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장지립의 [고구려 풍속연구]는 현재까지 중국학계에서 나온 고구려 풍속에 대한 가장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연구는 고구려 풍습을 중국 풍습과 비교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일찍이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문화사』라는 책이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고구려 문화 관련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다. 그 근본원인은 고구려 문화 연구를 위한 기본자료인 고분벽화 자료가 북한과 중국에 산재하여 있어 이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90년대 들어와서 고분벽화 자료들을 하나씩 접근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때에 장지립의 『고구려 풍속연구』가 국내에 번역 소개되는 것은 고구려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또한 고구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구려 내부의 사회상을 쉽게 알게 해주는 그의 연구는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갖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이미지는 강력한 국가였다는 것, 말타고 싸움을 잘하면서 만주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머리모양을 하였고, 어떠한 춤과 음악을 즐겼으며, 어떠한 주택에서 살았는지, 또 어떤 신앙과 장례습속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놀이를 즐기면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장지립의 [고구려 풍속연구]는 명쾌한 답변을 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중국인의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이 되어 있다. 그의 설명에서 몇 가지는 중국인의 편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최소한 우리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고구려 풍속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식생활 등 몇 몇 부분이 빠져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적 설명이 있어야 고구려 전체 풍속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대부분 생략) (주요 문제점 정리)
1. 기본시각에서 문제점 - 중국인의 입장으로 중국의 변방민의 습속으로 고구려 풍속을 연구하려 함
2. 고구려에 대해 처음부터 낮은 문화단계를 지닌 종족으로 보려는 시각
3. 풍속연구에서 중요한 음식문화가 없고, 무덤의 양식 등은 지나치게 깊이 들어감.
※ 춤, 음악, 문학 등에서는 대단히 잘 된 설명을 하고 있다.
4. 복식부분에 있어서 중국과 연계성에 신경씀. 연대상의 오류가 보임.
안악3호분의 묘주 좌우의 시녀의 머리인 높은 머리가 북조에서 처음 시작하였다는 것 - 연대가 잘못임. 안악3호분의 연대가 북조보다 빠름
5. 여자가 절풍을 썼다는 것 - 받아들이기 어렵다. 절풍을 쓴 것은 남자라고 봐야 한다.
6. 남자가 치마를 보편적으로 입었다는 것에 대해.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동북아 민족의 기본적인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국과의 연계성만을 강조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 남자들 가운데는 승려나 도사 등이 입었고, 도포 등의 겉옷으로 행사시에만 입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 기본 복식은 바지다.
7. 고구려의 혼인풍습에 대해 - 원시 모계사회의 대우혼이라고 보는 입장.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생활기반의 차이로 인식하여 한다. 또 고구려의 결혼풍습이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처제 풍습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아주혼인과 연계성은 더 더욱 불가능한 비유이다.
8. 동대자 유적에 대하여.
동대자 유적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주택이라는 입장이 있다. 상반된 입장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의 입장도 중요한 입장으로 볼 수 있다.
9. 고구려 성에 대한 설명
고구려 성의 독특한 발전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하다. 고구려 독자적인 척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하고 있고, 고구려에서 개발한 옹성, 치, 여장 등에 대한 확실한 설명이 부족하다.
10. 고구려 벽화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고구려 벽화의 소재를 중국의 영향으로 보려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
당시 남북조 시대의 벽화와의 일대일 비교를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또한 고구려만의 독특한 발전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6-7세기 벽화는 더더욱 고구려가 발전하고 북조의 벽화가 미비했다. 몰골법, 습지벽화 기법등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사람을 자연보다 크게 그리는 6조 산수화의 특징을 받았다는 것도 잘못이다. 이것은 당시 고대 화법에서 일반적인 특징을 이야기 한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화법에서 먼저 탈피하여 동양 산수화의 전통을 수립한 것은 고구려였다.
명암에 따른 입체감, 색채를 통한 입체감. 원근법. 공간 구성 능력 등 여러 면에서 당시 중국의 평면적인 벽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계에 와있는 고구려 벽화를 너무나 평가 절하하고 있다.
복희, 여와, 신농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도가사상은 동방이 먼저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다.도가는 동방의 샤마니즘의 전통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견해도 최근에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11. 수레생활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다. (** 참고로 이 논문은 내가 "고구려 수레에 대하여" 백산학보 53집, 1998년 을 발표하기 이전에 나왔다)
12. 고구려 종교에 대해서 삼교를 수입했다는 식의 발상은 문제다.
유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며, 불교는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며, 도교는 오히려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고구려 고유종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머리를 깍았다고 반드시 불교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벽화 천장에 그려진 여러 신선들의 모습에서 고구려 고유종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13. 고구려를 고구려 자체의 역사로 보려는 노력보다는 중국과 어떻게 하면 같을까를 찾는데 치중함으로써 고구려적 요소를 희석시키는 면이 지나치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