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동진레저와 전속 후원계약을 한 오은선은 2010년까지 8000m 14좌를 모두 오를 계획이다. 그는 지난 3월 17일 로체와 마칼루 등반을 위해 출국했다.
앞서가는 사람은 고독하다, 그래서 그녀는 울었다. 또 그녀는 웃었다, 봄볕 내리는 날. 나는 마르크스 이후 가장 완벽한 혁명가요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불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여인 로자 룩셈부르크에 빗대고 싶었으나… 외골수,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그녀’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해지지는 마시길. 그가 울었거나 그가 웃은 것과 하등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그 한 글자 차이에 녹아있는 이 세상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 쿡쿡 찔러나 본 것이니. 한국여성에베레스트 원정대원, 한국 여성최초 7대륙최고봉 완등, 한국 여성최초 에베레스트 단독등정, 한국 여성최초 K2 등정, 8000m 14좌에 모두 오른 첫 여성이 되기 위해 등반 중…. 그와 인터뷰하기 며칠 전, 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쭉 검색해 보니 열에 아홉은 그 이름 앞에 ‘여성 산악인’ 또는 ‘女’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녀’와 ‘그’를 반반쯤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성별을 표시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인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후자라면, 과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와 그녀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오은선은 우리 사회에서 그로 존재하는가 그녀로 존재하는가. 흔히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오척단신에도 불구하고’ ‘마흔 두 살의 미혼 여성이’ 홀로 어딘가를 올라갔다는 것이 여전히 눈길을 끄는 뉴스이어야만 한다면, 아직 우리 사회의 시선은 더 여물어야 하며 ‘여성 산악인’ 오은선은 숱하게 더 담금질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동진레저와 후원계약하며 2010년까지 14좌 목표 오은선이 3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서울 용마산 아래서 만났다. 언젠가 그에게서 평소에 운동 삼아 용마산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384m의 낮은 산봉우리와 155cm인 그의 작달막한 키가 사뭇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다람쥐. 수원대산악부에 들어 인수봉에 올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지녀온 별명처럼 그는 환한 웃음을 띠고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전엔 거의 매일 다니다시피 했는데 요샌 용마산엔 잘 못 가고 아침마다 요 앞 체육관에 운동하러 다녀요. 다리운동도 하고 주로 유산소운동으로 폐활량 키우고 그런 거.” 어릴 적 아버지와 북한산에 올라 인수봉을 본 이후 줄곧 산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산악부에 들고 싶었으나 여학교엔 그런 게 없어 결국 대학에 와서야 실현됐다. 오은선은 수원대학교산악부 2기다. “인수봉을 처음 보곤 무서워서 선배들이 바위는 안 해도 된다기에 첫 산행에서는 하루 종일 텐트만 지켰어요. 그런데 하도 심심해서 두 번째부터는 같이 바위 하고 싶다고 해서 인수A코스로 올라갔죠. 그때 느꼈던 환희는 정말 말로 다 못해요. 펄쩍펄쩍 뛰면서 산을 내려왔으니까.” 오은선을 만난 건 로체와 마칼루 등반을 위해 출국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는 얼마 전 (주)동진레저와 전속 후원계약을 맺으며 목표인 8000m 14좌 등반에 가속이 붙었다. 이미 8000m봉 5개를 오른 그는 올 봄에 2개를 시도하고 여름에는 가셔브룸1봉과 브로드피크를 시도하는 등 꾸준히 밀어붙여 2010년까지 완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작년 9월부터 같이 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아직 국내에서는 여성 산악인에 대한 전속 스폰서가 흔치 않은 일이라 회사에서도 어떤 기준으로 진행해야 할 지 생각이 많았나 봐요. 저야 등반 비용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뜻대로 등반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하죠.”
30년 넘게 용마산 아래서 살아온 오은선은 어느새 동네에서 유명인이 되어있었다. 찾아간 식당 아주머니는 그가 나온 신문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행복. 산쟁이가 마음껏 산에 가니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을까. “첫 히말라야 원정인 93년 여성에베레스트 원정 때가 아무래도 기억에 가장 남죠. 순수하게 여자들끼리 세계 최고봉을 오르겠다고 하니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았어요. ‘택도 없다’는 거였죠. 선배가 알려줘 대원에 지원해 선발되기는 했는데, 막바지 출국을 앞두고는 매일 퇴근 후에 합숙소에 와서 짐 싸고 회의하고 새벽 두세 시에 집에 가서 다음날 출근하고 그런 생활을 6개월여 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첫 고소경험도 머리 아프고 무기력하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히말라야 등반일거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오은선은 3캠프까지 올랐다. 이미 1차 공격조가 등정에 성공한 뒤였다.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우스콜까지는 올라 8000m를 겪어보고 싶었지만 대장은 하산을 지시했다. “당장 내려오라고 했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게 팀 분위기였어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할 정도로 지현옥 대장은 엄했어요. 하행카라반 중 대원들 사이에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대장은 대원의 부모’라고 말했던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거대한 흰 산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스물일곱 살 오은선의 등 뒤로 ‘한국 여성 세계정복’류의 무수한 스포트라이트가 터졌을 터. 하지만 그 빛과 그림자에서 오은선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완벽한 ‘프로’ 원하지만 초심 잃고 싶지 않아 “그때 사진들을 보니 제 표정들이 너무 어둡더라고요. 항상 화난 사람 같았어요. 제 눈높이에 맞는 산에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3년 뒤 후배들과 알프스 몽블랑을 오르기로 했죠. 정상에 다녀올 때 어떤 외국 산악인은 저를 보고 ‘꼬마가 기특하다’고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그걸 계기로 산에 대한 열정이 다시 되살아났죠.” 96년 알프스를 다녀온 그는 이듬해 한국대학산악연맹에서 꾸렸던 가셔브룸 1·2봉 원정대에 합류한다. 박영석씨의 8000m 14좌 과정 중 하나이기도 했던 등반에서 오은선은 첫 번째 8000m 등정에 성공한다. “가셔브룸 2봉을 등반할 때 마지막 캠프에서 너무 춥고, 가기 싫고 미치겠더라고요. 그래도 다들 채비를 하고 나서는데 ‘앞 사람 발뒤꿈치가 안 보이면 내려가자’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따라나섰어요. 그런데 그 뒤꿈치가 계속 눈에 들어와있는 거에요. 정상에 거의 다다라서 영석 형이 ‘힘든 사람?’하고 묻기에 손을 들었더니 제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올라갔죠.” 이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K2를 박영석씨와 함께 다녀왔지만 정상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연이은 원정등반에서 그는 고산의 비정함도 겪어야했다. 세 원정에서 모두 대원과 셰르파의 사고를 겪은 것이다. 지난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는 등반 중 박무택씨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그 이후 한동안 오은선은 가슴을 치며 속울음을 해야 했다. 그가 박무택씨의 시신을 두고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두고 세상의 뒷말들은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접한 오은선은 셰르파들에게 장비와 산소를 내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곧 손을 들고 돌아왔다. 함께 있던 백준호씨는 견디다 못해 홀로 수색에 나섰지만 그도 돌아오지 못했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오은선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스스로 낙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담담히 감당할 만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 사고가 났을 땐 아직 히말라야 등반관이 정확히 확립되어있지도 않았고,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만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어요.” 이제는 히말라야 등반이 무엇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일까. “인명은 재천이라는 생각이죠.”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그는 첫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사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그가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며 연예인처럼 돈을 많이 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산 다니는 거야 좋지만, 무위도식하며 산밖에 모르는 것도 딱 질색이에요. 지금까지 산 다니며 한 번도 직장이 없던 적이 없었어요. 공무원 그만 두고는 학습지 교사 하고, 마칼루에서 돌아와서는 스파게티집도 차렸었어요. 영원무역 매장에 근무하면서도 월급을 모아서 산에 가려고 했는데, 매킨리에 갈 때 회사에서 지원금이 나오더라고요.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생활비도 안들고 돈 쓸 일이 적어져서 저금도 제법 한 것이지, 아직 노동 없이 산에 다닌 것만으로 돈벌이 한 적은 없어요.” “순수한 알피니즘을 상업화 한다”는 시각에 대해선 어떨까. “운동선수가 광고에 나온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프로’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요. 오히려 저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더 떳떳하고 확실하게 구분 짓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사실 진정한 프로가 뭔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보다 완벽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죠. ‘14좌 레이스’라고들 말을 하는데, 프로는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것이고 그 덕분에 이 정도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 자신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를까봐 산을 대하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전에 엄홍길 선배와 도봉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어, 박영석이다’ 그러고 수군대는 거예요. 엄 선배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네 박영석입니다’라며 공손히 인사를 하더라고요.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 많은 인상을 받았죠.” 혼자 오르는 산은 무섭다 앞만 본다 오은선은 후배가 없다? 그는 7대륙최고봉을 하면서 다른 등반대와 함께 퍼미션을 받기는 했지만 비용절감을 위한 것이었을 뿐 대부분 혼자 짐을 꾸렸다.
오은선은 7대륙 최고봉을 하며 대부분 혼자 배낭을 꾸렸다. 혼자 오르는 산은 때로 무서웠고,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평상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술도 그렇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라서 나와 맞지 않는 생활에 나를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사람과 함께 가는 대규모 원정이나 혼자 가는 원정이나 외롭고 힘들고 때로 절망감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게 핸디캡일 수도 있지만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죠. 주변에 함께 등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에요. 같이 할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가고 싶죠.” “벽등반은 인수봉 다녀온 것이 경험의 전부라서 한번 따라가서 배워보고 싶다”는 그이지만, 지금까지 산에 오르며 쌓은 고산경험들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다. 높이 올라 갈수록 체력소모가 많으니까 최대한 가볍게 해서 빠르게 다녀오는 것이 오은선의 노하우다. 혼자 오르는 산은 무섭다. 매킨리 때도 그랬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드넓은 설원에 서서 오은선은 두려웠다. 이번 로체와 마칼루 등반도 혼자 떠난다. 그래서 사실 매일 매일이 바쁘다. 장비·식량 준비와 포장, 행정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누가 좀 만나자고 하면 시간 내기가 힘들어 미룰 때가 많아요. 사람들은 ‘오은선 많이 컸다’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래요. 성격이 직선적이에요. 저 때문에 상처 입은 친구들도 있다는 걸 주변에서 듣기도 해요. 화가 나면 ‘폭탄’이 될 때도 있죠. 대신 거짓말이나 나를 포장하고 미화하는 건 절대 못해요.”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장비 준비를 위해 차를 몰고 동대문 장비점으로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전 신문에 나온 오은선의 기사들이 왜 매번 같은 이야기뿐인지에 대해 식상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개고기 좋아해요? 갑시다.” 자유로운 영혼의 ‘그 또는 그녀’ 오은선은 세상의 거대한 산을 통, 통, 통 뛰어올랐다.
얼마 전 (주)동진레저와 전속 후원계약을 한 오은선은 2010년까지 8000m 14좌를 모두 오를 계획이다. 그는 지난 3월 17일 로체와 마칼루 등반을 위해 출국했다.
앞서가는 사람은 고독하다, 그래서 그녀는 울었다. 또 그녀는 웃었다, 봄볕 내리는 날. 나는 마르크스 이후 가장 완벽한 혁명가요 불굴의 저항정신으로 불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여인 로자 룩셈부르크에 빗대고 싶었으나… 외골수,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그녀’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해지지는 마시길. 그가 울었거나 그가 웃은 것과 하등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로 그 한 글자 차이에 녹아있는 이 세상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 쿡쿡 찔러나 본 것이니. 한국여성에베레스트 원정대원, 한국 여성최초 7대륙최고봉 완등, 한국 여성최초 에베레스트 단독등정, 한국 여성최초 K2 등정, 8000m 14좌에 모두 오른 첫 여성이 되기 위해 등반 중…. 그와 인터뷰하기 며칠 전, 신문에 나온 기사들을 쭉 검색해 보니 열에 아홉은 그 이름 앞에 ‘여성 산악인’ 또는 ‘女’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녀’와 ‘그’를 반반쯤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단순히 성별을 표시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인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후자라면, 과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와 그녀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오은선은 우리 사회에서 그로 존재하는가 그녀로 존재하는가. 흔히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오척단신에도 불구하고’ ‘마흔 두 살의 미혼 여성이’ 홀로 어딘가를 올라갔다는 것이 여전히 눈길을 끄는 뉴스이어야만 한다면, 아직 우리 사회의 시선은 더 여물어야 하며 ‘여성 산악인’ 오은선은 숱하게 더 담금질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동진레저와 후원계약하며 2010년까지 14좌 목표 오은선이 30년 넘게 살고 있다는 서울 용마산 아래서 만났다. 언젠가 그에게서 평소에 운동 삼아 용마산을 오르내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384m의 낮은 산봉우리와 155cm인 그의 작달막한 키가 사뭇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다람쥐. 수원대산악부에 들어 인수봉에 올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지녀온 별명처럼 그는 환한 웃음을 띠고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전엔 거의 매일 다니다시피 했는데 요샌 용마산엔 잘 못 가고 아침마다 요 앞 체육관에 운동하러 다녀요. 다리운동도 하고 주로 유산소운동으로 폐활량 키우고 그런 거.” 어릴 적 아버지와 북한산에 올라 인수봉을 본 이후 줄곧 산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산악부에 들고 싶었으나 여학교엔 그런 게 없어 결국 대학에 와서야 실현됐다. 오은선은 수원대학교산악부 2기다. “인수봉을 처음 보곤 무서워서 선배들이 바위는 안 해도 된다기에 첫 산행에서는 하루 종일 텐트만 지켰어요. 그런데 하도 심심해서 두 번째부터는 같이 바위 하고 싶다고 해서 인수A코스로 올라갔죠. 그때 느꼈던 환희는 정말 말로 다 못해요. 펄쩍펄쩍 뛰면서 산을 내려왔으니까.” 오은선을 만난 건 로체와 마칼루 등반을 위해 출국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는 얼마 전 (주)동진레저와 전속 후원계약을 맺으며 목표인 8000m 14좌 등반에 가속이 붙었다. 이미 8000m봉 5개를 오른 그는 올 봄에 2개를 시도하고 여름에는 가셔브룸1봉과 브로드피크를 시도하는 등 꾸준히 밀어붙여 2010년까지 완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작년 9월부터 같이 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아직 국내에서는 여성 산악인에 대한 전속 스폰서가 흔치 않은 일이라 회사에서도 어떤 기준으로 진행해야 할 지 생각이 많았나 봐요. 저야 등반 비용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뜻대로 등반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하죠.”
30년 넘게 용마산 아래서 살아온 오은선은 어느새 동네에서 유명인이 되어있었다. 찾아간 식당 아주머니는 그가 나온 신문 기사를 모두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행복. 산쟁이가 마음껏 산에 가니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을까. “첫 히말라야 원정인 93년 여성에베레스트 원정 때가 아무래도 기억에 가장 남죠. 순수하게 여자들끼리 세계 최고봉을 오르겠다고 하니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았어요. ‘택도 없다’는 거였죠. 선배가 알려줘 대원에 지원해 선발되기는 했는데, 막바지 출국을 앞두고는 매일 퇴근 후에 합숙소에 와서 짐 싸고 회의하고 새벽 두세 시에 집에 가서 다음날 출근하고 그런 생활을 6개월여 하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첫 고소경험도 머리 아프고 무기력하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히말라야 등반일거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오은선은 3캠프까지 올랐다. 이미 1차 공격조가 등정에 성공한 뒤였다.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우스콜까지는 올라 8000m를 겪어보고 싶었지만 대장은 하산을 지시했다. “당장 내려오라고 했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게 팀 분위기였어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할 정도로 지현옥 대장은 엄했어요. 하행카라반 중 대원들 사이에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대장은 대원의 부모’라고 말했던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가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거대한 흰 산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스물일곱 살 오은선의 등 뒤로 ‘한국 여성 세계정복’류의 무수한 스포트라이트가 터졌을 터. 하지만 그 빛과 그림자에서 오은선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완벽한 ‘프로’ 원하지만 초심 잃고 싶지 않아 “그때 사진들을 보니 제 표정들이 너무 어둡더라고요. 항상 화난 사람 같았어요. 제 눈높이에 맞는 산에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3년 뒤 후배들과 알프스 몽블랑을 오르기로 했죠. 정상에 다녀올 때 어떤 외국 산악인은 저를 보고 ‘꼬마가 기특하다’고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그걸 계기로 산에 대한 열정이 다시 되살아났죠.” 96년 알프스를 다녀온 그는 이듬해 한국대학산악연맹에서 꾸렸던 가셔브룸 1·2봉 원정대에 합류한다. 박영석씨의 8000m 14좌 과정 중 하나이기도 했던 등반에서 오은선은 첫 번째 8000m 등정에 성공한다. “가셔브룸 2봉을 등반할 때 마지막 캠프에서 너무 춥고, 가기 싫고 미치겠더라고요. 그래도 다들 채비를 하고 나서는데 ‘앞 사람 발뒤꿈치가 안 보이면 내려가자’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따라나섰어요. 그런데 그 뒤꿈치가 계속 눈에 들어와있는 거에요. 정상에 거의 다다라서 영석 형이 ‘힘든 사람?’하고 묻기에 손을 들었더니 제일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올라갔죠.” 이후 브로드피크와 마칼루, K2를 박영석씨와 함께 다녀왔지만 정상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연이은 원정등반에서 그는 고산의 비정함도 겪어야했다. 세 원정에서 모두 대원과 셰르파의 사고를 겪은 것이다. 지난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는 등반 중 박무택씨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그 이후 한동안 오은선은 가슴을 치며 속울음을 해야 했다. 그가 박무택씨의 시신을 두고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두고 세상의 뒷말들은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를 접한 오은선은 셰르파들에게 장비와 산소를 내주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곧 손을 들고 돌아왔다. 함께 있던 백준호씨는 견디다 못해 홀로 수색에 나섰지만 그도 돌아오지 못했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오은선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스스로 낙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담담히 감당할 만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 사고가 났을 땐 아직 히말라야 등반관이 정확히 확립되어있지도 않았고,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만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어요.” 이제는 히말라야 등반이 무엇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일까. “인명은 재천이라는 생각이죠.”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그는 첫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사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그가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며 연예인처럼 돈을 많이 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산 다니는 거야 좋지만, 무위도식하며 산밖에 모르는 것도 딱 질색이에요. 지금까지 산 다니며 한 번도 직장이 없던 적이 없었어요. 공무원 그만 두고는 학습지 교사 하고, 마칼루에서 돌아와서는 스파게티집도 차렸었어요. 영원무역 매장에 근무하면서도 월급을 모아서 산에 가려고 했는데, 매킨리에 갈 때 회사에서 지원금이 나오더라고요.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생활비도 안들고 돈 쓸 일이 적어져서 저금도 제법 한 것이지, 아직 노동 없이 산에 다닌 것만으로 돈벌이 한 적은 없어요.” “순수한 알피니즘을 상업화 한다”는 시각에 대해선 어떨까. “운동선수가 광고에 나온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프로’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요. 오히려 저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더 떳떳하고 확실하게 구분 짓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사실 진정한 프로가 뭔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보다 완벽한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거죠. ‘14좌 레이스’라고들 말을 하는데, 프로는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것이고 그 덕분에 이 정도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 자신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를까봐 산을 대하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전에 엄홍길 선배와 도봉산에 간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어, 박영석이다’ 그러고 수군대는 거예요. 엄 선배는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네 박영석입니다’라며 공손히 인사를 하더라고요.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 많은 인상을 받았죠.” 혼자 오르는 산은 무섭다 앞만 본다 오은선은 후배가 없다? 그는 7대륙최고봉을 하면서 다른 등반대와 함께 퍼미션을 받기는 했지만 비용절감을 위한 것이었을 뿐 대부분 혼자 짐을 꾸렸다.
오은선은 7대륙 최고봉을 하며 대부분 혼자 배낭을 꾸렸다. 혼자 오르는 산은 때로 무서웠고,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평상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술도 그렇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라서 나와 맞지 않는 생활에 나를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사람과 함께 가는 대규모 원정이나 혼자 가는 원정이나 외롭고 힘들고 때로 절망감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게 핸디캡일 수도 있지만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죠. 주변에 함께 등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에요. 같이 할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가고 싶죠.” “벽등반은 인수봉 다녀온 것이 경험의 전부라서 한번 따라가서 배워보고 싶다”는 그이지만, 지금까지 산에 오르며 쌓은 고산경험들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다. 높이 올라 갈수록 체력소모가 많으니까 최대한 가볍게 해서 빠르게 다녀오는 것이 오은선의 노하우다. 혼자 오르는 산은 무섭다. 매킨리 때도 그랬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드넓은 설원에 서서 오은선은 두려웠다. 이번 로체와 마칼루 등반도 혼자 떠난다. 그래서 사실 매일 매일이 바쁘다. 장비·식량 준비와 포장, 행정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누가 좀 만나자고 하면 시간 내기가 힘들어 미룰 때가 많아요. 사람들은 ‘오은선 많이 컸다’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래요. 성격이 직선적이에요. 저 때문에 상처 입은 친구들도 있다는 걸 주변에서 듣기도 해요. 화가 나면 ‘폭탄’이 될 때도 있죠. 대신 거짓말이나 나를 포장하고 미화하는 건 절대 못해요.”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장비 준비를 위해 차를 몰고 동대문 장비점으로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전 신문에 나온 오은선의 기사들이 왜 매번 같은 이야기뿐인지에 대해 식상한 적도 있었으나,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개고기 좋아해요? 갑시다.” 자유로운 영혼의 ‘그 또는 그녀’ 오은선은 세상의 거대한 산을 통, 통, 통 뛰어올랐다.
첫댓글 ▶◀ 고미영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오은선님의 14좌 완등을 기원합니다.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죠~, 뵙온지 꽤 오랫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시청역에서- 신림역으로 발령 났어요!, ㅋ,
산과 결혼한 여인들 이지요...그들의 또다른 아름다운 삶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이까......목표를 향한 꿈의 도전에 박수 보내드립니다... 감동글 감사 드립니다 고문님...늘 건강하시구 행복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