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기 언어로 우리에게 세상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가 들려주는 세상이야기라, 참 흥미롭지 않은가? 사람에게 사람의 시선이 있듯이 나무에게는 나무의 시선이 있다. 나무는 어떻게 세상을 볼까? 어떻게 다른 대상과 만나 대화를 할까? 나무가 들려주는 세상이야기이므로 우리는 우선 나무가 되어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의 시선으로 나무가 하는 이야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나무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어떻게 나무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무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사람으로 쓴 탈을 벗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나무가 쓰는 언어에 적응을 해야 한다. 나무가 쓰는 언어는 대자연과 연결되어 있다. 대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무가 말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이 쓰는 언어는 대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삼는 걸 보면 인간의 언어가 대자연과 이어져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귀도 미나 디 소스피로가 지은 『나무의 언어』(설렘, 2018)에는 2000년을 산 주목나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2000살 주목나무가 인간의 언어로 쓴 회고록이다. 인간이 쓰는 언어로 이 나무(성별로 따지면 여성이다)는 자기가 살아온 역사를 이야기한다. 주목나무에 비한다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은 참으로 짧다. 가장 늦은 시간에 지구상에 나타나 가장 빠른 시간에 지구를 정복한 인간들을 향해 ‘숲의 여왕’은 대자연이 지닌 품성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대자연은 사물들 저마다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는 존재이다. 메마른 땅에 태어난 생명이나 습기로 가득 찬 땅에 태어난 생명이나 대자연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존재들이다. 2000년을 산 주목나무가 처음부터 숲을 지배하는 풍모를 지녔을까? 너무도 작고 미미했던 한 존재는 대자연을 통해 받은 정기로 숲을 지배하는 여왕이 된다. 작가가 왜 주목나무를 여성으로 표현하겠는가? 여성은 생명이 탄생하는 기원이다. 모든 생명은 어머니 대자연이 내뿜는 기운을 머금고 한 생명으로 태어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았을까? 주목나무 여왕은 동물들을 열등한 생물로 본다. 숲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윗줄에는 주목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있고, 그 밑에 동물들이 있다. 여왕은 처음으로 목격한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난생처음 보는 기이하게 생긴 동물이었는데, 모두 넷이었다. 우리 나무들과는 달리 그들의 몸에는 신체의 각 부분들이 건들건들 달려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열등한 하급의 생물들이 대개 그렇듯 매우 균형 잡힌 모습을 하고 있었다.”(36쪽) 넷 중 하나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다. 가장 키가 큰 자는 흰색 옷을 걸쳤고, 다른 둘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몸을 가렸다. 흰옷을 입은 자가 달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더니 이내 가죽옷을 입은 자들에게 뭔가 말했다.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알몸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고는 칼을 꺼내들어 알몸의 목을 베었다. 세 사람은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알몸을 바라보기만 할 뿐 먹지는 않았다.
동물들은 먹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인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불리는 동물은 알몸을 죽이고서도 먹지 않았다. 주목나무는 주변에 있던 암늑대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우두머리 늑대는 “인간은 먹기 위해서뿐 아니라 쾌락을 위해서도 죽이는 일을 한답니다.”(42쪽)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쾌락을 위해서도 생명을 죽인다고? 며칠 후 여왕은 전사 몇 명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게 된다. 말에 사람 머리 몇 개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장면을 본 여왕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키가 큰 느릅나무가 그런 여왕을 보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나무들을 ‘목재’로 부른다고. 도끼나 곡괭이, 까뀌 같은 연장들도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다고. 나무줄기에 띠를 둘러 고리모양으로 벗겨내 나무를 죽이고는 어질러진 숲을 불살라 버린다고. 개암나무와 물푸레나무, 산사나무 그리고 호랑가시나무 등 숱한 나무들이 인간이 지른 불에 타버렸다고. 얼마나 사악한 인간들인가? 쾌락을 얻기 위해 생명을 죽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왕은 이제 이해할 만하다. 물론 인간이 자연을 무조건 파괴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삶을 포괄하는 상징을 얻기도 한다. 주목나무 엄마 말을 들어보자.
“결코 나쁘지 않지. 이 인간들이 비록 거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태어나고 또 결국엔 돌아갈 대자연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믿고 있으니 말이다. 저들은 바위와 언덕, 산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고 그 영혼이 강물과 냇물 그리고 저 깊은 호수에서 반짝이며 빛을 발한다고 믿고 있단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것이 나무, 특히 우리와 같은 주목의 영혼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야. 우리가 바로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자이기 때문이지. 그들은 기도할 때 우리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다. 또한 부족이 집결할 때에는 우리를 중심으로 집결할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물가에서 그들은 신을 부를 것이다. 몇 해 전에 네게 말한 것 기억나니? 주목이 여왕이 될 것이라는 말 말이다. 그건 예언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거란다. 이 인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얘야,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될 거야.”(49쪽)
인간이 나무를 숭배하는 시절이 있었다. 나무 숭배를 유일신 숭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자연 속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 인간도 자연 속 사물이니 당연히 영혼이 있다. 그 영혼으로 인간을 포함한 사물들은 서로 대화를 한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대화처럼 언어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를 잇는 기운으로 대화를 한다. 흰옷 입은 사제가 주목나무가 있는 곳을 “신성한 숲이며, 이 숲의 지배자는 바로 이 주목이다.”(48쪽)라고 외치는 순간 인간은 신성한 숲과 이어진 신성한 존재가 된다. 신성한 숲이 있기에 신성한 인간이 있다. 아니, 신성한 생명이 있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다. 신성한 숲에 있는 생명들은 주목나무 여왕을 중심으로 대자연이라는 한 영혼으로 묶여 있다. 사람들이 주목나무를 우러르고 숭배하는 마음은 영혼의 중심에 대자연을 배치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 소설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우선 로마인 이이니어스와 호수의 요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이니어스는 로마 제9군단 히스파나를 이끄는 군단 사령관과 젊고 발랄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두 살에 군대에 입대하여 사령관 아버지의 도움을 얻지 않고도 백부장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는 주목나무 여왕이 사는 히버니아 섬을 정복해 황제에게 바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이니어스가 그 선봉에 서서 섬으로 들어간다. 그는 원주민으로 변장해 전쟁을 통해 이 섬을 뺏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섬 구석구석을 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된 그는 군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이 섬에서 만끽한다. 배가 고프면 그는 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했고, 어느 때는 원주민들이 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는 주목나무에 말고삐를 묶고 텐트 속에서 숙면을 취했다. 전쟁터를 나돈 사람이 잠이나 제대로 자 본 적이 있을까? 주목나무가 있는 섬은 그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이이니어스는 운명처럼 호수의 요정을 만난다. 이이니어스와 호수의 요정이 만나는 이야기를 우리는 나무가 쓰는 언어로 들어야 한다. 인간이 말하는 언어로는 그 상황을 표현하기가 힘들다. 돌려 말하면 이성이라는 틀을 버려야 우리는 새로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이이니어스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직 여자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에게는 호수의 요정이 첫사랑이라는 얘기다. 호수의 요정은 원래 이이니어스를 유혹해 호수 밑바닥에 영원히 처박아 두려고 했다. 마법을 쓰려는 순간 그가 요정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한다.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바로 그 시각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수천 명의 아름다운 요정들이 군대를 유혹하여 요새 밖으로 멀리 끌어냈다. 요정들은 군인들을 섬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신붓감을 맞이하게 했다. 섬을 정복하려고 온 군인들이 도리어 섬에 정착하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이이니어스는 호수의 요정과 함께 ‘영원한 평온의 땅’으로 올라간다. ‘영원한 평온’이라는 말에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꿈이 서려 있다. 주목나무가 여왕으로 있는 신성한 숲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을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또 한 사람을 여왕은 ‘초록 인간’으로 부른다. 초록 인간이 나타난 시기는 공교롭게도 주목나무 엄마가 생을 마친 시기와 겹친다. 엄마의 죽음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여왕은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혐오스러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삼라만상을 낳은 어머니 대자연이 지금은 애통해할 시간이 아니라 엄마 뜻을 계승해야 할 시간이라고 속삭였지만, 여왕은 그 말을 묵살해버리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간혹 잠에서 깨어나 보면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는 잡초만이 무성했다. 그것이 보기 싫어 여왕은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거슬리는 소음이 여왕을 깨웠다. 쇳소리였다. 한 인간이 곡괭이로 자기 키 세 배나 되는 커다란 바위를 내리치는 소리였다. “이리저리 뒤엉킨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어 있고, 몸 전체는 짐승의 모피라고나 할 털로”(96쪽) 뒤덮인 사람이었다. 여왕은 그 사람에게 흥미가 일었다. 엄마에 대한 애도 기간을 끝내고 여왕은 뿌리와 잎으로 생명 기운을 내보기 시작했다.
곡괭이로 바위를 내리치던 사람은 대륙에서 왔다고 한다. 돼지가 머릿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그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돼지가 황금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하늘을 날더니 뭉게구름에 있는 천사 옆으로 가서 앉는 꿈을 꾸었다. 종교적 소명으로 해석한 그는 이튿날 아침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엄격한 규율은 참을 만했는데 돼지고기가 문제였다. 그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구원이 가까워지리라는 확신으로 수도원장을 속였다가 망신만 당하고 수도원에서 쫓겨난다. 이래저래 해서 여왕이 사는 섬까지 온 그는 서릿발이 내리는 밤, 마음속에서 영적인 것을 느꼈다. 돼지고기와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갈팡질팡하던 그는 어느 날 주목나무 가지 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주목나무가 겨울잠에 빠진 사이 거센 폭풍에 뿌리가 뽑힌 나무들을 끌어 모아 비를 피할 집 한 채를 지은 것이다.
몇 개월 만에 본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편안하게 숲을 거닐었다. 그는 이제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숲에 있는 나무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주목나무 여왕을 ‘지혜의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자기에서 주어진 삶을 그대로 즐겼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 괴로워하지도 않았고, 여자를 안고 싶어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어느 초가을 오후에는 끓인 물에 주목나무 잎을 우려서 마셨고, 독이 있는 주목나무 열매를 맛없는 씨까지 모두 먹기도 했다. 그가 그윽한 눈으로 위를 바라볼 때면 여왕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밑으로 깔았다. 어느새 그는 주목나무 여왕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사람 얼굴 한쪽에 나뭇잎이 몇 장 달려 있는 걸 여왕은 보았다. 얼굴에서 주목나무 잎이 자라는 것 같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는 온몸에 나뭇잎을 달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나무의 언어를 습득한 사람은 경계를 넘어 ‘초록 인간’이 된 것이다.
주목나무 여왕은 대자연을 대리해서 신성한 숲을 다스리는 나무이다. 그녀는 떡갈나무가 일으킨 반란을 성장억제제를 사용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성장억제제를 사용하면 주변 나무들 또한 피해를 입지만, 여왕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성장억제제를 투입한다. 떡갈나무와 화학전을 벌여 이긴 셈이다. 여왕은 주목나무로 만든 활을 사용하는 사람(헤링본)을 통해 타락한 인간 세상에도 개입했다. 헤링본이 마차를 타는 사람들에게 강탈한 재물을 거지와 병자, 버림받은 자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그가 세운 기사도가 수많은 노래와 시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걸 보면 여왕은 헤링본을 의적(義賊)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을 구하는 자애를 베푼 것이다. 여왕은 한편으로 다른 식물들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 연륜과 지혜가 깊은 나무만이 할 수 있는 이 능력으로 여왕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새록새록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여왕은 자기와 연결시켰다고나 할까?
여왕이 지닌 능력 가운데 가장 비상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능력이다. 여왕은 자그마치 3억 년을 거슬러 올라 역사의 굴곡을 면면히 들여다본다. 3억 년이라는 시간과 인간이 이 지구상에 뿌리를 내린 시간을 비교해 보라. 시간을 거슬러 오른 자리에서 여왕은 주목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암나무를 발견한다. 인간 역사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간을 주목나무는 살아왔다. 거대한 공룡들이 갑작스런 날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될 때도, 주목나무는 꿋꿋이 살아 자손을 이었다. 여왕은 “인류는 비교적 최근에야 나타난 ‘해충’이다.”(190쪽)라고 말한다. ‘해충’이라는 말이 눈에 걸린다. 인간이 지구에 가한 폭력을 생각한다면 ‘해충’이라는 말은 도리어 가벼워보인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같은 종족을 파괴하면서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한다. 같은 종족을 죽이는 걸 쾌락으로 느끼는 유일한 짐승이 인간이라고 하던가? 1천4백46번째로 맞은 따스한 계절에 여왕은 인간이라는 짐승들이 거침없이 행하는 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때 첫 번째 타격이 가해졌다. 그것은 내 줄기의 북쪽, 이끼가 많은 가지를 내리쳤다.
“악마의 방향부터!”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시작을 상서롭게 여기서부터 합시다. 주여, 축복을 내리소서!”
그러더니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두 번째, 그러고는 다음, 또 다음으로 점점 빠르게 타격이 가해졌다.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미치광이 짐승들이! 성직자의 직분, 십자가를 섬기는 자들의 본분이 도끼를 휘두르는 일로 바뀌었단 말인가? 비열하고 천하고 야만적인 짐승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자들이며, 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어떻게 감히? 무엄하게 감히 내게, 숲의 여왕인 나에게 이런 불경한 짓을 하는가? 어떻게 그 도끼의 칼날을, 그 톱의 날카로운 이빨을 내 몸 속에 들이밀 수가 있는가?’
고통, 그 고통은 나를 갈가리 찢어놓는 것 같았다. (200쪽)
도끼질은 계속된다. 주목나무 여왕을 지탱하는 수만, 수십만 세포들이 죽어갔다. 사람들이 제 몸을 내리칠 때마다 여왕은 ‘죽어, 죽어, 죽어!’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신성한 숲을 지키는 상징으로 받들던 나무였다. 시간이 흘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성한 나무를 악마로 규정한 후 주목나무 여왕을 난도질했다. 여왕은 참혹하게 쓰러졌다. 여왕이 완전히 쓰러졌을 때 수도사들은 마음껏 기뻐했다. 그들은 생명을 죽인 게 아니라 악마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수도원이 들어설 자리를 가로막은 악마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신성이 이 숲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왕은 왜 악마가 되어야 했을까? 주목나무 여왕만 수도사들이 휘두른 도끼날에 무너진 건 아니었다. 우아한 딸기나무도 수도사들을 피해갈 수 없었다. 대수도원과 호수 사이에 널찍한 산책로를 내기 위해 그들은 딸기나무를 망설임 없이 제거했다. 자연에 발을 들여 놓은 인간은 이렇게 힘으로 죄 없는 생명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 버렸다.
“인간이 우리를 지배했고, 그들은 사악했다…….”(205쪽)라는 말로 작가는 이 상황을 정리한다. 종교를 앞세워 그들은 자연=생명을 죽였다. 주목나무 여왕이 죽은 판에 다른 생명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명분으로 산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를 거리낌 없이 내는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딸기나무와 달리 거대한 주목나무는 살아남았다. 수도사들이 주목나무 뿌리까지는 뽑아내지 못한 것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주목은 밑동 쪽에서도 쉽게 싹을 피운다. 한여름이 되어서야 의식을 되찾은 여왕은 마음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보다 더욱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다. 다른 주목들이 상황을 포기하고 죽어갈 때도 여왕은 명명하기 힘든 이 힘으로 하여 끝내 살아남았다. 그것은 증오심이었다. “가장 강렬하게 타오르는 증오!”(208쪽) 여왕은 인류에 대한 증오심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증오로 들끓어 오르는 마음으로 여왕은 수백, 수천만이 울부짖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들었다. 광기에 빠진 인간들이 휘두른 도끼에 속절없이 제 몸이 잘린 나무들이 외치는 끔찍한 소리였다. 여왕은 오기가 발동했다. 주목나무가 쉽게 죽지 않는 나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 날 신앙심이 깊은 한 수도사가 숲을 산책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형제들을 불렀다. 그는 ‘기적’이라고 외쳤다. 기적을 외치는 수도사를 따라 ‘형제들’이 다시 살아난 여왕 곁으로 왔다. 자그마한 줄기에 잎사귀가 달린 새 가지 열두 개가 뻗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수도사는 부활을 외쳤다. 열두 가지, 수도사 열두 명, 그리고 구세주의 열두 제자가 겹쳐 부활을 입증했다. 수도사들은 부활한 주목나무 주변에 대수도원을 짓기로 결정했다.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부활과 묘하게 겹치는 이 부분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훗날 한 은둔자가 폐허가 된 대수도원을 둥지로 삼으면서 주목나무에 얽힌 전설을 퍼뜨렸다. “한 병사가 이곳으로 왔지요. 그는 젊고 오만했습니다. 그가 이 주목을 보더니 가지를 하나 잘라내서 지팡이로 쓰겠다는 겁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더러운 거렁뱅이야, 네까짓 게 뭘 안다고 그래?’ 하면서 그는 내게 사납게 발길질을 했어요. 내가 그 주목에 손대지 말라고 계속 말렸으니까요. 계속되는 발길질로 내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자, 그는 자기가 봐뒀던 가지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가지를 꺾는 순간, 가지에서 피가 흘렀고, 병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답니다.”(218쪽) 신성한 숲을 수호하는 나무에서 악마로, 악마에서 다시 부활한 존재로,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존재로 변신하는 주목나무 여왕이 재밌지 않은가? 인간이 마음먹는 바에 따라 주목나무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주목나무 여왕은 인간이 나무를 한 존재로서 대접하고 있는지 묻는다. 종교적 상징으로서 나무를 숭배하든, 정원 가꾸기 대상으로 나무를 기괴한 모양으로 변형하든 인간은 나무에 자꾸만 의미를 붙인다. 의미만 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나무를 그 의미에 맞추려고 한다. 인간은 나무의 언어를 듣지 않는다. 인간이 쓰는 언어로 나무가 사는 방식을 제어하려고 한다. 나무는 나무로서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왜 꼭 인간이 중심에 나서서 다른 생명들을 자기 구미에 맞추어야 하는가? 나무의 언어를 알아듣는 어린 소녀(클레어)를 통해 작가는 주목나무 여왕이 품은 마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녀는 외롭대요. 그래서 친구가 더 있으면 좋겠대요.”(228쪽) 주목나무 여왕은 인간에게 숭배를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정원수로 온몸을 기괴하게 잘려 인형처럼 살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다만 인간과, 아니 모든 생명과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무의 언어로 그녀는 이 소망을 인간을 향해 수도 없이 외쳤다. 이제 우리가 그 말을 들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나무의 언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화성에 식물을 먼저 보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서서히 만들려는 계획이다. 불과 1만 년 사이에 인간들은 이 세상을 길들였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살 세상을 오직 인간만이 사는 세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 그 잘난 과학으로 지구를 떠나 화성에 개척할 꿈에 부풀어 있다. 수많은 식물이나 동물이 화성에 선발대로 보내질 터이다. 그곳에서 언젠가 살아남는 식물, 동물이 생기면 인간은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인간은 자기 언어로 세운 왕국을 영원한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 대자연이 내보이는 이치가 이 나라에서는 통할 리가 없다. 주목나무 여왕은 지금도 우리에게 나무의 언어로 이 사실을 알린다. 마음을 열면 여왕이 전하는 이 얘기를 우리는 들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대자연에 속한 한 생명이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