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
"사랑해, .. 유천아."
"........으,으응?"
"... 나랑 사귀자."
..........
..................
".. 고백받아버렸지 뭐야."
"뭐어- ?? 어떤 새끼야 응응????
그러길래 내가 그 직장, 관두랬잖아 -!!!!!!!!!"
푸후-, 한숨을 쉬며 쇼파에 늘어져버린 유천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준수가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난리를 쳐댔다.
그들이 이 오피스텔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지 어언 6년이다.
대학교 졸업하고서부터 바로 동거했으니까..
"그래도.. 그 회사, 다녀야만 한다구.
안 그러면 친구라는 어떤 개새끼가 내 발목 붙잡고 늘어질게 뻔한데."
"니 친구?? 정윤호??? 그새끼가 뭐가 좋아 뭐가!!!!
씨발 존나 싫어!!!!!!!!"
악소리를 지르며 정윤호라는 남자를 욕해대는 준수의 얼굴이
붉다 못해 시퍼렇다.
타이를 풀어 대충 내던지고는 또다시 쇼파에 늘어져서 긴 다리를 버둥대던 유천이
그런 준수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장난스럽게 묻는다.
"왜 그렇게 윤호를 싫어해?"
"너 존나 힘들게 하잖아!!!!!
친구라고 봐줄수 없다고 맨날맨날 힘든 일만 시키고 그런다며!!!! 개 나쁜 새끼!!!!!!
나랑 너랑 같이 사는거 안다며!!!!! 우리 사이 안다며!!!!!!!
니가 맨날 그딴 연놈들한테 유혹받는다는거 안다며!!!!!!!!"
"친구인데 뭐. 지딴에는 재미도 있겠지."
"아 짜증나!!!!!!!!!!"
준수가 벌떡 일어서서는,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발을 굴러댔지만,
그가 두른 분홍 꽃무늬 앞치마와 머리수건 때문인지, 그닥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혼자 쿡쿡대던 유천이 끝내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트려 버린다.
귀엽기도 하지.
"근데..풉 .... 푸후후후후 ... 힘든일 시,시키는거랑..푸훕....
걔가 그런거 안다는건 누구한테.. 크흑, 들은거야?"
"창민이 말해줬어."
준수가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유천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투덜댔다.
"창민이도 거기 다니니까."
"에.. 그래도 난 낙하산 인사인거 알잖아.
알바만 하고 다니는 천상 백수 거두어들여준 재벌 친구님이신것도 알잖...."
다시 벌떡 일어서서는 발길질을 해대려는 준수를 유천이 땀까지 흘리며 겨우 말린다.
무슨, 저놈의 다리는 기운도 세다. 맨날 구르고 발길질에 가사일이 없을땐 축구까지...
저러다 언젠간 다리 병신된다에 올인이다.
존나 힘들텐데 걷는건 어떻게 걷는대?
"어떤 놈인지 내 한번 얼굴 꼭 보고야 만다."
준수가 씩씩때며 싱크대로 가버린다.
TV를 틀고 연신 킥킥대는 유천이 보고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인지 모를 것을 혼자 중얼대면서 설거지를 시작한다.
"개새끼.. 그럴거면 아예 낙하산인사고 뭐고 시험 봐서 정정당당하게 입사하게 해주던가.
친구를 아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어! 그래!! 그런거야!!!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쨍그랑.
또 컵 하나 깨먹겠네.
조심좀 하세요 김준수씨.
"아참, 그 소문 알아?"
"뭐어?"
여전히 화난 얼굴로 이미 깨끗해진 접시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준수가 유천의 물음에 접시를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사내에서 이상한 소문 돌고 있는거.
있잖아, 사원 김재중씨 알아?"
"......."
알리가 있나.
라는 생각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준수의 모습에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유천이였다.
하긴 준수는 회사에 가끔 온다지만, 시간제 알바만 하다 가거나
집안에 있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에 사원들에 대해선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창민이 정도만 알수밖에 없었다.
"몰라? 그, 새초롬하고 이쁘장하게 생기고..."
"몰라."
"음, 어쨌던 그 사람, 윤호하고 이러저러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더라."
"그래애?"
준수의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우리 유천이'를 힘들게 하는 정윤호라는 인간,
언제 한번 꼬투리를 잡아 크게 혼내줘야겠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일명 '나의 사랑' 유천이 그 정보를 흘려준 것이다.
에에, 뭐야 박유천! 너도 은근히 그 새끼 싫었던 거지?
그렇지 않으면 미묘한 표정의 나를 무시하고 니 할말만 다 할리가 없다구 !!!
"근데 그 김재중이라는 사람, 지위가 .."
"에이 소문일 뿐이라니까. 창민이랑 동급이야."
"아아 ... 그럼 유천이 밑이구나."
중얼대며 TV에 다시 열중하는 유천의 곁에 은근슬쩍 다가앉는 준수였다.
유천이 알았다는 듯 준수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지어낸다.
"이그 우리 준수우~ 설거지 다 했어요?"
"응!"
"아아 귀여워♡"
활짝 웃으며 준수를 꼬옥 안아버리는 유천.
그런 유천의 모습에 화악 온몸의 체온이 올라가버리는걸 느끼는 준수였다.
이거 정말, 진짜 꽃수는 박유천 이분이라니까.
이인간 정말 완벽하다. 얼굴은 꽃수인데 몸이나 자태로 보면 영락없는 공인게 정말 '먹어버리고 싶은' 사람이다.
'좋아. 내일 다시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들어가보는거야.
가서 그 정윤호라는 잘나신 분 얼굴이나 한번 보고 오던가 그 얼굴 짓밟아 놓고 오던가 할테니까.'
.........
.................
"아아, 준수씨 안녕하세요!"
"지현씨도 안녕하셨어요?"
씨익 웃으며 사원인 지현에게 살짝 인사하는 준수였다.
아방꽃수의 모습에 지현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후후 그래. 난 이걸 노렸던 거라고.
아차, 김지현 너도 우리 유천이한테 수작 건 년이지. 너도 죽을 준비 해라.
내가 오늘은 정윤호 그 개새끼 때문에 참는다.
"오늘도 알바 오신 거에요?"
"예에.. 오늘은 정기날이라서요. 유천이는 어딨죠..?"
"아아 유천씨라면 저기에."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다시한번 꽃미소를 날려주는 준수.
붉어지다 못해 하얘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역겨워 꺼져'를 연발하며 유천에게 살짝 다가섰다.
"자기야♡"
"나 회사에서 짤리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힝 그런 생각밖에 못해."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네 박유천..
김준수라는 인간을 모두 꿰차고 앉아있는 박유천이라는 사람이 내 거라는 게 너무 좋아.♡
준수가 어리광을 부리며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무엇에 그리 열중인지, 연신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유천을 멍하게 쳐다보는 준수였다.
"뭘 하면 돼에?"
"응.. 저기 저, 아아니 거기 말고.
회색 스탠드 밑에. 응 그거.
그 서류 있지? 그거 좀 이사한테 갖다줘.
그다음에 다시 와주라. 복사 해야될것도 있고.."
"이사...?"
준수의 눈에서 또다시 광채가 번뜩인다.
햐아, 이거 은근히 계획적이다 박유천.짝짝.
"정이사님."
"정이사아아아...?
유쵸니 친구??????"
"응 그래. 이사실 어딘지는 물어물어 찾아가세요."
"네에에에 ...."
말꼬리를 흐리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류를 꼬옥 품에 안는 준수였다.
김준수 저녀석, 저 안에 흉기 숨긴거 아냐?
라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눈을 번뜩이는 시간제 알바생의 모습에 사원들이 모두 움찔해버린다.
"흐응.. 5층이라고했찌이이이잉....."
습관적인 그의 말투를 지나가는 여사원들이 듣고 꺄아 거리며 지나간다.
멀어지는 하이힐 소리에 준수가 풋 하고 한번 웃어버리고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창민이도 한번 보고 가야 돼는데 어쩌나..
미안하다 심창민. 오늘은 '정이사님' 보러 온거니깐 너는 패스다.
"직진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
마치 미로와도 같은 5층 이사실에 슬슬 열받는 준수였다.
뭐가 이리 복잡해. 이새끼 이거 취향한번 더럽네.
"... 다시 턴."
탁.- 살짝 발소리를 내며 '이사실' 문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드디어 도착한 거야 !!
난 해냈어!!!
속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살짝 기웃거리는 준수.
.. 에. 창문에 뭐가 쳐져있네.
그를 미리 탐색할수 없음에 부루퉁해진 준수가 문고리를 살짝 비틀었다.
.. 기름칠을 해 놓은것 같애. 소리가 전혀 안나는 거 같..........
"!!!!!!!!"
눈 앞의 이 광경은 뭐지?
'이러저러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더라.'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있는 저 남자가 필시 정윤호일 것이다.
그럼 그 무릎에 앉아서, 능숙하게 그와 키스하고 있는 저 남자는?
새초롬하니 이쁘장하게 생겼다.
단지 그렇게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굳이 좀 더 표현을 하자면, 중간 정도의 머리길이. 까만색.
옆선이 아름다운 ..
저 사람이, 김재중?
벙찐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던 준수를 드디어 눈치 챘는지,
김재중이 살짝 눈을 떠서 준수를 응시한다.
하지만 키스를 멈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롱하듯 더 깊이 파고들었다.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려는 그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
' 탁 '
손에서 빠져나간 서류봉투.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그 세심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키스를 멈추는 이사의 모습과
아쉽다는 듯 준수를 얄밉게 째려보는 새초롬한 사원의 모습이 시간제 알바생의 눈에 들어왔다.
사, 사실이었던 거야? 그런거냐구!!!!!!!!!!!
".. 어라. 아르바이트생?"
"...네,네에........."
"귀엽게 생겼네.
그럼 나 간다. 오늘은 여엉 타이밍이 안좋네."
동성과 키스,
아니 그냥이라도, 키스하다가 들킨 사람 치고는 너무 뻔뻔하다-
라는 생각을 하며 준수가 그제야 쏟아진 서류들을 모아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주섬주섬 주변을 그렇게 정리하는 준수의 옆으로 재중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저 편으로 멀어졌다.
"... 들어올땐 노크좀 하고 들어 오시지요."
"죄, 죄송합니다."
"혹시 이름이?"
날카로운 그의 어투에 복수고 뭐고 순간 당황해버린 준수가 말을 떠듬거렸다.
끄악 이거 뭐냐구!!!!!!
이 인간들, 어쩜 이리 대담하지?
"기,김..김준..준수라고오 하는데요오 ..."
"아아 ..."
그제야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알겠다는 듯 의자 뒷편의 브라인드를 걷어 올리는 정윤호.
"그럼 ... 아까 전 상황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겠군요?"
"네,네에에에에?"
"당신 박유천씨 알죠?"
".. 아,아,아,아아아아아는데요오....."
"동거까지 한다면서. 방금 상황,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지 않았을까요?"
정 반대다.
존나 놀랐다 샤발아.
"아.. 그거야 뭐...."
이러저러한 원망의 말들을 꾸욱 삼킨채 어물대는 준수였다.
악!!!!!!! 존나 열받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돼!?!?!?
.. 라지만 저 인간의 무언가에 눌려버렸다.
"소문같은거 퍼트리는 비이해적이고 비상식적인 짓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비이해적?
비상식적?
이봐요 정윤호씨. 보통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남자가 남자랑 딥키스를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목격했다-.
이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소문을 퍼트리는게 비이해적이고 비상식적입니까,
아니면 그 다른 사람이 뻔히 보고 있는데도 1분여간 키스를 이은 당신네들이 비이해비상식적이겠습니까?
"뭐어.. 그 서류는 여기다 놓고 나가세요."
"..네에."
준수가 조용히 웅얼거리듯 대답하고 서류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모자를 더 푹 눌러쓴 채, 꾸벅 인사하고 이사실을 나가려는 순간 ㅡ
"잠깐 이리 와보세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냐아ㅔ라ㅔㅇ허ㅔㅇㄴ허ㅑㅁ허ㅜ허
왜 불러 왜!!!!!!!!!
나 나가고 싶어!!!!!!!!! 우리 유천이 보고 싶어!!!!!!!! 샤발 압도당하는 분위기는 뭐냐구우!!!!!!!!!!!!
뻘쭘해에!!!!!!!!!!!!!!!!!!!
"모자 좀 벗어 보세요."
이젠 자포자기 했다는 듯 모자를 벗어던지는(짤리려고 환장을 했지)준수였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 정윤호의 모습에, 반항하듯 맞바라봐주는 준수.
꽤 잘생겼네.
흥 그래봐야 우리 유천이보다는 못하다.
"이쁘네요."
화악, 준수의 뒷목을 잡아 자신의 바로 앞으로 끌어당기는 정윤호.
숨결까지 세심하게 느껴진다. 당황한 준수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꼭 감아버린다.
악!!!!!!!!!!!!!!!!!
이새끼 뭐야!!!!!!!!!!!!!
눈 둘데도 없고 말이지!!!!!!!!!!
저리가!!!!!!!!!!!!!!!!!!!!!
".. 뭐 하시는 거에요."
살짝 격양된 어조로 그를 밀어내는 준수였다.
그래. 아직은 괜찮아. 후후후후 괜찮다구.
그냥 얼굴만 가까이 댄건데 뭐.
"이러시면 곤란하죠. 저랑 유천이 사이 아시면서..."
"그냥 얼굴만 한번 본건데요."
"..........."
"오해하신건 그쪽이신데. 풉."
재미있다는 듯 쿡쿡대는 윤호에게 살인충동을 느끼며 내던진 모자를 다시 줍는 준수였다.
개새끼야. 내가 평범한 서민만 아니었어도 벌써 넌 죽었다.
이래서 권력이 중요한 거야. 내가 대통령 사촌쯤만 되었어도 넌 아작이야!!!!!
아니니까 문제지만.
"그럼 안녕히..."
"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정말로 이사실 밖을 나가려는 순간-
또다시 준수의 이름을 부르는 저 정윤호라는 사람.
"김준수씨."
"왜요."
어쭈 이젠 아주 반항하네.
"내일 유천이랑 저랑 따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던가- 어- 외박을 해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외박?
"으아아아아아어엉어엉어어어엉"
"그만 울어 준수야.."
"으하하어어어엉어어어엉
미친놈아냐 미친놈????? 그새끼 미친놈이다에 올인몰표 다하겠어!!!!!!!!!어어어어어어엉"
"에이 외박이라고 해도.. 그냥 방 따로 쓰던가 같이 자는거 뿐이........"
"잔다구?? 자??? 같이이????"
".. 자기만 하는 거라니까. 오랫만에 그냥 사원 대 이사가 아니라 친구로서 만나기로......"
"그새끼 왕 변태 뻔뻔이란 말이야!!!!!!!!"
땀을 뻘뻘 흘리며 울고 보채는 준수를 토닥이는 유천을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외치는 준수였다.
자신의 입으로 목격한 그 장면을 왜 유천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건지, 스스로도 의아할 뿐이었다.
"그새끼가 이사실에서 무슨 짓 했는줄 알아???? 어어어어어어어엉"
"너 건드렸어?"
"그건 아니야 으항"
'너 건드렸어' 부분에서 심각해지는 유천의 얼굴에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하며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준수.
...... 건드린건 맞는데.
"걱정하지마. 그래도 윤호, 상식 없는 놈 아니니까."
상식 없던데요.
"아아 맞다! 창민이도 같이 가라고 하면 안돼?"
"뭐?"
"창민이.. 3학년때 거기 학교로 전학 갔었다며!
그러니까 유천이랑 윤..윤호라는 그인간도 창민이 다 알꺼 아냐.
같이 회포 푸는 셈 치고. 응?
그리고 이 기회에, 나도 창민이 오랫만에 볼 겸, 그 정윤호라는 사람이랑 오해도 풀어볼 겸
따라가면 안됄까?"
"... 뭐어 나쁠껀 없지."
안도했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며 준수의 볼을 꼬집는 유천.
그제야 환히 웃으며 눈물자국을 지우러 화장실로 달려가는 준수였다.
하지만 거울속의 그는 환한 미소가 아닌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뭐야 너 연기한거니?
'두고봐라 정윤호. 너 유천이한테 수작 걸었다간 죽여버릴줄 알어.
그리고 너 말이야!! 나한테 아주 큰 약점 잡힌거 모르지 새끼야????
죽었어... 죽었어.... 한번에 복수해주겠어!!!'
VOL. 2
"으아 ...."
밝다 못해 눈부신 햇살이 눈을 괴롭혔다.
강하게 느낄수 있었다. '아침이구나'.
..어제 밤에 무리를 했나보다.
아침이다라는걸 알면서도 눈이 안 떠진다.
몸 이곳 저곳이 콕콕 쑤셔온다.
눈을 감고 침대 밑을 주섬거려서 겨우 옷을 챙겨입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일어났어?"
유천이 환하게 웃으며 준수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 주었다.
준수 역시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식탁으로 향하는 준수.
"오늘 토요일이니까.. 내가 아침 하는 날이잖아.
거기 토스트랑 생크림. 찍어 먹어. 난 벌써 먹었구."
"고마워어어어..."
아직도 졸린 듯 하암 하품까지 하며 비몽사몽 그대로 식탁에 엎어져 버리는 준수였다.
이미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쇼파에 앉아 TV시청을 하던 유천이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졸려?"
"응.. 간만에 해서 그런가 ....."
"넌 밑이었잖아."
"몰라아 .. 왜이렇게 졸리지."
"오늘 정말 갈 꺼야?"
"어딜?"
".. 잊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푸우 숨을 내쉬며 준수 바로 앞의 의자에 걸터앉는 유천이였다.
"오늘, 윤호랑 나랑 만나기로 했는데, 니가 너랑 창민이도 데려가라며.
윤호는 괜찮다고 했는데.창민이도 그렇고...
그럴꺼면 자기도 사람하나 데려간다고 하더라구."
"가야지이이이이 ........."
중얼대며 토스트를 입에 물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싱크대를 응시하는 준수였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이 돌고 있었다.
데려갈 사람이라. 정윤호가 데려갈 사람이라면 필시 김재중임에 틀림없다.
일단 그건 다행이구나. 설마 그 김재중이라는 사람 앞에서 유천이를 샤바샤바 하려고는 못하겠지.
그럼 내가 해야 할 건... 혼내주기. 다시는 유천이 괴롭히지 말라고 무섭게 엄포 놓아주기.
"한시에 만나기로 했어.
빨리 씻어둬. 지금 열한시니까, 한시간 후에 지하철 타고 가야지."
"뭐 하게?"
"내가 영화 보자고 했어.
일단 영화보고 밥먹고 대충 시간 때우다가 나이트클럽을 가던가 .."
"웅.♡ 유쵸니랑 함께니까 좋아."
잠이 다 깬듯, 입가에 토스트 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것도 모르고
유천에게 부비대는 준수의 모습을 보며 유천이 살짝 미소지었다.
귀엽다.
이쁘다.
난 이 녀석 없으면 안돼.
"박실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님!"
허리에 두 손을 얹고는 온 동네, 아니 온 국민 다 들어보라는 듯
당당하게 박실장님을 외치며 유천을 부르는 저 사람, 심창민.
"..........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돼잖아."
"3분 지각."
창민이 여유만만하게 히죽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실장님이 지각이신가? 이거이거 모범이 안됀다구요."
"이사님은 아직 출발도 안하신 모양이신데?"
"뭐, 정말?"
"아까 전화해보니까 그렇더라."
"샤발... 어제 또 그새끼 만났나 보구만."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그들의 대화에 뚱- 해있던 준수가
'어제 또 그새끼 만났나 보구만'이라는 문구에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뜨고는
창민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ㅡ 안녕. 유쵸니~~~~ 마누라 ~~~~~~~"
"유초니라고 하지 마!! 나만 유초니라고 그럴꺼야!!!"
"지랄 쌩 까네 -_-."
"흥흥~~ 유쵸나 ㅠㅠ 쟤가 나한테 욕해써!!!!"
짐짓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유천의 뒤로 홱 물러나버리는 준수.
그런 준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서있는 창민을 유천이 흔들어 깨웠다.
".... 최강 커플이시구만."
"하하 .."
"흥흥~~ 유쵸나~~ 쟤가 나한테 욕해써어~~~ 쟤 혼내죠오오오오오~~~~ 쟤 나빠아아아아아~~~"
"야아아!!!"
으스대는 가락을 붙여 준수의 말투를 따라하는 창민에게
꿀밤을 한대 먹여주는 준수였다.
"죽여버린다아!!!"
"여기 법치국가다 새끼야. 나 죽이려고 준비만 해봐 살인미수로 교도소에 짱박혀있지"
"지랄.. 살인미수가 교도소행이냐?"
"새꺄 넌 그것도 모르냐? 어이그 이새끼 완전 쑥맥중에서도 상숙맥일세"
"씨발 너 진짜 내가 죽인다!!! 법 없는 나라 가서 내가 죽인다!!!!!!"
".. 둘다 그만 해."
머리 아프다는 듯 미간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는 유천의 행동에
준수가 냉큼 그의 이마를 짚어주며 앙탈을 부린다.
"아아아아아앙. 쟤가 자꾸 나 짜증나게 하자너 유쵸나."
".. 유쵸니?"
이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보이스다.
이 어투.
어디선가 들어본 특유의 어투다.
"그런 멋진 별명도 있다니 부럽다 박유천.
유~~~ 쵸나아아아아~~~~아앙♡"
".. 제발 하지마아아 ...."
어울리지 않게 준수의 흉내를 내는 윤호를 보고
창민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푸하하 웃어댄다.
유천 역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저기요!!! 왜 제 흉내를 내고 그러세요!!!!"
준수가 화를 내며 윤호에게 씩씩댄다.
정장차림의 그가 여유만만하게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연다.
"아아앙♡ 준수찌 왜 화내요♡
유쵸니한테 이를꺼양"
포복절도하다못해 아예 길거리에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는 창민이였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던 유천도 큭큭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정윤호 뒤에서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저 남자도....
"아 완전 미친다!!!!!!!! 똑같다!!!!!!!!!! 똑가태!!!!!!!푸하하하하하하하하 진짜 어떡해 끅끅"
"야 심창민!!!!!!!!"
한껏 열을 받아버린 준수가 차마 윤호에게 덤빌수는 없어
애꿎은 창민을 발로 차댄다.
그제야 끅끅대며 일어서는 창민의 옷을 유천이 털어준다.
"음, 어쨌건 안녕하세요."
재중의 인사에 분위기가 미묘해져버렸다.
유천이 살짝 미소지으며 '예 안녕하세요-'라고 답하자,
준수가 눈에 불을 켜고 재중을 째려봤다.
"우리 다 동갑 같은데 그냥 말 놓지."
그 미묘한 분위기가 깨진 건 윤호의 한마디 덕이었다.
창민 또한 재중에게 인사를 건넸고 다섯은 그럭저럭 어울려 영화관을 찾아 걸었다.
"그런데, 왠 정장? 너 정장 싫어하잖아."
"일이 잠깐 있어서. 서둘렀는데도 늦었네, 미안해."
"헤에.. 그렇구나."
"네 미소는 여전히 최강 꽃이구나."
"엉?"
'최강 꽃'이라는 한 마디에 준수가 집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질투났다.
내가 모르는 유천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이 정말로 질투났다.
"근데,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중학교때 같은 학교였다가 고등학교 때 갈라졌지 뭐."
"햐아, 통곡하셨겠구만. 그때부터 유쵸니라고 부른건가?"
"아니 그건 좀 더 있다가."
자기들끼리 킥킥대는 모습에 열받은 준수가 아무 말도 않고 땅만 내려보고 걸었다.
옆눈질로 재중을 보니, 재중도 윤호 옆에 꼭 붙어서는 거리만 두리번거릴뿐 대화에는 끼여들 생각조차 않는 것 같다.
"여기네. 뭐 볼꺼야?"
"이미 표 다 사왔어. 왕의 남자."
"아아! 그거! 보자보자보자"
... 나는 선택권이 없구나.
[ 니 놈은 본시 여자도 아닌 것이 여자이고. ]
[ 부끄럽고 수줍고. ]
[ 때론 앙탈도 부릴까? ]
[ 때론 앙탈도 부리고 ]
[ 때론 눈물도 흘리고. ]
[ 때론 서글퍼 꺽꺽 울기도 하고. ]
.... 뭐야. 이거 꽤 재밌네.
저 광대 공길 역 하는 사람, 정말 이쁘게 생겼다아..
새초롬한게 꼭.......
순간 윤호와 키스하던 재중의 모습이 생각나 준수가 황급히 그를 찾았다.
자신의 두 칸 옆자리에서 연신 싱글거리며 영화를 보는 김재중이였다.
.. 그 옆에 정윤호. 그 옆에 유쵸니. 그리고 나.
뭐야. 유쵸니랑 저 새끼는 왜 맨날 붙어있는 거야?
열받네.
준수가 짜증이 치밀어오르는것을 참으며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 영화가 깊어지자, 여기저기서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준수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훌쩍댔다.
그리고, 준수의 차가운 손을 잡는 다른 손.....
".... 손이 차갑네."
".........."
"우린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자."
"........응?"
무슨 소리야?
준수가 화들짝 놀라며 유천을 빤히 응시했다.
유천은 그에게로 얼굴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스크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냥. 저 둘 너무 슬퍼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기 싫어서 ....."
".. 바보같이. 저렇게 될 리가 없잖아?
난 너만 좋아할꺼야.
난 너만 사랑할꺼야.
반대하는 인간들 있으면 그 인간들 다 죽일수도 있어.
난 너밖에 없어 유쵸나."
.. 좋았는데 유쵸나에서 깼구나.
유천이 그제야 풉 웃으며 준수의 왼쪽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었다.
"... 응."
그렇게 그 영화는 서로 다른 이들에게 다른 생각을 심으며 끝을 맺었다.
"하아, 재밌었어. 그렇지?"
"근데 난 뭐가 슬픈지 모르겠어."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나온 준수와, 눈물자국이 보이는 유천을 번갈아 보며
이해할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창민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는 건데?
공길이 장생을 좋아한 거야? 연산은 버려진 거야?
어, 연산 불쌍하긴 하더라.녹수 욕 잘하더라?"
".........."
어쩜 저리 감정이 무딜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일행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벌써 짙어지기 시작했다.
".. 보는 입장이 달라서 그랬을까?"
내내 묵묵히 걷기만 하던 유천이 입을 연건
어느 바(BAR)에 도착해서 일행이 한참 술을 마신 후였다.
"보는 입장이 달라서.....
창민이는.. 이해를 못 한 거야."
"에, 그깟 거 이해 못했다구 우롱하는 거지!"
"천만에 ...."
술을 못하는 준수는 사이다만 들이키고 있었다.
앞의 고급 안주를 가만히 응시했지만 집어먹을 타이밍을 모르고 있었던 준수가
자신의 먹잇감 메론을 째려보며 (나름대로) 지켰다.
"아.... ..오늘은 왠지 잘 안 받네.........."
유천은 그 소리만 겨우 하고는 푹 쓰러져 버렸다.
영화 한편에 저렇게 몰입하다니라고 생각한건 창민만이 아니라 준수도 그랬다.
슬프긴 했지만 ... 술을 보통 주량을 훨씬 넘도록 진탕 퍼마실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차 저 녀석, 한번 우울해지면 그날 하루는 종친 타입이지. 감정에 쓸리는 타입이니까.
영화선택을 잘못했구나.
".......... 여전하네."
먼저 넉다운 되버린 유천의 머리칼을 윤호가 쓸으며 조용히 뇌었다.
그 모습에 재중과 준수가 동시에 그 둘을 쏘아보았다.
"참 오랫만에 보는 듯이 말씀 하시네요? 아니, 말하네?"
"맞아. 오랫만이야."
"회사에서 매일 보잖아요."
"자주 못봐. 회사에서는....."
윤호가 재중을 한번 힐끗 보더니 준수 가까이 와서 귀에다 속삭인다.
"저녀석 보느라 바빠."
.... 너 은근히 느끼공이구나 정윤호.
동시에 창민이 들이키던 맥주를 풉 하고 뿜어버렸다.
재중이 킬킬대며 양주를 잔에 붓자마자, 냉큼 자신의 입에 가져가 털어 놓는 정윤호를 보며
'이녀석 미친놈일세.' 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준수였다.
마치 읽어보라는 듯이, 바로 앞에서 (지 딴에는) 조롱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땐 친했거든.
그리고 저녀석.. 입사한지도 얼마 안됐잖아. 우연히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한거고."
".........."
투덜대며 엎드리는 준수의 입에서는
'친구가 유쵸니밖에 없나' 라던가
'지구왕따 샤발정윤호' 라던가
'연락안해도 잘먹고 잘살수 있었거든요 샤발놈아' 같은 말들이 가끔씩 들렸다.
"헤에.. 그럼 고등학생 시절에 유쵸니한테, 통달하겠네."
"그럭저럭."
"공부는?"
"중상위권."
"운동은?"
"잘했어."
"인기는?"
"나보단 없었다."
마지막 문답에 준수도 그들과 같이 킬킬거렸다.
햐아, 흔히들 말하는 '동경받는' 고삐리셨나보지 두 분?
하긴 우리 유쵸니가 좀 머싯지.
"그렇게 친했어?
너, 저사람한테 보내는 눈길이 참 애정스럽더라."
재중이 미소를 지으며 농을 건넸다.
"너한테 주는 눈길만 할까."
"풉."
재중이 미친듯이 웃어대서 준수는 '저사람이 드디어 돌았구나. 올인하길 잘했다'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혀끝으로 입술을 연신 적시던 창민이 '쟤들 왜저래' 라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준수를 응시했다.
둘의 생각은 같았다.
닭살이다.
정윤호 알고보니까 느끼공 맞구나.
두어 시간 뒤에,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최상급 A코스가 되어버렸는지 연신 술을 마시다 만취해서 쓰러진 재중과,
자기 혼자 솔로는 슬프니 어쩌니를 중얼거리며 맥주를 퍼마시다 잠들어 버린 창민,
그리고 양주만 조금씩 계속해서 마시는 윤호가 준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
[ 와아, 저 남자 봐.일행이 모두 넉다운 되어버렸는데도 저 남자만 정상인듯한데. ]
[ 저 사이다 마시는 사람 맞은편? ]
[ 술 쎈가보다. 아까부터 계속 들이키더만. ]
저님들 속았구나.
이봐요, 저 정윤호라는 인간, 자주 마시기만 했지 많이 마시지는 않았어요.
준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앞의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
딱 눈치채버렸다. '저 샤발새끼 저소리 들으려고 일부러 저렇게 마셨구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또 내리고 내리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바로 앞의 메론을 발견한 준수였다.
좋았어. 지금이다!
저 메론을 나의 입속으로!
"...... 이봐."
"에?"
저 샤발탱이가!!!!!!!!!!!!!
"너 진짜 귀엽다."
"에에?"
이건 또 무슨 귀뚜라미가 샤랄부르스추는 소리야.
너 영화 찍냐? 니가 선수냐고 !!!
아니, 설령 선수라고 해도 말이야.
어떻게 자기 애인이 딱 옆에 있는데, 나한테 수작걸수가 있어?
아무리 모두 넉다운 되어버렸다지만 말이지!!!!!!!
"박유천 쟤 있잖아.
내가 고등학교때 그렇게 키스 한번 하려고 해도 끝까지 거부하던 녀석이었다?"
"....... 에?"
"이쁘게 생겼잖아."
의외로 시큰둥하게 말을 이어 가며 턱을 괴는 윤호.
"남고가 다 그렇지.
너 남녀공학 나왔다며?
쟤가 몸은 단단한데 얼굴은 이쁘잖아. 인기 존나 많았어."
.. 그럼 아까 그 인기 어쩌구 하던 게
모조리 남자들이였냐?
난 당연히 공학인줄 알았지.
이제 보니 이인간 상상을 초월할만큼 위험한 인간이였구나.
"자기는 다른 사람이 있대."
.. 물론 고등학교 갈라지고 나서
연락을 아예 안 한건 아니었다.
주말에도 만나고 방학때는 거의 맨날 만났다.
고 2때까지는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 고3때부터 대학 갈 준비를 하느라 만나지 못했다가,
정말로 우연하게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게 되어 동거도 하고 그랬던 거였다.
"뭐 옛날 얘기지.
지금은 이녀석밖에 없으니깐."
살짝 귀찮다는 표정으로 옆에 쓰러져있는 재중을 툭툭 건드리는 윤호였다.
참 어이없기도 하지.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거야?
비상식적인 샤발놈아.
"메론 먹어도 돼?"
"뭐?"
"메론 먹어도 돼냐구."
"니 맘대로 해..."
어이없기는 정윤호 쪽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메론 먹는데 허락 맡고 먹는 민주주의 국민도 있나?
그리고 그 어리둥절함은 준수에 대한 이미지를 '귀엽다'로 완전히 박아버렸다.
"그만 가자. 늦었네.. 벌써 한시 ....."
장장 30여분간 윤호가 준수에게 들은 소리라고는,
'유쵸니 건들면 죽어' 라던가,
'샤발새끼 니 인간성이 왜 그모양이야' 같은, 썩 좋은 소리는 못 되는 것들이었다.
햐아, 얌전하고 숫기 없는 줄 알았더니만은
술 몇잔 넘어가니까 저런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는구나.
"으아.. 유쵸니 이쁘지??????
내꺼다!!!!!!!!!!! 너 절대 안 줄꺼다아!!!!!!!! 그러니까 일지깜찌 꺼져 샤발아아아 "
"..... 이젠 돈까지 딸려 줘도 안 가져 !!!!!!!!!!"
준수의 술주정에 꽥하니 소리 질러 버린 윤호였다.
제발, 자신에게는 저 '새초롬한 불여시'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저 '귀여운' 녀석에게 각인시키고 단번에 이해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면,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심정이었다.
저녀석 피곤한 타입이잖아. 귀여운데 피곤하네.
박유천 녀석도 애 좀 썼겠다.
".......... 개새끼..."
짧게 욕을 읊조리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넉다운 되어버린 준수였다.
윤호가 말없이 그를 살짝 응시했다.
도톰한 입술에 미묘하게 느껴지는 매력이란.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의자가 끌렸다.
잔뜩 취해서 탁자위에 쓰러져버린 준수에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간 윤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주춤하다 이내 다시 일어섰다.
"바보같이.. 난 정말로 저 녀석 밖에는 없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재중의 뒷 목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키스하는 윤호였다.
VOL.3
숨쉬기가 힘들다.
어렴풋하게 정신이 들기 시작한 순간 느껴버린 건-
'덥다'.
이제 2월 중순이니까, 날이 풀렸을게 당연하다.
그런데 날씨를 무시하는 이 실내 온도는 뭐지?
.. 실내가 맞긴 맞는 건가?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손을 흔들어 아무거나 만져보는 준수였다.
... 그래.. 이건 이불이구나. 실내구나.
안도감에 다시 잠들어 버리려는 순간,
........ 이불?
.......... 침대???
술기운이 화악 깨버렸다.
황급히 자신의 셔츠를 더듬거리며 만져보는 준수.
... 엑!! 내 것이 아니야!!!!
바지도 만져본다.
셔츠만 바뀌었구나.
준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 헤에. 유천이인가....
그런데 어제 정윤호 빼고 우리 다 넉다운 해버렸던거 같은데,
어떻게 잘 알고 집에를 왔네.
술기운 때문인가? 옷도 알아서 갈아입구. 장하다 김준수!
"유쵸나아아아..."
몸을 돌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유천의 등판을 헤실대며 바라보다
'유쵸나'라는 말을 뇌이며 자신의 팔로 살짝 허리를 감싸주는 준수였다.
.. 헤에. 따뜻하다.
"........ 드디어 깼구나."
"!?!?!?"
황급히 둘러싼 팔을 빼내는 준수.
뭐야!! 유쵸니가 아니었어!?!?
"아주 꽉 안더라.
웃통 벗었으면 어쩔 뻔했어어.... 생각만 해도 무섭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며 몸을 돌려 준수의 얼굴을 바라보는 저 남자는,
어제 술자리에서의 유일한 승자(?) 가 아닌가!
..... 근데 왜 저 샤발개새랑 나랑 이러고 있는 거야????
"너!!! 왜 니가 내 옆이야!?"
"........ 말로만 듣던 '필름이 끊겼다' 라는 거야?"
"뭐?"
"어제 생각 안나?"
"무슨?"
"완벽하게 끊겼네 이새끼.
네 잔 마셨다고 취해서 정신도 못차리더니만은..."
그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에? 잘나가는 회사 이사 집치고는 너무 좁다.
이녀석도 오피스텔인가?
저쪽에 창민이랑 널브러져 있는 김재중씨.
좀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무슨 꿈을 꾸는지(아니면 중량을 느끼고 그러는지)땀까지 뻘뻘 흘리며 버둥대는 창민의 위에,
태평히 다리 한짝을 올려놓고 코를 고는 김재중씨랄까.
".. 그래서 니가 여기 자진해서 누웠더라고."
"에에?"
멍하니 있던 준수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에? 자진해서 뭐요?"
"나참. 뭐 들은 거야?
난 혼자 자는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냥 잘때는 저새끼도 내 침대 위에 안 올린단 말야."
윤호가 검지손가락으로 자고있는 재중의 볼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 녀석들 다 옮기고 나니까 마지막이 너였는데
니가 비틀대면서 걸어오더니만 내 침대 위에 픽하고 쓰러져 버렸던거 있지."
"...........내가요? 내가?
왠만하면 구라같은거 치지 말죠? 이 상황에?"
"나도 이런 상황에는 구라따위 안 쳐."
........
김준수는 바보다 ♬
김준수는 미친놈 ♪
김준수는 개병신 ♡
꺄아아아아아아아아
ㅇ햐ㅔㅇㄴ허ㅔ래ㅏ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잠깐만요!!!! 나, 나 옮겨 줬어야죠!!!!
아니면 다, 당신이 딴데가서 널브러지던가!!!!!!!"
"난 여기 아니면 못 자."
"나 옮겼어야지!!!!!!!"
"보기보다 무겁더라."
"난 왜 건드렸어!!!!! 이 셔츠!!!!!!!"
"넌 밖에서 입던 거 그대로 입고 자? 더럽게시리."
"깔끔은 존나 떠네!!!!!! 바지는 왜 그냥 둔거야?????"
"내가 왜 널 잠자리 모드로 셋팅해야돼.
니가 오해할꺼 뻔하고, 또...."
갑자기 입을 다무는 윤호.
발을 동동 구르며(어처구니없게도)다음 대답을 대답을 기다리는 준수가 딱해 보여서였을까?
".. 또 니 뒤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녀석이 오해할꺼 뻔하고."
"뭐?"
홱 뒤를 돌아본 준수의 얼굴이 굳어져만 갔다.
....... 꿈에서도 사랑할 남편님이 거기 서 계셨으니까.
"으아아아아앙
유쵸나 제발 믿어줘!!! 난 피해자야!!!!! 저 새끼가 나 건드린 거야!!!!!!!"
"니가 자진해서 누웠다며."
"으아아아아아 나 진짜 아니야!!! 돌겠다!!!!!!"
"김준수 그렇게 안봤는데 나쁘다."
"으으으으으으윽"
연신 훌쩍이며 손으로 눈을 문지르는 준수.
그의 안구는 습기가 찬지 오래되었다.
무려 두어 시간 동안을 그렇게 울고 빌고 하기를 반복했으니, 어련하겠어.
그야말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김준수.
"와. 부부싸움이야?"
"갈라서~! 갈라서~!
대세는 헤어지는 거야!!!"
"니들이나 깨져버려!!!!"
코맹맹이 목소리로 재중에게 악담을 되돌려주는 준수였다.
어느 새 세상 모르고 자던 저들까지 깨어버려서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 냉담한 분위기의 이 둘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앉아있다.
정작 원인제공자는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tv시청이나 하고 있는데 말이다.
"옷도 저녀석이 갈아입힌거구.. 그, 그리고 ... 훌쩍......
나, 나는 원래 술 들어가면 아무데나 픽픽 쓰러지는거 알잖아 유쵸나.....
바지는 똑같잖아 ㅠㅠ
나한텐 유쵸니밖에 없어.. 유쵸나 제발 ㅠㅠ"
그야말로 울며 불며 사정이다.
순간 재중의 눈도 표독스럽게 변하더니 날카로운 어투로 윤호에게 독설을 던진다.
"야!!!!! 진짜 니가 저 새끼 건드린 거야!?"
"잠만 잤어."
"너 미쳤냐!?"
"잠 잤다고 잠!!! Sleeping!!! 너 영어도 모르는건 아니지!?"
".. Sleeping?"
딱딱한 얼굴로 신문만 응시하던 유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아, 이 녀석. 신문 보는 척하면서 준수가 빌던 내용
하나하나 머릿속에 다 박아 놨나 보다.
"정말로 잠만 잔거야?"
"응,응! 제발 믿어주라 유천아 ....."
"키스 마크 있는지 없는지 보고."
..........
사실 나도 장담 못해.
나 필름 끊기는 스타일이잖니 유쵸나.
어뜩해!!!!!!!!!!!
저 새끼 진짜 나한테 뭐 한거 아니지!!!!!!!
준수가 당황한 얼굴로 윤호의 표정을 살폈다.
악!!!! 도무지 심중을 알수 없는 저, 저 특유의 표정!!!!!!!
준수가 자포자기하고 셔츠 단추를 서너개 풀어 쇄골을 보여주었다.
어쩌지.. 나 진짜 유쵸니하고 갈라지는 거 아냐??
그럼 나 병신돼버릴꺼야. 다리밑에서 떨어지든 차에 치이든 약물중독돼든,
어떻게든 병신돼서 저새끼 가슴 아프게 할꺼야!!!
".... 통과."
"응?"
한결 가벼워진 유천의 목소리에
꼬옥 감았던 눈을 살짝 뜨는 준수.
....... 없다.
준수의 피부는 여느때와 같이 하얬다.
불긋한 자국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다행이다........
.. 라면서도 내심 아쉬워하는 준수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왜 이러지?
"사랑해."
작게 속삭이며 준수를 안아버리는 유천.
옅은 숨결이 그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래!! 그냥 이대로 키스를!!!
"내 집이야."
화들짝 놀라서 그만 밀어내 버렸다.
.. 그래. 저 새끼 집이지. 민폐 끼쳐서는 안 돼지.
"폐 끼치고, 오해받게 하고.
여러가지로 미안했어."
"아냐. 술 먹자고 한건 난데 뭐."
말만 그런거 뻔히 다 보여 샵새꺄.
"그럼 우리 먼저 갈게."
"엉. 집에서는 니 마누라 많이 이뻐해 줘.
여기는 사양이지만."
"쿡쿡, 알았어."
장난기 어린 웃음을 던지며 유천이 준수의 손을 잡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푸른 하늘은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왔다.
눈이 시리다는 표현을 제대로 체험한 느낌에 기분좋게 심호흡했다.
"... 아까 있잖아."
"응?"
"윤호랑 둘이서 침대에 있는 너 봤을때,
놀라다 못해 화나다 못해, 급속도로 슬퍼졌었어."
"......"
"그리고 ........."
유천이 준수의 입술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 내린다.
그 다음 말이 너무나도 아프게 준수에게 다가왔다.
"무서웠어."
"........"
"너를 잃은거 같애서."
"... 저기......"
"그렇게 한순간에 떠나가 버릴 거 같애서 두려웠어."
"... 바보같이."
옅게 웃으며 유천을 꼭 끌어안는 준수.
멋진 사람. 그리고 불쌍한 사람.
나밖에 바라볼줄 모르고 사랑할줄 모르는 바보같은 사람.
박유천, 나도 너 아니면 없다.
김준수는 박유천 아니면 없어.
정말로 사랑해.
많이.
".. 그 애, 귀엽더라."
"누구? 너?"
"모르는 척 하긴."
창민도 가고 난 오피스텔에서
재웅이 흥얼대며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윤호는 아직도 TV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씨발.어우.
토요일 점심때는 재방송밖에 안한다니까.
저녁때야 좀 볼게 있지 ..... ..심심하다."
"나랑 잘래?"
너무나도 태연히 그 말을 건네는 재중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리모콘을 쥔 팔을 축 늘어트리더니 간단히 한 마디를 던진다.
"아니."
"왜에? 심심하다며."
"난 낮에는 안 자."
"까다롭다."
"낮은 활동하라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활동 하자구."
"그런 거 말고.변태새끼."
"쳇."
입을 비죽이며 의자에서 내려와서는 태연히 옷을 갈아입는다.
"근데 준수는 왜?"
"얼씨구 언제부터 준수야."
"어제부터."
"우리 준수 아닌게 다행이네.
너 걔 맘에 들어하나 보더라?"
"귀엽잖아."
"나는?"
"넌 귀엽지는 않아. 섹시하다면 모를까."
"풉..."
장난스레 키득대고는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고 와서
윤호의 볼에 살짝 입술을 갖다댄뒤 일어서는 재중이였다.
"나 간다아."
"응. 조심해.. 요즘에 납치범 많다니깐."
"납치라 ..그렇게 걱정돼면 데려다 주지?"
"미안. 오늘은 귀찮네."
"흥, 웃기네. 준수라는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찬 거 아니고?"
"채워볼까?"
"됐어어. 나 진짜 간다. 안녕."
짧게 안녕.-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널브러져 버리는 윤호였다.
준수라는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찬거 아니냐고?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정말 아니야.
그냥 흥미있는거지 생각으로 가득 차있지는 않아.
그렇게 따지면 박유천이 훨씬 가깝게 다가와.
김준수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
박유천이면 박유천이지 절대 아니야.
김준수에게 그러는 건
고작해야 질투 정도밖엔 지나지 않아.
첫 팬픽입니다.
이모티콘 없는 건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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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8 22:58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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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아악 정말 재밌게 봤어요 ;; 그런데 준수가 좀 욕을 ... 좀 낮설긴 했찌만 ㅎㅎ 다음편기 기대대요^^!
와아 감사합니다 /ㅅ/
꺄 ㅜㅜ 정말 재밌당 ㅋㅋㅋㅋ 준수 완젼 귀엽네요 ㅜㅜ ㅋㅋㅋ 개개인의 개성을 살린 ㅜㅜ 넘 부럽다 ㅜㅜ 재밌어요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