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지난 주일이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이어서
골로새서 3장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구절을 갖고.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던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연결이 안되어서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고싶습니다.
<답변>
교회강단에서 들리는 소리가 불편함을 느끼셨을거라 생각되네요.
에베소서 6장이나 골로새서 3장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가정에서 자녀의 기분을 맞춰주라는 아동 심리학이나 윤리 강령이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아실겁니다.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 들을 바에야 차라리 오은영박사의 강의를 듣는 편이 낫겠죠.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교회내에서 가르치는 아비된 자들과 영적인 관계를 맺은 자녀에 대한 향한 십자가의 맹렬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비와 자녀는 육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아비는 세상의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고 복음으로 영적 자녀를 출산하는 교회 안의 지도자와 먼저 믿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마가에게 내 아들이라 부른것도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도 그들이 진리를 온전히 이어받은 영적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통째로 교회를 향해 자녀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노엽게 하다의 진짜 의미는 영적 자녀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다 혹은 격노케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파로르기조(παροργίζω)입니다. 이 단어는 영혼 깊은 곳에서 진노를 폭발시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진노 곧 오르게(ὀργή)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율법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 15절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라고 분명히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짐에 지쳐 진짜 생명을 얻으려고 교회로 피한 성도들에게 똑바로 행해야 복을 받는다는 세상의 도덕과 윤리 혹은 기복주의라는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지우는 짓이 바로 영적인 자녀들을 파로르기조(παροργίζω)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결과로 찾아오는 낙심하다의 치명적인 의미는 바로 영적인 질식사입니다. 강단에서 율법의 짐을 지울 때 자녀는 낙심할까 함이라고 경고합니다. 낙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뒤메오(ἀθυμέω)는 없다는 뜻의 부정 접두어 아(ἀ)와 생명 호흡 영혼을 뜻하는 뒤모스(θυμός)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성도인 자녀가 단순히 기분이 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조차 십자가의 은혜는 쏙 빼놓고 숨 막히는 윤리와 율법의 채찍질을 당할 때 성도들은 도저히 그 완벽한 기준을 맞출 수 없음을 깨닫고 영적인 생명의 호흡 곧 뒤모스(θυμός)가 완전히 끊어져 말라 죽게 된다는 무서운 뜻입니다.바울이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위해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한 것도 단순한 위장병 처방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금욕주의와 율법의 틀에 갇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병들어가는 디모데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십자가 은혜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라는 영적인 훈계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스스로 음식을 골라 먹고 금욕주의 기본강령처럼 되어있는 술을 먹으면 안된다는 논리로 디모데조차 이것을 멀리하며 자꾸만 율법적 금욕주의 행위로 돌아가려는 디모데의 율법주의적 징후를 캐취하고 바울은 육신의 질병에 빗대어 포도주를 쓰라고 아비로서 책망한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술안먹는다고 율법의 의를 쌓는 자녀같은 후배에게 "야 포장마차가서 소주 한잔해"라고 너의의 그 알량한 율법적 금욕주의를 깨라는 말입니다. 아픈데가 있으면 민간요법으로 포도주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율법 회귀의 본성은 비단 디모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할례당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하는 외식을 행하여 바울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조차도 율법으로부터 자유해졌다고 선포하면서도 끊임없이 율법의 규범을 만들어 스스로를 옭아매려는 내면의 타락한 옛 자아를 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뼈저리게 절규했습니다.
이렇게 바울도 베드로도 디모데도 율법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임이 끊임없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며 산다 자부하면서도 몇 년이 지나면 또다시 율법을 지키고 스스로의 규범을 만들어 자기를 옥죄는 것이 우리 육신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는 날까지 스스로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십자가만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비록 육의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적어도 이 십자가의 진리와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아는 자가 바로 영적 아비입니다. 그렇기에 아비는 자녀들에게 더 이상 불가능한 율법의 짐을 지워 노엽게 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거짓 스승들처럼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워 성도들을 영적인 질식사로 몰아넣지 말라는 엄중한 구속사의 명령입니다. 영적 아비 된 자들은 성도들에게 불가능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선생 노릇을 멈추고 오직 아들을 찢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은혜만을 덮어주어 참된 생명으로 숨 쉬게 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가 진리의길님의 답답했던 마음을 온전히 시원하게 뚫어내 주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아직은 십자가의 영으로 복음의 진리를 나누는 형제들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이 고갈 된 이 악한 세대에서 십자가가 어떤 진리이며 은혜이며 사랑인지를 값 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인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십자가의)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롬13:10)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는 세상 교회들도 아들의 피로 덮어주신 이 사랑 알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