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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분쟁
이슬람교의 수니파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서는 순니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모범(순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 다시 말해서 수니파 빼고는 모범을 안따르는 나쁜 사람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이런 구별의 뜻을 가진다
이슬람에는 두 가지 정전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시다피시 쿠란이며, 두 번째로 중요한 정전으로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전승록인 하디스(Ahadith)를 들 수 있다. 이 하디스가 뭔지 이름이라도 알아야 수니파와 다른 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데 우선 첫번째로 이 교파는 이슬람의 교리와 관련하여 하디스에 바탕을 둔 근거가 없다면 인정하지 않는 고증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니파는 시아파와 함께 이슬람교의 양대 종파이며,[1] 이성을 통한 개인의 추론과 유추를 강조하는 시아파와 달리 하디스의 근거를 바탕으로 확립한 체계로 하위 파라고 볼 수 있는 4대 법학파 역시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다.
4대 법학파로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한발파, 수니파 중에서 비교적 이성적, 철학적 사유를 중시하고 인정하는 하나피파, 무함마드의 언행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교우들의 언행에도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법학의 근거로 삼는 말리크파, 무함마드의 언행에서 참고할 수 없는 부분은 이성과 추론이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하나피파와 한발파의 절충격이 되는 샤피이파를 들 수 있다.
7세기 이슬람의 대분열 때 시아파가 알리와 그의 후손들만을 진정한 칼리파로 추종하면서 발생하였다면, 수니파는 공동체에 의해 선출된 칼리파면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런 주장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 칼리파 지위는 대체로 수니파가 독점했으나, 몽골의 바그다드 침공 당시 칼리파가 살해당하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파 자리를 겸임해오다 1924년 터키 공화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시아파의 교세가 주로 이란, 바레인, 이라크 남부 등 페르시아 만 주변국에 집중되어 있다면 수니파는 그야말로 세계구급.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칼리프들이 머물렀던 도시가 있는 나라인 이라크, 시리아[2], 이집트, 터키는 물론 카자흐스탄 같은 중앙아시아의 나라, 모로코나 알제리 같은 북아프리카의 나라,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시아[3][4], 유럽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나라도 거의 다 수니파를 추종한다.
[1] 사실 이 두 교파 외에도 자잘한 교파가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호칭하도록 한다.
[2] 단, 시리아와 레바논에는 시아파나 다른 교파도 꽤 있다.
[3] 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를 제외한 나머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 국가들이다. 그나마도 필리핀만 기독교이니까 대부분은 불교나 유교계통이라고 보면 된다. 인도네시아 인구가 엽기라서 그렇지
[4]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한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와 달리 인도네시아는 국교가 이슬람이 아니다.
이슬람교의 시아파
알리빠
이슬람교의 종파 중 하나.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르면 '쉬아'이다. 영어로는 Shia Islam, Shi'ite('~ite'는 '추종자'를 뜻하는 접미사)라고 한다.
수니파와 함께 이슬람교의 주요 종파. 이들은 수니와 달리 꾸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에 하위 종파가 많다. 가장 주류는 12이맘파(이마미야)이고, 그 외에 예멘의 자이디야파, 과격한 이스마일파[1] 그리고 시리아의 알라위파(알라위테) 등이 있다. 또한 이들은 최고 지도자는 반드시 무함마드의 정통후손이어야 한다는 원리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칼리파를 어떤 위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니파는 예언자는 무함마드로 끝이 났으며, 칼리파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일뿐이라고 간주했던 반면에,[2] 시아파는 예언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자들이며 칼리프는 이 신의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위라고 생각했던 것. 시아는 칼리파에 신성을 부여한 것이다. 신성이 있으니 당연히 무함마드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칼리파는 이제 없어졌으니 이맘이 이를 대신한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있는 무슬림이면 아무나 될 수 있는 반면에[3] 시아파에서 이맘은 신성의 직위이며 무함마드로부터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무함마드가 무오류의 예언자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이맘 역시 무오류의 인간이 되는 셈.
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사망한 뒤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시아파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 우스만의 뒤를 이어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있던 우스만의 6촌인 무아위야가 우스만 암살에 복수를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알리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크게 잃고 결국 암살당한다.
680년 무아위야가 죽고 야지드가 칼리파에 오르는데, 당시 칼리파는 공동체에서 투표로 뽑히는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습해 버린것. 알리의 차남이었던 후세인은 야지드 반대파의 선봉장이였는데, 야지드는 알리 추종자들의 초청을 받고 가던 후세인을 끔살해버린다.(카르발라 참극)
당시 우마이야 왕조는 이라크를 폭압적으로 통치했는데,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이라크 전역은 후세인과 알리를 지지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들끓었다. 당시 독립을 원하던 페르시아인들도 후세인을 지지하였고, 결국 시아파라는 분파가 결성되게 된다.
칼리파 시대부터 수니파에 대항해서 해방전선 같은걸 만들어서 우마이야 왕조 시대가 무너지는데 크게 일조를 했으며 언젠가 개종한 시아파 중에 새로운 예언자(마디)가 강림할 것이라는 구세주신앙 비슷한 것이 있기에 무려 천오백년간 수니파에게 탄압당하면서도 아직도 끈질기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다. 시아파로서 수니파인 척 가장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교리 덕분이기도 하다.(타끼야)
시아파가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던 것은 우마이야 시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을 잘 이용한 덕. 시아파는 '개종자중 구세주 강림설'을 퍼뜨리며 개종자들에게 큰 선교 효과를 가지고 왔다. 8대 칼리파 우마르 2세의 3년의 선정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많이 타파됐지만 쉽게 바뀌는게 아니라 시아파는 그 틈을 이용해 세를 꾸준히 불렸다. 결국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건 성공했지만 뒤이은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답습해 더 쎈 수니파 제국을 건설해버렸기에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동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시아파는 소수로 활동하면서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꾸준히 발휘하곤 하였다. 압바스 이슬람 제국은 중기에 시아파 맘루크들에 의해 통치된 적이 있으며, 이집트에 세워졌던 파티미 칼리파조는 시아파가 주도하여 건설한 왕국이었다. 현대 이란의 시조, 대한민국으로 치면 조선 격에 해당하는 사파비 왕조는 시아-수피 교단에서 출발한 이맘 가문이었다(…).
정치적 이유로 분리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대표적인 차이가 상속론(al-wasiya)인데,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는 것. 이 전통에 따라 시아파의 이맘은 선임자의 유언에 따라 선출된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알리의 지위가 무함마드와 비교해 다를것이 없으며, 알리는 무오류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시아파의 사상을 닦은 자는 예멘 출신 학자인 압둘라 이븐 싸바 알 야흐디인데, 야흐디는 상속론의 이론을 재정비하는 한편, 재림론(al-rajah)을 주장했다. 무함마드가 알리로 재림했다는 것. 이 재림론은 시아파의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이들의 분파인 12이맘파의 경우에는 구세주가 돌아와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차이가 있어서 수니파는 시아파를 "이런 이단 새끼들!!" 하면서 이를 갈고 시아파는 "저런 덜 떨어진 꼴통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실정.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다 보니 현재 시아파랑 수니파는 서로보다 기독교 계통인 가톨릭과 더 친할 지경이다.
사실 이슬람 전체로 봤을 때 시아파의 숫자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단 국제사회에서는 수니파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세계구급 화제를 자주 몰고다니는(…) 이란이 시아파가 득세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실 뜯어보면 수니파도 비슷하지만 시아파가 특히 과격하다고 알려진 것도 이런 국제사회에 자주 나오는 병크테러를 주로 시아파가 일으켰기 때문. 물론 태생적인 교리 때문에 시아파가 더 과격 노선을 탈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군의 전차를 잡기 위해 어린애들에게 자폭돌격을 많이 시켜서 유명해졌다.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였기에 이라크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 시아파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학살한 것 때문에 결국 은둔하고 있던 곳을 시아파 무슬림이 찔러서 체포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후세인이 사형당한 날, 시아파는 열렬히 환호하고 수니파 원리주의자들은 자폭테러를 결의하는 등, 한나라에서도 이 정도로 극하게 여론이 갈린 이유는 다 이 종파 싸움이 원인이다.
그리고 후세인 사형에 관련된 에피소드로, 후세인이 사형을 선고받은지 단 4일만에 집행되는 이례적인 일이 있었는데 앞뒤 다 자르고 말하자면,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시아파였기 때문(…). 일단 이 사람들은 미국 못지 않게 후세인 죽이고 싶어서 벼르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이목과 상관없이 2일 뒤에는 사형 못 시키니까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는게 이유라고 한다. 참고로 사형 집행일은 12월 30일이었고, 그 이틀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하루 더 시간이 있었지만 31일에 처형하는 것은 시아파들이 봐도 지나치게 가혹하니[4] 그 전날로 결정한 셈.
한마디로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다녔거나 재판 절차를 최대한 이용했으면 살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포기하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의 악행에 비해 관용을 베푼 게 되면서 그만큼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혀지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
빠르게 사형시킨 게 미국의 사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오히려 미국은 후세인을 죽여버리면 '성자'가 될 거라면서 반대했다. 그리고 후세인을 죽이고 나서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1] 이 종파에는 니자르파라는 분파가 있는데, 이들이 그 유명한 암살단파, 즉 어쌔신이다.
[2] 당연히 꾸란을 해석하거나 법적 판단을 할 권리는 없었다.
[3] 직위라고 할 것도 없다. 예배의 인도자일 뿐이며 혼자 예배할때는 스스로가 이맘이 된다.
[4] 다음날 집행이면 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자.
수니파 대 시아파의 대립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후계자 문제뿐 아니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그 외의 민족간 감정도 포함된 복잡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 세계에서는 대부분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인 것에 비해 이란과 그 주변 국가들에 시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기독교 교파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분파가 300개 이상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기독교보다는 적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이슬람교는? 물론 이슬람교에도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그래도 기독교나 불교에 비하면 그 수가 매우 적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문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슬람교의 가장 큰 분파는 수니(Sunni)파와 시아(Shi’ite)파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교도가 극히 드문 우리가 이 두 파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아랍 세계가 세계의 관심 지역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이슬람교의 주요 파지만 그 외에도 수피즘(Sufism)이라 불리는 신비주의적 신앙도 이슬람교의 한 형태이고 하와리즈파(Khawarij)라는 강경한 파벌도 존재한다. 또 이스마일(Izmail)이라는 6대 칼리프(caliph)의 둘째 아들을 따르는 파도 소수지만 존재하고 그 외에도 여러 파벌이 활동 중이다.
수니파는 현재 이슬람교도의 약 85~90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파로서, 스스로 정통파라고도 부른다. 마호메트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칼리프라고 불리는 이슬람 공동체의 통치자를 마호메트의 합법적 후계자로 인정한 파다.
반면에 시아파는 4명의 칼리프가 아니라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는 마호메트의 자손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후계자 문제뿐 아니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그 외의 민족간 감정도 포함된 복잡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아랍 세계에서는 대부분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인 것에 비해 페르시아인이 주류를 이루는 이란과 그 주변 국가들에 시아파가 많이 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니파는 정통파라고 자신들을 칭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형식을 채택했으니, 외국인 칼리프까지 허용했다. 또한 새롭게 이슬람교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관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등 새롭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반면에 시아파는 초기에 이슬람교도의 공동체적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파벌로 시작해 훗날 종교적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세속적으로(다른 말로는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데 반발하는 독실한 신자들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던 비아랍계 이슬람교도, 즉 마왈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과 그 외의 몇몇 지역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아파는 세계 이슬람교도의 10~15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