본서를 기록한 요엘은 이와 같이 혼란한 정세에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은 선지자였다.
당시 남유다 사회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메뚜기 떼의 공격으로 전국이 고통을 당하였고 심지어 성전에 포도주를 따라 드리는 전제조차 행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궁핍을 겪었다(욜 1:13).
요엘은 그와 같은 엄청난 재앙을 목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 안에 속한 신정 왕국에 어찌하여 그토록 참혹한 일이 발생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악이 그 원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요엘은 백성들을 향하여 마음을 찢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욜 2:12-14).
요엘 선지자는 이 재앙이 아달랴를 주축으로 행해졌던 바알 숭배를 비롯한 백성들의 죄악의 결과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훗날 전무후무하게 닥칠 무서운 여호와의 날의 전조가 되는 사건인 것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요엘은 본서에 ‘여호와의 날’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이다(1:15, 2:1, 2:31, 3:14).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은 악한 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진멸을 초래하는 재앙의 날이 될 것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1-4절, 본서는 브두엘의 아들 요엘이 말한 것 곧 사람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적 권위를 지닌 예언임을 분명히 밝힌다.
2절, 늙은 자들아로 번역된 히브리어 ‘핫제케님’은 나이가 연로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종교적 대표로서 제사장들이 언급된 것을 보면, 그에 반하여 사회적 대표로서 장로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2-3절을 깊이 상고해 보면, 요엘의 질문에서 연로한 이들에게 질문하는 내용과 당부하는 내용을 통해서 직분상 장로라기보다는 삶의 연륜이 녹아 있는 연로한 분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2절에서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 곧 메뚜기 재앙이 있었느냐’고 묻는 물음과 3절에서는 너희 자녀들과 자녀의 자녀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까지 말하여 가르치라고 당부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4절,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은 메뚜기 재앙의 실체를 섬뜩하리 만치 상세하게 묘사한다.
네 종류의 메뚜기가 당시 유다의 농토를 황폐시켰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 종류의 다른 메뚜기가 각각 존재한다기보다 그 어떠한 농작물도 이들의 습격에 남아날 리 없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긴 것을 먹고’, 이를 네 번씩이나 반복한 것은 가공한 파괴력을 지닌 메뚜기 떼의 습격이 당시 남유다 주민들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주었을지는 불을 보듯 훤하다.
메뚜기 하면 우리는 어렸을 적 논밭이 있는 시골에서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는 감성어린 추억만 있을 뿐 이처럼 가공할만한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불과 2-3년 전만 해도 중동지방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나라들인데 메뚜기 떼가 나타나 온 들판을 초토화시킨 일들이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결코 성경 속에서만 나오는 하나의 전설처럼 들려지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 시대에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그 이후에 요엘 선지자 시대에도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 종류의 메뚜기가 등장한 것은 네 개의 존재가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등 이스라엘 민족에 크나큰 위협과 재난을 초래한 제국들을 지칭하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서에 등장하는 메뚜기 재앙은 결코 단순히 상징하는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메뚜기 재앙에 대한 본서의 묘사가 매우 생생할 뿐 아니라 후에 아모스 선지자 역시 과거 유다에 있었던 일로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암 4:9).
5-12절, 선민의 각 계층을 향하여 애곡할 것을 권유하며 메뚜기 재앙의 대참상에 대한 묘사이다.
6-7절, 술취한 자들을 향한 애곡을 권유하며 메뚜기 떼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술을 마시고 취하는 자들이나 달큰한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은 울 것이다.
왜냐하면 달고 맛있는 포도주가 끊어져서 너희 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포도주를 끊은 것은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기 때문인데, 그 다른 한 민족은 현실적으로는 가공할 만한 메뚜기 떼의 습격이지만, 후에 있을 바벨론의 공격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다.
그들이 우리의 포도나무를 멸하였고 무화과나무를 긁어서 껍질을 하얗게 다 벗겨버렸다.
8-10절, 선민의 일반 대중을 향한 애곡을 권유하며 그들이 당하는 참상을 묘사한다.
약혼자를 잃은 젊은 처녀가 굵은 베옷을 입고 울듯이 애곡할 것이다.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다 끊어졌으니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슬퍼한다.
밭이 황폐해지고 땅이 메말랐기에 곡식이 다 죽고 포도주가 없어졌으며 기름도 다 떨어졌다.
11-12절, 농부들을 향한 애곡 권유와 그들이 당하는 참상을 묘사하고 있다.
농부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도 애곡할 것이다.
왜냐하면 밀과 보리 때문인데 밭의 소산이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도 마르고 무화과나무도 죽어간다.
석류나무와 종려나무 그리고 사과나무를 비롯한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어 버렸다.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는 농경사회였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에 정착하고 산 지 어언 600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당시는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들은 4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였고 그 전에는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는데 이들은 자기들 스스로 농사를 짓고 거기서 얻는 농작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뿐 아니라 가나안을 대표하는 두 신, 곧 바알과 아세라가 그들의 농사를 풍요롭게 하고 온갖 삶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에 반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 삼고 시내산언약 모압언약 그리고 세겜언약으로 갱신하시면서 언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이들은 그 언약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현실에 모든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음란하게 섬긴 것이다.
그것이 아달랴를 지나 요아스 왕 때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임한다.
그 공의는 다름 아니라 메뚜기 재앙이라는 심판으로 나타난다.
그 심판을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로 깨닫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한다.
하지만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제대로 회개하는 이들이 없다.
귀를 기울여라, 깨어 울어라, 애곡하라, 부끄러워하며 슬퍼하라고 귀가 닳도록 외치고 또 외쳤건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바로 요엘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남유다 백성들 안에 내가 있음을 본다.
요엘을 통하여 여호와의 날이라는 대재앙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지금 나를 향한 최종적인 심판의 예고를 하신다.
메뚜기 재앙은 가장 가깝게는 200년 후에 있을 바벨론의 침략을 통한 재앙을 뜻한다.
그런데 이를 넘어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큰 성 바벨론이 음행과 진노의 포도주로 온 땅을 넘어뜨릴 것이다.
그 재앙 안에 오늘 본문의 메뚜기 재앙도 함께 들어 있다.
나 역시 그 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지고 무너진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주님을 거역하는 악행이 된다.
하지만 그런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언약 때문이다.
나는 창세전 언약을 믿는다.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되어지는 인생이며 그 인생은 또한 영생으로 귀결될 것임을 믿는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현재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를 누리기 위하여 내 안에 가득 채워진 큰 성 바벨론의 음행과 진노의 포도주를 주의 십자가로 못 박는다.
그리하여 나의 심령이 새 영과 새 마음으로 충만해져서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생각과 뜻대로 예수를 믿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밟고 떡하니 서 있는 바알과 아세라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다 떨어지는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안에 내가 있음을 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를 욕하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인데 말입니다.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시되 아주 진멸하지 않으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오셔서 그 말씀을 내게 주시고 날마다 먹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으니 오늘도 그 양식을 먹고 주님과 함께 연합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구원의 영원한 근거가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