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변증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양비론이나, 양시론은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된다고 하시면서 ,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타 부타 자기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하시더군.
균형을 잡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다른 한 쪽을 편드는 일이 꼭 옳지는 않고, 어떨 때는 약자든 강자든 편을 들어야 한다고...
또한 변증법의 묘미는 중간지점이나 평형지점이 아닌 새로운 제 3의 샛길이나 출구나 방향이나 차원을 찾는데 있다고 하셨지.
이분법적 사고라 함은,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의 다양성은 차지하고서라도, 그것이 여러사람에게 여러 언어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언어로 인해서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분법적인 사고는.. 글쎄.. 덥거나, 차거나 하지 않으면, 또한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 될 수가 있으니.. 비 이분법적인 사고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아.
헤세의 데미안은 나도 포기했었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더라. 다시 도전해 볼지는 모르겠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즐겁게 읽었었다. 데미안, 다시 같이 읽어볼까? 뭐, 내성이 생기는 것은 별로지만, 면역력이 길러질 수도 있지 않을까?
: [20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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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린 에세이,<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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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다 알아 버린 사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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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부에서 솟아 오르는 목마름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적 관조에 의해서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p108> 그나마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큰 목마름을 주체할 수 없어, 자살한 것이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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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이 세상살이가 대단하지(fancy) 않다는 것. (C.S.Lewis는 순전한 기독교의 '소망'장에서 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정말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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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평소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 중의 하나가 '여자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수필 모음인 이 책을 읽다보면 쉽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다. 남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그리고 자신의 외모와 여성성을 통해서만 남들에게서 인정받으려 하는 여성들을 대체로 경멸하고 있다. 나도 그런 여자들이 중년이 되었을 때는 정말 추하리라고 생각해 본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라고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생의 한가운데'에 대한 해설은 정말 맘에 든다. 역시 번역자가 작품을 가장 잘 안다. 좋은 작품을 번역할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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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 작품에 대한 해설도 있다. 글쎄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난 헤세가 왜 <위대한 작가>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중학교 때 <수레바퀴 아래서>는 정말 좋아했었다. 하지만 <데미안>을 읽다가는 도저히 계속 읽을 수 없어 중단한 경험이있다. 그후 다시는 읽으려 하지 않았다. 해설을 통해 줄거리만을 다시 읽는 것이었는데도 더러운 손이 내 뇌와 심장을 훑은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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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sse를 내게 정의하라 하면, <교묘하게 악마적인 작가>라 정의할 것이다. 그는 웃기는 거짓말 쟁이이다.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여 헛된 완성으로 향하게 하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걸려들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안타깝다. 무엇이 정말 옳은 것이고, 어떤것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what is really right/what he just thinks right)정확하게 분별해 내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그저 그럴 듯하기 때문에, 또는 자기가 믿고 싶기 때문에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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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는 이분법적 사고를 배격한다. 그러나 이분법은 반드시 나쁜 것일까? 물론 모든 일에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 때도있다.
: 복잡한 인간사의 현상 속에서 100% 그렇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