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준 삶의 면허증
-강경경찰서 습격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이기식
갑자기 아버지께서 삼촌과 같이 어디서 손수레를 구해오셨다. 그리고 바쁘게 물것들을 싣기 시작했다. 내 키보다 높게 쌓였다. 그리고 한강철교가 파괴되었으니(6월 28일) 뚝섬 부두로 가자고 하였다. 뚝섬에서 봉은사를 지나 수원 쪽으로 길을 택한 것 같다. 삼촌, 사촌형, 큰어머니와 같이 움직였다. 창신동을 6.29나 30일 출발해서 보름 만에 충청도 강경에 도착했다.
피난길에서는 길옆의 적당한 곳에서 수제비를 주로 해 먹었다. 수제비도 밀가루에 밀 껍질이 섞여 있어 벌겋게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지 그때는 그게 당연히 먹어야 할 음식인 것 같아서 오히려 맛있게 먹었는데, 피난 후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큰 집은 좋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먹는다'라는 말을 듣고 좋은 수제비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공습이다!'라고 어디선가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면, 피난 행렬에 있던 모든 사람은 길가의 도랑에 뛰어 들어가 엎드린다. 길에는 순식간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 궁금해서 살짝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경비행기가 날아가다가 방향을 바꿔, 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우리 쪽으로 온다. 겁이 난다. 다행히 총을 쏘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도 몇 번 보았다. 비행기에서 기총소사했다고 한다. 기총소사란 말이 신기했다. 그 비행기가 인민군 비행기였는지, 혹은 우리 측 비행기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찰기인 것으로 보아, 우리 비행기를 보고 놀랐던 것 같다. 인민군의 소련제 야크 전투기라면 사격을 했을지도 모른다.
공주도 거쳐서 온 모양이었다. 절벽을 지날 때였던 모양인데, 어머니가 굉장히 무서워하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시자,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인가 양산을 내밀면서 꼭 잡으라고 하면서 끌어드렸다고 한다. 그때가 다섯 살일 텐데, 나도 꽤 제법이었던 모양이다.
강경에 도착하기 전에 큰 이모 댁에 하루인가 들렸다가, 강경에 도착하였다. 멀리서 외할머니 손 흔드는 모양이 보였다. 상당히 작다고 생각하였다. 보름여에 걸친 피난 생활의 끝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보니, 그해 7월 12일서 15일 사이에 도착한 것 같다.
외할머니댁은 아주 컸다. 강경 출신 소설가 박범신 씨의 문학비와 소설 『소금』에 나오는 '옥류봉'의 바로 밑에 있는 '북옥동'이다. 그 집 옆으로 해서 옥류봉과 봉수대로 올라가는 층계가 시작된다. 몇 번 놀러 올라간 기억이 있다.
그 집에서 지내긴 지냈는데, 집이 크고 기거하는 방이 바로 산 옆구리인 절벽 밑이라 어둡고, 음침하고 게다가 까치까지 온종일 깍깍거려 좀 무서웠다. 마침 외할머니가 한 십 분 거리인 강경 경찰서(지금의 논산경찰서)의 오른쪽 담과 붙어있는 집에서 무슨 가게를 했었기 때문에 그곳에 자주 놀러 가서, 가끔 자기도 했다.
그날도 그곳에 있었다. 저녁때쯤인가, 외할머니가 '큰일 났다!'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하실 줄을 모르고 계셨다. 저녁나절이 되었을 때, 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철교 쪽에서 '와, 와'하는 사나운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지붕 위쪽에 있는 경찰서 담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거의 밤새도록 나는 것 같았다. 양철로 된 지붕으로 무언가 계속 '툭, 툭' 덜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탄피 떨어지는 소리였다. 외할머니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 못하고 총소리만 듣고 있었다.
조선일보 2010년 7월 17일 자 신문을 보고 그때 사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기사의 일부다.
<6·25 전쟁 당시 '논산경찰서 전투'를 아십니까? 피란 안 가고 사수하다 경찰 83명 전사>논산경찰서(옛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은 6·25 전쟁 때 피란 가지 않고 인민군에 맞섰다. 중화기로 무장한 2,000여 명의 인민군이 경찰서를 포위해도 저항은 계속됐다. 18시간의 전투가 끝나고 220명의 경찰관 중 서장을 포함해 83명이 숨졌다. 6·25전쟁때 단일 전투로 희생된 경찰관 규모로는 컸다...
아침인지 언젠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나, 마당에 나와보니 탄피가 수두룩했고, 지붕에도 많이 있었다. 다 한곳에 모아 놓았다. 그때 엿장수들은 이런 것을 갖다주면 엿을 많이 주었다. 앞길로 나가 보니, 큰 공터의 철삿줄에 죽은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어린 젊은이였다. 옆에 총도 보였다.
며칠 후엔, 경찰서 앞의 식당에서 누가 끌려 나오더니,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얻어맞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보였다. 동네 어른이 나를 막고 서서는 얼른 집에 가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끌려가는 사람의 바지만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보였다. 국방색의 당꼬바지였다. 허벅지 쪽은 넓고, 정강이 쪽은 폭이 좁은 독일이나 일본군의 복장 같은 것이었다. 며칠 전에 경찰서를 어제 습격한 인민군 중 하나였는데, 도망가지 못하고 숨어있다고 한다. 경찰서의 형사 한 분이 그곳에 점심을 먹으러 매일 다녔는데, 그때마다 그 집 아줌마가 골방으로 식사를 나르는 걸 보고 이상해서 조사했다고 한다. 그 식당도 인민군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문을 닫았다.
얼마 후엔 외할머니에게 나쁜 소식이 들어왔다. 피난 올 때 들렸던 큰이모네 댁 모두가, 인민군들인지 동네 사람들인지 모르나,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당시 이모부는 그곳 경찰서장이었고, 큰이모, 아들, 그리고 딸 둘이었다. 그곳에 들렀을 때 얼굴을 보았다, 어린 눈에도 잘생긴 형, 누님들이었다. 누님들이 단감을 따 주기도 했었다. 외할머니는 그 이후로 계룡산에 절을 짓고, 거의 그곳에서 사셨다.
다음 해(1951),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학부모들이 모인 곳에서 나를 보고 손짓을 하시면서 웃으시는 게 보였다. 쑥스러웠다. 나 혼자 와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한 해 동안에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던 것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몸에 스며들어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형태의 것이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짐작만 한다.
초등학교 기간(1951~1957)은 여름방학 몇 번 보내고 나니 끝나고 만 기분이었다. 방학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여름방학 소제 당번일 때, 청소를 끝내고 학급 서가에서 어린이용 소설책, 『보물섬』, 『삼총사』와 『톰 소여의 모험』을 슬쩍 가져가는 것을, 담임 선생은 못 본 체하시면서, '수고했어, 숙제 잘해' 하시면서 배웅해 주셨다.
문방구에서 잉크병을 훔쳐 주머니에 넣었다가 모서리에 부딪혀 잉크로 옷을 적셔 어쩔 줄 모르자 주인이 뒤로 데려가 잘 닦아주고는 가라고 하면서 새 잉크를 쥐여 주었다.
또, 한여름에 벗은 옷을 머리에 묶고서 금강을 헤엄쳐 건너가, 건너편에 있는 수박밭에 들어가, 몰래 서리를 하다가 주인에 걸려서 원두막으로 끌려가서는, 네가 훔친 것이니 다 먹고 가라는 바람에 배가 통통해질 때까지 먹고 쫓겨왔다. 올 때는 배가 통통해서 헤엄치기가 쉬웠다.
강경역 앞에 미군들이 오면, 쫓아가서 '기부 미 쵸코렛, 기부 미 츄잉 감'하면서, 미군 손에 있는 것을, 라오스나 태국의 원숭이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채서 도망간다. 거기서 어슬렁거리다간 다른 아이들한테 다 뺏긴다.
그리고 여름방학만 되면, 외할머니가 세운 계룡산에 있는 보광원('신원사'의 위쪽)에 가서 그 절 주지 아들과 계룡산 계곡을 돌아다니거나, 법당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여름방학은 항상 짧았다. 방학 숙제는 항상 개학 전날에 대강 끝내곤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으면서 유년기를 끝내고 소년기에 들어갔다. 인간은 열 살에서부터 열두살 사이에 본인 정체성에 관하여 뇌가 형성된다고 한다. 그 시절을 지낸 공간, 환경이 그의 일생의 고향이 된다. 벌써 칠십여 년 전 이야기지만, 장차 다가올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중에 처음으로 유아기에서 소년기로 변하는 경험을 이때 한 셈이다. 6·25전쟁이 나에게 준 '속성 생존경쟁을 위한 면허증'인지도 모른다. 아마 1940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터널을 지났을 것이다. 우리나라 1970년대의 경제 주역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사르트르류의 본질을 위한 실존적인 준비였을 것이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겨울, 서울로 왔다. 떠나가는 기차의 맨 뒤 칸에 나와서 집으로 가기 위해 철로를 건너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네 명의 동생들의 실루엣을 보며, 처음으로 헤어짐이 슬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23-04-06]
<수필과 비평 v260, 2023-06>
한국산문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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