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4】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약 3개월 만인 1926년 6월 22일 도쿄에서 ‘그로테스크’란 작품으로 데뷔 무대를 치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시이 바쿠의 승낙 하에 최승희의 일본식 발음인 ‘사이 쇼키’란 이름으로 무용수 생활을 시작했다.
최승희는 경성을 떠난 지 약 1년 6개월이 지난 1927년 10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본격적인 무용수로서 처음 조선의 경성 무대에 올랐다.
최승희의 독무 ‘세레나데’를 보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모였고 경쟁적인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조선에서 최승희의 인기는 점점 치솟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공연을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10월 28일 오후 7시 경성의 우미관에서 한 차례의 앙코르 공연이 더해졌다.
1928년 11월 15, 16일 이틀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두 번째 경성 공연이 치러지고, 이어서 도쿄, 홋카이도, 사할린, 타이완 순회공연에도 참가한 것으로 봐서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최승희가 혹독한 무용 수련을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시이 바쿠와의 무용 수학 연한 2년, 의무 연한 1년의 총 3년이 흘러 1929년 최승희는 조선으로의 귀국을 준비했다.
허나 이 무렵 이시이 바쿠가 안질로 인해 실명 위기에 처해 있었던 데다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가 내부 분쟁으로 인해 해산 위기에 놓이는 등의 이유로 최승희의 귀국이 마치 어려움에 처한 스승을 배신하는 행위로 세간에 비쳤다.
더욱이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인기가 치솟고 있는 최승희가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로서도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훗날 최승희의 고백에 따르면, 이시이 무용연구소의 보조 무용수밖에 되지 못한 자신의 위상에 대한 불만과 함께 스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귀국을 결정한 이유였다고 전한다.
최승희는 1929년 9월 18일 경성으로 돌아왔다.
세계적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으로서 수련을 거쳐 천재 무용수가 탄생했다고 하더라도 3년이라는 기간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을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무용예술에 대한 인식이 척박했던 당시의 조선 풍토에 기대어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무용수가 무수한 곤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귀국 후 망연자실해 있던 최승희를 구원해준 사람은 큰오빠 최승일이었다.
최승일은 완고한 조선의 풍토에서 현대무용이라는 신예술을 안착시키기 위해 진보적인 예술가와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차례로 설득해나갔다.
그러던 중 아무 조건 없이 집을 빌려주겠다는 일본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남산 기슭에 ‘최승희 무용예술연구소’를 세울 수 있었다.
연구소가 문을 열자 15명의 연구생들이 모여들었다.
스무 살이 된 최승희는 1930년 2월 1일 매일신보사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최승희의 유명세로 인해 많은 관객들이 운집했는데,
이 자리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일본 각계의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예상 밖의 성공적인 공연을 치러냈지만 대개의 프로그램이 이시이 바쿠의 춤을 모방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혹평도 뒤따랐다.
그러나 곧바로 2월 4일 개성 고려청년회관, 3월 30일 경성 단성사, 4월에 다시 경셩공회당, 5월 부산공회당, 6월 경성 천도교기념관, 4월에 경성공회당, 5월 부산공회당, 6월 경성 천도교기념관, 9월 청주 사쿠라좌에서 연이어 공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제2회 창작무용발표회’에서 드디어 이시이 바쿠의 영향에서 벗어난 춤을 선보였다.
이렇게 진행된 강행군은 세간에 최승희 무용을 홍보하는 데 유력한 수단이 되었고, 이것은 바로 무용 연구생들의 증가로 이어졌다.
1931년 1월 10일 단성사에서 개최된 ‘제3회 신작무용발표회’ 역시 만원사례가 이어졌다.
1929년 귀국한 이래 최승일의 지극한 도움과 최승희의 의지로 쉴 틈 없이 순회공연을 이어갔지만 부침을 반복하던 무용예술연구소의 운영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봉건적인 조선사회의 풍속은 현대무용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조선의 스타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자 최승희를 둘러싼 악성 루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등 극복해야 할 장해물들이 속출했다.
최승희의 부모는 사위 후보자들의 사진을 연신 들이대며 서둘러 딸이 시집가기만을 독촉했다.
또한 생활고와 경영난에 허덕이는 최승희에게 접근한 청년 부호들은 후원을 빙자하여 수작을 걸어오거나 애인이 되어주기를 원하면서 기생취급을 하는 등 조선사회에서 최승희의 예술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전무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