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열제야. 중국 당나라 때,
비단길을 정복하고 서역으로 원정을 가서 단 몇 만의 군사로,
여러 나라를 정복한 장군이 누군지 아니?”
“키힝~ 푸륵~.”
현이 열제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묻자, 열제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이계에 도착한지 2시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나오는 것은 울창한 숲과 가끔 나오는 갈래길.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심지어 동물들도 보이질 않았다.
그나마 산새들만이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로 존재를 알려올 뿐.
“키힝힝!”
“오! 칸! 맞았어! ‘고선지 장군’이야.”
현이 손뼉을 ‘짝!’ 치며, 생긋 웃었다.
잠시 그대로 생글거리던 현은, 곧 시무룩해지며 한숨을 푹 쉬었다.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출신의 당나라 장수야.
그는 언제나 고구려인이라고 당나라 인들에게 무시당했지.
그러면서도 고선지는 무역로인 비단길을 정복하고,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무너뜨리는 큰 공을 세웠어.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존경과 찬사가 아니라, 모함과 비참한 죽음이었지.”
현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가끔 그가 꼭 그렇게 살다 죽어야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
바로 옆엔 고구려를 이은 발해도 있었고, 고구려 유민이 주를 이룬 유목민족들도 있었고,
고려를 세우려는 왕건도 있었는데. 그리고...”
“키히잉~.”
“..이정기 장군도 있었는데. 중국 땅 한가운데에 고구려를 다시세운....”
현은 고개를 열제에게 내리고 다시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누군가는 고선지가 당에게 충성한 배신자라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봐.
단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고구려의 이름을 높였다고 생각해.
‘나는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후예다. 너희와는 전혀 다른, 같은 자리에 서있어도 너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다.’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현은 잠시 침묵으로서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되새겨 보았다.
‘그래.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후예.’
그 한마디에 가슴이 설레고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뜨거워지며,
가슴이 무척이나 뿌듯해 왔다.
현은 그런 자신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피식 웃었다.
마치 할아버지에게 옛날얘기를 듣고는,
이야기 속 영웅을 동경하며 떠올릴 때마다 흥분해버리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 했다. 충분히 부러움을 살만한 핏줄이다.
“칫, 이제 이러고 노는 것도 지겹다. 그렇지?
이 길은 비단길만큼이나 긴 걸까? 지루하게...”
칸과 열제는 그냥 ‘푸르륵!’으로 대답할 뿐.
현은 무료함에 하품을 하고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던 중,
무언가를 보고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 저건...”
현이 발견한 것은 자신이 이동해 온 길과 같은 방향에서 뻗어와 합쳐진 또 다른 길이었다.
현이 이동해온 길과 그 길 사이엔 꽤 넓은 숲이 있어서 건너편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현은 자신의 길과 합쳐진 길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 있는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여러 개의 말발굽, 평행하게 그어진 두개의 직선?’
“마차와 호위 병력이로군.”
현은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그 흔적은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따라 쭉 나있었다.
‘대충 보면 발견하지 못할 만큼 모래가 뒤섞인걸 보면...’
“흐음.”
바람은 현의 정면에서 뒤쪽으로 미약하게 불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일정한 세기로 불고 있었으니,
계속 불어온 바람에 흔적이 점점 모래에 덮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된 흔적인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길로 누군가 간 것을 보면,
특정한 장소나 마을이 근처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런 행렬이 돌아다니진 않을 테니까.
현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어 들었다.
“이 길도 정확히 동쪽인 건가.”
현은 도착한 이후로 무작정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버지께 받아놓은 지도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현대식의 지도가 아니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연상시키는 조잡한 지도였다.
게다가 꽤 큰 지도여서, 수첩 만하게 접어서 보며 돌아다녀보았지만,
영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지금은 아예 짐 속에 넣어 버린 지 오래였다.
“흠, 그럼 이 행렬을 따라잡아보도록 하지. 열제, 칸, 오랜만에 한번 달려볼까?”
“끼힝힝힝~!!”
현이 씩 웃으며 묻자 열제와 칸도 좋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하아!!”
현이 등자를 힘차게 굴렀다.
푸른색의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는 하나의 인형(人形)이 드러났다.
그 인형은 서서히 뚜렷해지더니, 한명의 여성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아,
땅을 사뿐히 딛고 섰다.
푸르게 빛나던 문은 빛이 사그라지더니, 문의 모습도 곧 사라져버렸다.
그 문에서 나온 여성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눈을 떴다.
눈부신 금발머리에 푸른 눈, 적당히 높은 코, 엷은 분홍빛이 감도는 도톰한 입술.
갸름한 턱. 마치 꿈에나 나올 것 같은 미모의 여성이었다.
키도 커서, 그녀의 앞에 서있는 제법 탄탄해 보이는 체격을 가진 중년의 남자를
살짝 내려다 볼 정도였다.
잠시간의 짧은 침묵을 깨고,
맨 앞의 중년의 남자를 시작으로 뒤에 도열한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중년 남자의 입에서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뵙게 되어 영광 이옵니다, 여왕님.”
‘다렌느 르끌레프 호네야크(Tarrenn Leclev Jonellak)’여왕.
서 대륙 서열 6위인 호네야크 왕국의 17대 여왕.
전통적으로 여자가 왕위를 계승했던 호네야크 왕국의,
새로운 여왕이 나타나는 순간인 것이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싱긋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
그들의 인사에 간단하게 답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다렌느입니다.”
“그럼 여왕폐하를 왕궁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차에..”
[두두두두두두---.]
다렌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한 말발굽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말발굽소리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때서야 기사들과 중년남자가 알아챘는지,
황급히 일어서며 다렌느가 바라보는 곳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또 오기로 한 기사들이 있느냐?”
중년남자가 황급히 뒤쪽의 기사들에게 물어보자,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위에 올라타다 말고 중년남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닙니다! 저희들 외엔 오기로 한 기사들이 없습니다! 1분대 앞으로 정렬! 경계하라!”
“기마가 보입니다!”
앞에 횡으로 정렬한 기사들 중 가장 눈이 좋은 기사가,
뿌옇게 일어나는 흙먼지와 기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제길, 노켈 왕국의 병력들인가? 수는?”
가장 계급이 높은 기사가 탄식하고는 대략적인 수를 물었다.
예의 그 기사가 눈을 잔뜩 찌푸려 안압을 높였다.
뿌연 먼지를 배경으로 말 두 마리가 굉장히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마는.. 둘! 단 둘입니다!”
“...뭐?”
“뭐? 단 둘이라고?”
지휘자가 당황하는 사이 중년남성이 반문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제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정말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기마는 단 둘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 다음 계급인 듯한 기사한명이 지휘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휘자는 잠시 멀리 달려오는 기마를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켈 녀석들의 계략일수도 있다. 일단 마차를 둘러싸서 경계태세를 취한다.”
“그 다음은요?”
“일단은 두고 본다.”
중년남성은 기사들이 대화하는 사이 다렌느에게 다가가 말했다.
“지금 미확인 기마가 접근중입니다. 마차 안에 계시면 안전할 것입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러죠.”
다렌느는 여전히 기마가 달려오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저건?”
현은 순간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분명 차원의 문이었다. 자신이 통과한 차원의 문과는 색이 약간 달랐지만,
틀림없이 차원의 문이었다. 차원의 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안에서 나온 여자에게,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과 화려한 옷을 걸친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열제야 칸아, 좀더 빨리 달리자!”
“끼힝힝힝~!!”
현은 뭐가 불안했다.
자신 말고도 누군가 차원이동을 해서 이곳에 오다니.
그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수도 있었다.
“멈춰라!”
지휘관은 맨 앞에 나와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기마는 못들은 척 계속 다가왔다.
“내말이 들리지 않는가! 멈춰라!”
그러자 잠시 후 천천히 기마가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
서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오자,
모두는 낯선 모습의 기마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 너는 누구냐?”
[따각 따각 따각.]
그 기마는 천천히 말을 몰아 지휘간의 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 기마는 신기하게도 처음 보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갑옷의 형식과 투구의 모양, 복장의 색감 등, 전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더욱 놀란 것은,
두 마리의 말에게 상당히 견고해 보이는 갑옷이 둘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어디하나 쉽게 찌를만한 곳도 없을 뿐더러,
갑옷의 형식도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그들이 보아온 한, 이런 갑옷의 형식은,
서방측에선 굉장히 보기 힘든 것이었으며,
말에게 갑옷을 입히는 나라도 극소수라는 것이었다.
“흐음?”
지휘자는 그자의 말을 유심히 보았다.
말은 의외로 작은 크기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망아지만한 크기여서,
지휘자가 바로 앞에 서있는 그 기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휘자와 기사들의 말은 키가 2m를 넘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헌데 이만한 말이 갑옷을 두르고, 각종 병장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갑옷으로 중무장한 사내를 얹고 굉장한 속도로 내달려왔는데,
“전혀 지친 기색이 없군?”
두 마리의 말은 숨을 거칠게 쉬지도, 땀을 흘리지도 않는 듯 보였다.
두 마리의 말 중 한 마리는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갑옷이었지만,
상당한량의 짐을 지고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처음 보는 무기들과,
사내를 태우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상당히 신기한 자였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dp? anjfkrh?"
“?!”
기사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기사들은 문과 무를 함께 익힌 자들이어서,
대륙 공용어는 물론, 근처의 웬만한 국가의 언어는 통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처음 듣는 억양과 언어를 앞에 있는 한 남자가 구사하고 있었다.
“갈수록 놀라운 사내로 구만.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부관은 못 알아들을 걸 뻔히 알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상대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음?”
그들은 갑자기 그 남자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자 바짝 긴장했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마법 스크롤!”
“이봐 무슨 짓이야!”
어쩌면 그것은 이들을 한번에 날려버릴 마법이 걸린 스크롤일지도 몰랐다.
가끔 동남쪽의 사막에 있는 국가들이, 게릴라전을 펼칠 때 그런 전술을 구사한 적이 있다고
견습기사시절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제길! 설마...’
그들이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스크롤을 펼쳐 찢어버렸다.
[찌이익!]
짧은 소음이 들리고 나서, 그의 주위에 마법진이 밝은 빛을 발하며 펼쳐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읏!”
모두들 이를 악물고는 몸을 움츠렸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일이 없자, 기사들이 하나둘 눈을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역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 지휘관도 뻘쭘한 표정으로 뒤의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앞에 서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잔뜩 민망해하는 기사들의 행동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흠흠. 이제는 제 말 알아들을 수 있으십니까?”
“아! 통역마법!”
기사들은 그제 서야 스크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의해 상당히 긴장해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의 나라는 현재 전쟁 중이었고,
지금은 새로운 여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낯선 이의 갑작스런 출현이 겹친 상황이었다.
“아, 이제 통역이 되는군요.”
그가 투구의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 누구야? 어디서 온 작자야?!”
뒤쪽에서 들려온 윽박질에 모두들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선 중년남자가 마차에서 내려와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람을 놀라게 해도 정도가 있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게 무슨 짓이야?”
중년남자의 큰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자네 여긴 어떻게 왔어? 이곳은 어제부터 통행 금지된 길이라고!
그리고 그 투구 당장 벗지 못하겠나? 당장 투구 벗고 내려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의 노발대발한 중년사내는 잠시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 지었고, 기사들은 중년남자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으며,
지휘관과 부관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보시오, 루카인 섭정. 이자가 뭘 알겠소? 흥분 좀 가라앉히고 천천히 좀 말하시오.”
지휘관이 결국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하지만 루카인이라 불린 중년의 남자는 화를 가라앉힐 줄 몰랐다.
“네 이노옴-! 뒤에 계신분이 누구신지나 아느냐! 지금 이곳에 모인 기사들과,
앞에 계신 왕실근위기사단장님 만해도 네놈은 땅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거, 참. 이자가 우릴 어찌 알겠소?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마시오.
민망하시면 그냥 마차 안에 계시지 뭣 하러 나오셨소?”
그의 말에 루카인이 속을 들킨 듯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주위의 기사들도 고개를 돌리고는 킥킥 웃었다.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 길래 그러시는지?”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모아졌다.
“음!”
왕실근위기사단장 벨하이드 펠로키루치(Welhide Vellokiruchi)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투구를 살짝 들어 그늘로부터 얼굴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놓고 있었다.
‘검은 눈, 검은머리, 연갈색 피부색?’
물론 사막에 사는 이들 중에도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가졌지만,
피부색이 전혀 달랐다. 게다가 언어와 복장도 완전히 달랐다.
“호, 혹시 마족?!”
누군가가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의 말에 모두들 삽시간에 경계하는 눈빛들로 변했다.
그들에게 검은머리와 검은 눈, 다른 피부색은, 전혀 좋은 상징물이 아니었다.
지금 그들의 왕국과 전쟁 중인 국가들 중 사막국가들도 있었고,
마족도 이러한 외모를 가진 자가 태반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3제국 시절,
동쪽에서 몰려온 의문의 군대가 이와 같은 외모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서쪽 대륙을 호령하던 3제국을 무너뜨리고,
어느 날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역사가 기록되고 난 후부터는 서쪽대륙인들의 머릿속엔,
그 모습 자체가 공포로 새겨졌다.
“당신 정말 누구요?”
이젠 벨하이드도 질문에 확실한 필요성을 느꼈는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해서 바뀌는 그들의 반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사내는,
그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객.”
그 대답을 들은 이들은 약간 허탈해하는 표정들이었다.
등장과 함께 몰아온 신기한 상황치고는 지극히 평범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겁니까?”
옆의 부관이 웃으며 말하고 나섰지만, 억지로 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사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변화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 근처에 높이 솟은 흰 바위와 그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더군요.
그런데 마침 길에 당신들의 흔적이 보이기에 따라왔죠.”
벨하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 이자가 말한 것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 있는가?”
“.....”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사실 이 근처가 국경이기도 했고, 일대가 국가 기밀지역이었다.
이 숲만 해도 사람들의 발이 거의 닿지 않으며,
대형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이어서 다가오기 꺼려하는 곳이었다.
“그럼...”
사내가 갑자기 말을 몰아 근위가사단장을 지나쳐 마차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멈추지 못할까!”
기사들이 당황해서 제지하려고 다가갔고,
루카인 역시 마차에 올라타려다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아랑곳 않고 다가가 마차 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마차 안에 앉아계신 여성분께서는 알고 계시는지요?”
“!”
“아까부터 계속 절 뚫어져라 바라보시는데, 부끄럽군요. 저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요?”
마차안에 안장서 계속 사내를 지켜보던 다렌느는,
순간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루카인이 나서며 소리질렀다.
“이분은 여왕 폐하이시다! 예를 갖춰라!”
“...여왕?”
“무엄하구나!”
사내가 살짝 의문을 표하며 되뇌듯 말하자,
한 기사와 루카인이 윽박질렀다.
그때 그늘에 붉어진 얼굴을 다렌느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마차 뒤의 길로 말을 달려가시면, 해가 한 뼘 기울기 전에 높게 솟은 흰 바위와,
마을 입구가 나올 것입니다.”
“아니, 여왕폐하!”
사내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방금 전 이곳에 도착한 그녀가,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모르는 지리에 대해 설명해준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사내는 살짝 웃었다. 다렌느는 힐끔하고 사내의 얼굴을 봤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사내가 말을 몰아 마차에서 멀어져갔다.
간단한 인사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리는 그에게 다렌느는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저기, 잠시만요.”
사내가 말을 몰고 가다가 멈추어 뒤를 돌아봤다.
다렌느는 마차의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상태였다.
방금 전 마차안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한 가지 물어볼게요! 당신의 이름이 뭐죠?”
그 사내의 얼굴은 다시 투구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다렌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음은 확실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 제 이름은 현입니다.”
“전 다렌느예요. 그럼 즐거운 여행되시길.”
그녀의 말을 끝으로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마차를 감싸고 말을 몰기 시작하자,
말발굽소리와 마차바퀴소리에 길이 무척 요란해졌다.
현은 잠시 요란한소리를 내며 흙먼지를 끌고 가는 그 행렬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속력을 낸 건지, 어느새 저만치 점으로밖에 보이질 않게 되었다.
“...다렌느...”
현은 그녀의 이름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되뇌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현은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며 자신을 달랬다.
‘그저 많이 닮았을 뿐이야.’
현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을 흔들어놓은 그녀가,
몹시 못마땅하고 미웠지만, 그리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다렌느. 기억해두지.’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쉰 현은 오른쪽 숲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이제 그만 나오시지! 나무위에서 힘들지도 않나?”
그의 고함이 숲 속에 길게 메아리쳤다.
현은 잠시 기다렸지만, 숲 속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현은 발끈해서는 등 뒤의 맥궁과 화살을 뽑아들었다,
“위치 옮기고 숨죽이면 못 찾을 줄 알아? 당장 나와!”
[피잉! 퍽!]
화살이 근처의 나무기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퍼석! 후두둑!]
잠시 후 그 나무위에서 누군가 현의 앞에 뛰어내렸다.
현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흐음?”
현은 잠시 그 염탐꾼을 살펴보았다.
진한 회갈색피부, 노란 눈, 뒤로 올려 묶은 긴 백 금발,
위로 뾰족하게 솟은 귀.
“다크엘프?”
현이 미간은 찌푸리며 말했다. 항상 흔해빠진 판타지소설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RPG온라인게임 등에서 보아왔던 다크엘프가,
직접 실제로 보니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풋, 귀도 사람보다 약간 큰 수준이고, 상당한 글래머도 아니네?’
현은 혼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일본식 캐릭터 미화가 대중성을 갖춰 침입해버린,
한국의 캐릭터 산업을 불쌍히 생각했다.
그런 현을 잠시 바라보던 다크엘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떻게 날 알아차렸지?”
분명 차갑고 적대감을 품은 목소리였지만,
여성스럽고 예쁘장함을 감추진 못했다.
현은 혼자만의 상념에서 깨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나더군.”
그 말에 다크엘프는 발끈한 듯 보였다.
“그럼 언제부터 내가 있는걸 알아차렸나?”
“네가 날 따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는 거의 절망스런 표정이었다.
현은 그녀의 표정변화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써 당황한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
“내가 숨어 있을 때 발견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대단하군.”
“후훗, 그런가?”
현은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와 웃음으로 대답했다.
다크엘프 특유의 회갈색얼굴이 거의 홍당무가 되었다.
“놀리지 마! 쳇, 현이라 했지? 기억해 두겠다!”
그 다크엘프는 어느새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하지만 현은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지 않고,
근처 나무그늘로 말을 천천히 몰아갔다.
“차원의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마나에 이끌려서왔다가 날 발견한 거겠지?”
현은 혼잣말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계속 몰을 몰았다.
“그랬다가 낯선 나의모습에 호기심을 느끼고 따라왔을 테고.”
이윽고 그늘에 다다르자 현이 그늘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악의가 없다는 것 알아.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슈-욱.]
“네 녀석은 못 당하겠군. 만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늘에서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불평했다.
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긋 웃어보였다.
“넌 적어도 다른 녀석들과는 다른 것 같군. 나쁜 느낌이 들지 않아.”
다크엘프가 현의 손을 잡았다.
현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이름은?”
“레이노첼 핸 레키아(Reynnochell Haen Lekia).”
“예쁜 이름이군, 난 고 현.”
현이 그녀를 말위로 끌어올리자,
그녀는 숙달된 솜씨로 가뿐하게 말안장위에 올라앉았다.
“마을까지 안내를 받고 싶은데. 고삐를 맡겨도 될까?”
“응? 하지만 지금 위치가...”
현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제의 배 아래쪽으로 빙글 내려가더니,
반대쪽으로 올라와 레이노첼의 뒤에 올라앉았다.
“생각할 것이 좀 많아서 말이야. 피곤하기도 하고.”
“으와! 어떻게 한거야? 끝내주는걸?”
“뭐, 이런 것쯤이야. 별것 아니야.”
현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으쓱해보였다.
레이노첼은 고삐를 손에 쥐며 여전히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탤랑스(tallanx)의 후예 같은걸."
“후우, 난 그런 것 몰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현이 레이노첼의 허리를 팔로 감아 꽉 끌어안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어멋! 뭐하는 거야? 당장 놔! 너 사실은 고삐 놓고도 말 몰 줄 아는 거 아니야?”
“어이쿠! 들켰네. 하지만 지금은 피곤하다니까.”
“엉큼해!”
현이 킥킥거리며 레이노첼의 등에 밀착해 기대자,
레이노첼은 현의 능글맞은 행동에 닭살이 돋았다.
“어서 말 몰아. 빨리 가야 한다고.”
“알았어.”
레이노첼을 재촉하던 현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쳇, 호위무사들을 그렇게 먼 곳에 대기시키다니.
아빠는 내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러셨지? 뭐, 웬만한 녀석들은 문제없지만.’
“그런데 말이야.”
“응?”
잠시 아빠의 허술한 준비에 실망하던 중, 레이노첼의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레이노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너 몇 살이니?”
“엉? 왜?”
레이노첼이 고개만 살짝 뒤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장비한 무기들, 모두 사용할줄 아니까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야?”
“사용할줄 알지.”
현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고, 레이노첼도 말을 이었다.
“아까 내 뒤로 바꿔 앉은 솜씨도 그렇고, 활솜씨도 그렇고, 날 찾아낸 실력도 그렇고,
말을 달릴 때도 상당히 빨리 달리던데. 너같이 어려보이는 애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후아암~ 어릴 때부터 했고, 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에는 타고났거든.
그리고 핏줄까지 타고났다고나할까?”
“흐음~ 그래?”
그러더니 레이노첼은 말없이 말을 몰기만 했다.
현은 잠시 그녀의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게임이나 만화 속 캐릭터처럼 섹시한 얼굴에 글래머의 몸매는 아니었지만,
분명 신비로운 엘프의 느낌을 풍기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부끄럽게.”
“...아니, 그냥. 예뻐서.”
조금이라도 현을 놀려보려던 레이노첼은 오히려 자신의 얼굴이 붉어져버렸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둘 사이의 정적은 현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로 깨어졌다.
“난 17살이야.”
“...난 51살이야. 넌 어린것이 어쩜 그러니?”
현은 그녀의 말을 칭찬으로 들어야할지 욕으로 들어야할지 잠시 갈등하다가,
귀찮은 김에 그냥 대충 넘기기로 했다.
다시 레이노첼의 등에 기댄 현은, 그녀의 탁하지만 향기로운 체취와,
그녀가 입고 있는 간단한 차림의 하드레더(가죽갑옷)의 냄새에 취해 서서히 잠들었다.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산새 울음소리가,
점점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멀어져갔다.
훗날 역사는, 이날을 두개의 태풍의 눈이 인연이라는 운명의 장난으로,
짧은 시간동안 만나고 서와 동으로 교차한 것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