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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의 역사와 문화
[서한(西漢, B.C.206 ~ A.D.25)]
- 중국인들의 정체성의 기원, 한나라.
서한은 진나라에 이어 중국의 두 번째 통일왕조다.
기원전 206년, 한 고조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고, 또한 초 패왕(覇王)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긴 후 202년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 -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 건립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서한(西漢)’이라 한다.
서한 시대에는 봉건 제도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모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한나라는 아시아 최고로 번영하고 부강한 다민족 국가였다. 한나라는 또한 유학을 중국의 정치계와 사상계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였으니, 이때부터 유학 문화는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한나라의 정치제도 또한 진일보하여 완전한 군주전제집권제도(君主專制集權制度)를 확립하니 이 역시 중국 후세 몇천 년간 줄곧 발전을 거듭하며 공고해지면서 중국의 기본적인 정치 제도가 되었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왜냐하면 중국문화를 이때부터 ‘한문화(漢文化)’라 하고, 중원 지역의 중국인 역시 ‘한인(漢人)’이라 부르며, 문자 역시 ‘한자(漢字)’라 하니 이러한 명칭에서 모두 한나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한 후기에 사회의 모순이 점차 첨예해지고 외척인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신(新)나라를 세우니, 서한은 이로써 종말을 고한다.
[동한(東漢, A.D.25 ~ A.D.220)]
-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다시 일어난 한나라 동한
서기 25년, 황족(皇族)의 먼 지류인 유수(劉秀 - 한 광무제)는 새롭게 한나라를 재건하고 수도를 낙양에 건립하니 역사상 이를 ‘동한(東漢)’ 혹은 ‘후한(後漢)’이라 칭한다.
동한은 ‘광무중흥(光武中興 - 광무제에 의한 한나라의 중흥)’을 거치면서 사회의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며 문화 역시 진일보의 발전이 있어 휘황찬란한 한문화의 창조를 완성하였다.
동한 시대에 호족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하나의 특색이었다. 각지의 호족들은 대량의 토지 및 농민들을 장악하고 대농장을 확립하여 자급자족의 전장(전장) 경제를 발전시켰다. 심지어 개인 병력을 소유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한 말년 환관의 전횡과 폭정, 가혹한 수탈 등의 갖가지 횡포로부터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급기야 그 유명한 ‘황건족의 난’이 폭발하였다. 이러한 농민반란군 때문에 타격을 받은 동한 왕조는 결국 이름만 있지 실제로는 멸망한 국가와도 같았다.
중국은 이로서 무려 400년 동안의 삼국시대라는 대분열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한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 다음으로 이어진 왕조이다. 한나라는 농업, 수공업에서 큰 발전을 이루고 철기 제조업, 방직업 등 수공업 부문도 모두 흥성하였다. 특히 서한의 칠기 제조업은 중국역사상 최고 전성기라 불릴 정도로 칠기의 종류와 수량이 매우 많고 기법이 정교하다.
아래의 칠기유물은 호남성 장사시 마왕퇴묘에서 출토된 <칠기 그릇>과 <칠기 술 단지>이다. 술잔을 보관하는 용기인 칠기그릇과 술 단지의 형상에서 아름다운 곡선의 미를 느낄 수 있었고, 자연을 형상화해 그려 넣은 도안을 보며, 자연 친화적이고 소박했을 그네들의 삶을 엿 볼 수 있었다.
한 나라의 견직물은 주로 비단, 면, 린넨, 망사, 꽃무늬 도안이 있는 견직물, 자수 등 매우 다양하고, 그 디자인과 색채가 현란하고 다채로운 우수한 직조 공예를 보여준다.
위의 유물들은 호남성 장사시 성주 아내의 무덤인 마왕퇴묘에서 출토 된 <자수 견직물 웃옷>, <봉황 구름무늬를 수놓은 견직물>, <마름모무늬 비단 장갑>이다. 비단위에 감치기 기법으로 수놓아 만든 수의 섬세함은 종이에 프린트한 느낌을 줄 정도로 정교했다. 특히 구름무늬를 수놓은 비단의 디자인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으며, 색감(주황과 갈색, 옅은 비취색부터 청녹색)의 어우러짐은 보는 이에게 우아한 자태를 느끼게 해주어 한나라 직물 자수품의 높은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시관 중앙에 전시된 이 유물은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감숙성 무위시 뇌대한묘에서 1969년 출토된 <행차 의장대 / 동한 25~220 / 감숙성박물관 소장 >이다. 이 행차대열은 한나라 최다 수량의 완전한 행차 의장 대열로 14개조의 의장용군은 2개의 기사용, 4개의 창을 든 기마무사용, 4개의 가지창을 든 기마무사용 및 도끼차, 주차, 수레차, 손 수레차로 구성되어있다. 전시된 <행차 의장 대열>의 큰 규모와 의장대의 위용이 나의 시선을 제압했고 왕족 또는 귀족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을 지를 상상하게 했다.
실크로드, 번영을 열어가다
서한의 무제는 장건을 서역에 사절로 보내어 수도 장안에서 하서 회랑지대와 천산남로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가로지르고 페르시아와 로마로 가는 머나먼 길, 즉 실크로드를 개통하였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실크와 칠기, 철기가 서양으로 수출되었고, 서양의 금은 그릇, 유리 제품 및 음악, 춤 등이 중국으로 유입되고 인도의 불교도 들어왔다. 서한에서 당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7,000km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동서양 교류의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는 중국견직물의 직조 공예 기술을 발전시켰고 도안의 풍격이 더욱 풍부해져 많은 외래문화를 흡수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문명의 대 교류의 장을 열은 실크로드의 번영은 경제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동서양 문화의 교류 및 정신세계의 교류로도 이어졌으며, 불교는 실크로드 문화위에서 더욱 화려하게 꽃피우게 된다.
위의 유물은 조각과 부조 기법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미륵반가상>이다. 아치형의 나무줄기 모양으로 둘러진 안에는 쌍 미륵이 반가부좌를 틀고 양옆에는 협시보살이 서있다. 멀리서 조각상을 봤을 때 색이 뽀얗고 은은해 백옥에 불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 이 조각상의 높이는 93cm로 큰 조각상인데, 안에 새겨진 조각과 부조가 너무도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어 마치 작은 조각상을 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평소 불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조각을 감상하니 관심이 생긴다.
이 병은 <로마 유리병 / 1 세기 / 높이 13.6cm / 낙양박물관 소장 >으로, 유리를 불어서 제작한 전형적인 로마 유리병이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의 장인들은 유리를 불어서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여 공 모양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규칙한 바탕색 위의 흰색 선 무늬가 올려진 질감이 흡사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페인팅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종류의 병은 본래 로마인들이 향수를 담는 용도로 썼는데, 중국인들은 향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유목문화와 합쳐지다
한나라 멸망후에는 남북조시대가 이어지는데, 한족은 남방으로 내려가고 북방은 유목 민족인 흉노족,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 등이 지배한 시기이다. 이 때는 유목민족의 초원문화가 한문화와 융합되어 문화가 발달하는데, 특히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중국 북방을 통일한 왕조로 중국 북방에서 백 년이 넘는 통일국가를 유지하였다. 전시에는 북조의 묘에서 발굴된 다량의 도기들이 있었다.
위의 유물은 <채색을 한 기악 인물상>으로 산서성 대동시 연북사원 북위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위진남북조 시기, 귀족 묘 안에 수장된 도자 인형은 크게 네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묘의 주인을 지키는 진묘수와 무사 인형이고, 두 번째는 소형 행차 대열로 수레, 말, 마부 인형 등이고, 세 번째는 취사와 관련된 인형, 네 번째는 각종 기악 인형과 노비 인형으로 이는 귀족들이 사후에도 계속하여 생전의 풍족한 생활을 꿈꾸었음을 엿 볼 수 있게 해준다. 위의 채색을 한 기악 인물상은 네 번째 유형에 속한다. 이제는 퇴색되어버린 도기 인형이지만, 아마도 처음에는 형형색색의 고운 의상을 입었을 것이다. 인형들은 저마다 다른 악기를 들고서 무덤의 주인이 외롭고 고단하지 않도록 계속해 연주를 하는 듯했다. 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마다 무덤 주인을 위한 연주가 즐거운 듯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자기는 <녹색을 더한 백자 병 / 북제 550~577 / 높이 22cm, 입 지름 6.7cm, 다리 지름 7cm / 하남박물원 소장 >으로 북제의 표기대장군 범수의 묘에서 발견된 백색 유약에 녹색이 채색된 병이다. 이 자기는 시기가 가장 이른 흰색 자기라고 하는데, 살짝 황색이 감도는 자기 위에 흐르는 듯이 채색된 녹색의 안료가 아직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녹색은 연못에 비친 버드나무 같은 느낌도 주었다. 이 자기는 흰색 유약 위에 녹색을 덧칠한 당삼채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 매우 진귀한 작품이라 한다.
당의 풍류와 운치를 느끼다
수 왕조의 통일은 중국 남북조 이래 장기적인 혼란과 분열의 국면을 종식시켰다. 그 후 당 왕조는 정치, 경제를 고도로 발전시키고 문화 예술의 번영과 강성을 일궈내는데, 실로 강대했던 당은 유럽ㆍ아시아 각 민족의 경제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새롭게 위상을 정립하고, 그 결과로서 매우 선진화된 방직물, 금은기, 도자기 등을 외부 세계로 전파한다. 또한 한문화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각국의 문화 요소들과 대대적으로 융합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통합ㆍ발전을 하게 된다.
이 유물은 고창지구 자웅 부부묘에서 출토된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상 / 당 618~907 / 높이 29.5cm / 신강유오이자치구박물관 소장 >이다. 여인상의 얼굴은 한껏 치장을 부린 듯 도도해 보이는 화장을 하고, 의상은 붉은색과 노란색 줄무늬로 된 치마와 자수가 있는 녹색 저고리에 노란 숄을 우아하게 걸치고 있다. 얼굴에 붉은색 분으로 장식하고 화전을 붙이며 보조개를 그리는 것이 당대 여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화장법으로, 비단 치마를 입은 이 여인상은 전형적인 당나라 여인의 모습이다.
이 유물은 섬서성 서안시 정회묘에서 출토된 <당삼채 여인상 / 당 618~907 / 높이 45.2cm, 45.3cm / 중국국가박물관 소장 >으로, 당시의 미의 기준인 다산과 풍족을 반영한 듯 여인들의 몸매와 얼굴이 참 풍만하다. 여인의 두 손 모으며 서있는 우아한 자세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서 인자함이 넘친다. 당삼채 기법은 납이 섞인 낮은 온도의 유약에 착색제를 만들어 바른 후 구운 도기로, 색은 연황색, 자황색, 진녹색, 연녹색, 남색, 갈색, 비치색 등의 다양한 색상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 여인들이 입은 의상에서 깊고 풍부한 색감이 우러나옴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전시실의 많은 유물 중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여러 모습의 채색한 토제 말들이었다.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는 모습, 또 걷는 모습과 고개를 돌리는 말 등의 표정과 동작은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더욱 생동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문득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말이 소리를 내며 전시장 밖으로 나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무덤 안의 벽화, 채색 부조 벽돌, 진묘수 등을 보면서 인간이 사후세계에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이 죽음 이후에 실제로 ‘부장품의 덕을 보았을까?'하는 재미있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중국의 유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중국'이라는 넓은 나라에 얼마나 다양하고 진귀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지를 보았고, 각 시대의 문화적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유물을 보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한 층 더 높일 수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근ㆍ원거리 국가들과의 국제적인 교류를 가지며 다른 문화와 융합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본질을 유지했던 그들의 모습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삼국시대(三國時代, A.D.220 ~ A.D.280)]
- 유비, 조조, 손권. 풍운아들의 시대.
중국대륙이 삼국으로 나뉘어 대립한 분열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로,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그리고 손권의 오나라는 모두 천하통일의 야심을 품고, 나머지 두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여 새로운 대통일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세 나라 사이의 계속된 혼전은 노동에 종사하는 백성들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왔다. 그러나 삼국의 통치자들은 자기의 실력을 확장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두가 각자의 경제 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그로 인해 이 시기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크게 발전하였다.
위나라는 군둔(軍屯 - 군인이 농사지음)과 민둔(民屯 - 민간인이 농사지음)의 발전에 큰 힘을 기울여 중원의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촉나라는 비옥한 토지가 천 리에 이르는 성도(成都) 평원을 지니고 있어 평소에 ‘천부지국(天府之國 - 하늘나라의 곡식창고 같은 국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졌다. 오나라도 여러 차례 동남아시아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산월 지역을 지배하여 중국 동남 지역 경제개발사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듯 삼국의 경제 개발은 장차 다가올 대통일을 위한 물질적인 면에서의 준비를 이룬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