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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갖은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쌩고생을 반복하고 무거운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이기에 매일 매순간을 축제 즐기듯, 수행여행 가듯 가슴 설레며 살아야 마땅한데, 어렵고 지루한 숙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명쾌한 정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마태 11, 28-30)
우리가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시절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시시각각 주님의 현존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고,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산다면, 그 어떤 수고나 고생, 시련과 상처에도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맞이하며 치매로 고생하는 어르신을 봉양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늘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기도만 하는 순한 치매도 있다지만, 그런 치매 환자는 백 만 명 중의 한명 꼴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수시로 의심하고, 공격하고, 다투고, 힘들게 합니다. 끊임없이 이리 저리 배회를 하고 가출을 시도합니다. 폭력과 욕설을 거듭하는 치매 환자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케어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노고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대체 하느님 뭐하시나, 상태가 저 모양인데, 사람 노릇도 못하시는데,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특별한 형제를 봤습니다. 어르신을 마치 사랑하는 아기 다루듯이 대하십니다. 동화책도 읽어드리고, 식사를 거부하시는 어르신을 살살 달래가며 법을 떠먹여 드립니다. 수시로 게임도 하고 퀴즈도 내며, 어르신과 함께 하는 하루를 놀이하듯 재미있고 기쁘게 지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가족들, 또래 환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납니다. 두분 주변은 언제나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 분명 무거운 짐이 확실합니다. 그들을 하루 온종이 케어한다는 것, 쌩고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하고 계시고, 그 어르신 안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그 일을 기쁨이요 축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굳은 일, 힘든 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도 큰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고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임한다면, 그 일이 곧 복음화요 주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고생 저런 시련 속에서도 하루 하루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그분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오 11,28-30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에너지가 넘친다
‘최강의 인생’을 쓴 데이브 아스프리는 자신의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과 권력과 쾌락을 다스렸는지 그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째는 지금 이렇게 절제 없이 산다면 2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상상하는 20년 후의 나의 미래를 위해 지금 ‘아니오!’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애정이나 인기, 돈이나 명예, 쾌락에 휩쓸리다보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정작 힘이 필요할 때 주저앉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아닌 이상 삶의 모든 패턴을 자동화하라는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하고, 식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지,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귀가해서는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하고, 그 방법은 욕구를 이기기 위해 평소 생각과 판단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학계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판사들이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가석방 심사를 하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1,000여 차례가 넘는 공판을 조사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판결 결과’는 범죄 유형이나, 수감자의 학력, 수감 생활 등의 변수보다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에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전에 내리는 공판에서는 판사가 매우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판사들은 수감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점심 전에는 거의 0%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와 잠시 휴식을 거친 뒤에는 다시 우호적 판결을 내릴 확률이 65%까지 오른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와 ‘판결 결과’의 상관관계는 꾸준하게 반복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시간대’가 ‘판결의 결과’를 가르다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석방 승인 여부를 둘러싼 여러 의사결정들이 판사들의 ‘의지력 계좌’를 점차 소진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력이 바닥났을 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도출할 확률을 높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사결정 피로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의사결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피곤해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판단은 우리의 의지력을 소진시켜 결국 통제해야 할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조: ‘최강의 인생’, 체인지 그라운드; 웅 이사의 하루공부,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은 바로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벳사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은 믿음이 없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간직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생각해야 할 때에 부모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부모가 자라고 하면 자고 학교에 가라고 하면 갑니다. 숙제를 하라고 하면 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면 먹습니다.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와 겸손으로 얻는 ‘안식’은 ‘쉼’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하면 어린이처럼 에너지가 넘칩니다.
축구나 야구,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지친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에 뛰게 하지 않습니다.
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한 실력도 중요하지만 선택을 하기 위한 에너지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옷을 한 가지만 입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니까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알기에 하루의 일과를 정해놓고 온유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 부모님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준 하루를 이렇게 알차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주님의 뜻에 따라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해보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잠자기 전에 감사 일기를 쓰고 다음 날 할 일들을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표를 짜 봅시다.
다음 날 훨씬 힘이 덜 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시는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은 일일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통해 평안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려 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이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한다면 누구나 부정과 악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무게는 우리가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멍에가 바로 나에
게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운전하는데, 앞차 승용차 뒷유리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기가 타고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말고 안전 운전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여서 앞차와의 간격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차가 안전 운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속도를 내서 차선을 계속 급하게 옮기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안전 운전을 요구하면서도 본인은 정작 하지 않는 모습에, “저럴 거면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글은 떼어내야지.”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래. 지금 무척 바쁜 상황이라서 그럴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해봅니다.
사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기를 꼼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은 한없는 낮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굳이 낮출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하느님이면서도 인간보다 더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자기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실제로 보여주신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인지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세주임을 몰랐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는 행동을 하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셨기에 진짜 겸손을, 진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품이야말로 가장 편안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은 어딜까요? 어머니의 품속입니다. 저는 아이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갓난아기가 힘차게 울어 젖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안는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 더 힘껏 울 것입니다. 이때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어머니 품 안에 들어가야 울음을 멈추고 방긋방긋 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안겨야 할 곳은 바로 예수님 품입니다. 진정한 겸손과 따뜻한 사랑이 있는 그 품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주님 품 안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품 안에 나의 이웃들이 안길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근심거리와 걱정거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품과 같은 겸손과 사랑으로 무장한다면 어떨까요? 무조건 힘들고 어려운 곳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장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에게 평안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랠프 월도 에머슨).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이사26,7)
주님의 멍에를
지고 가는 이들은
그분을 닮은
온유와 겸손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고 가벼워진다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지고 가는 이들은
주님을 떠난
그들의 죄악 때문에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사랑과 휴식은
하나입니다.
안식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우리를 위한
휴식입니다.
제대로 쉬는 것이
제대로 사랑하는 것임을
쉼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십니다.
노동과 휴식또한
주님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무겁게
짊어 진 짐을
우선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내려놓는 것이
비워내는 것입니다.
비울 줄 아는 것이
주시는 주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휴식입니다.
비우고 쉬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힘겨운 마음에
필요한 것은
주님과의 반가운
만남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휴식이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휴식의 빈 공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휴식이며
휴식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배려와 받아들임 사이에
내려놓음과 비움 사이에
처음과 끝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7.1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짧은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안식(평화)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가 마차를 끌 때 소와 마차를 연결해 주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연결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지금 제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피서법은 선풍기 틀어놓고, 좋아하는 성가를 들으면서 성경을 필사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성경필사)'은 '하느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멍에'입니다.
2020년에 어머니를 하느님 나라로 보내드리고 나서, 대통령 선거 등 이런저런 일들로 많이 힘들어할 때부터, 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필사를 통해 안식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이유로 크게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께로 갑시다!
말씀이신 예수님께로 갑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신 예수님께로 갑시다!
그래서 다시 일어납시다! 다시 부활합시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이사26,19ㄷ)
복음말씀
제1독서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6,7-9.12.16-19
7 의인의 길은 올바릅니다. 당신께서 닦아 주신 의인의 행로는 올곧습니다.
8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9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평화를 베푸십니다.
저희가 한 모든 일도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16 주님, 사람들이 곤경 중에 당신을 찾고
당신의 징벌이 내렸을 때 그들은 기도를 쏟아 놓았습니다.
17 임신한 여인이 해산할 때가 닥쳐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듯
주님, 저희도 당신 앞에서 그러하였습니다.
18 저희가 임신하여 몸부림치며 해산하였지만 나온 것은 바람뿐.
저희는 이 땅에 구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누리의 주민들을 출산하지도 못합니다.
19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당신의 이슬은 빛의 이슬이기에 땅은 그림자들을 다시 살려 출산하리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