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3
9월14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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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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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KV1qHGwpVA?si=MONYC2TORK4GbQVb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수도회 박원구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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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십자가상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 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 미터 지점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 갈 십자가 큰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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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sPYWaAJ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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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빠진 희생은 오염된 피만 배출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구약에서 십자가의 상징은 물론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매달기 위해 만든 장대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뱀을 보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리뱀이 상징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보면 낫게 된다는 뜻일까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도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군가를 낫게 하려고 나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닮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맙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누군가의 죄를 씻어주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노고가 누군가의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십자가가 되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디디 블랜차드와 집시 로즈 블랜차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디디는 딸 집시를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백혈병, 근이영양증, 정신 장애 등 다양한 건강 문제와 장애가 있다고 믿도록 속였습니다. 디디는 딸의 질병과 장애를 홍보하여 기부, 여행 및 기타 혜택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에 버티다 못한 집시는 온라인에서 만난 남자친구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상황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렀습니다. 집시는 어머니의 속임수와 자신이 겪었던 학대의 정도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만이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디디는 집시를 키우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시를 자신의 십자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피 흘림은 깨끗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의 의지로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에서는 리사 헤이든과 존슨의 사례가 있습니다. 리사도 존슨이 음식 알레르기, 뇌성마비, 낭포성 섬유증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헤이든은 자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수년에 걸쳐 약 325번의 불필요한 치료와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의료 전문가들을 속여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믿게 했고, 이에 따라 영양 공급 튜브 장착을 포함한 일련의 불필요한 개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아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상과 선물, 재정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다른 고위 인사들을 만났고, 기부금으로 휠체어 이용 가능 차량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초콜릿 바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보건 방문자가 알아차리면서 이러한 속임수가 드러났습니다.
이 관찰에 따라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리사는 다른 많은 형태의 의학적 학대와 속임수 중에서도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 공급 튜브를 통해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집에서 의료기기를 조작해 결과를 위조하고 의사들에게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고 설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와 의료인의 동정과 지원을 가장하여 아동에게 가할 수 있는 심각한 학대의 극명한 예입니다.
디디나 리사 모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오히려 아이들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어줄 수 없는 더러운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지심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흘리는 피가 아니면 자녀를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피는 오염됩니다. 자아가 죽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자아가 커지기 위해 나를 고생시켜 흘리는 피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창은 오로지 ‘순종’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잘 키워낸 부모는 분명 소명을 가지고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피 만이 자녀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군인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이언에게 가치 있게 살라며 죽어갑니다. 라이언은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평생 열심히 삽니다.
만약 그들이 나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라이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피가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나의 피는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 순종하여 내어주는 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스스로 흘리는 피가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아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뱀이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가 매달려야 합니다. 자아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흘리는 피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합니다.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피 흘림은 누군가의 죄를 사해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명령에 순종하여 흘리는 피만이 깨끗하여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사제도 주님께서 파견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피조물의 한계상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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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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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여행 중에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모태 신앙이기에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학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신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배울 때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제가 된 후 몇 번의 좌절과 시련을 겪은 다음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길을 걸으며 묵주를 돌리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먹구름 뒤에는 밝은 태양이 있듯이 시련과 좌절이 지나가면 주님께서 그 시간에 함께 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배우자와 결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무교였지만 배우자의 신앙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배우자를 보내 주셨고, 배우자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났으니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자매는 홀로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편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있게 되면서 예수님을 더욱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혼자 있는 것도 외롭지 않고,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한 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련과 좌절의 표상인 십자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가 있고, 성당의 제단 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셔야 할 일을 잘 아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전에는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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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말로’ 아주 잘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를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부터 우리의 ‘십자가의 길’은 시작되었습니다. 충실한 신앙인의 신앙생활 자체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들 때도 있고, 편하고 쉬울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생활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으셨습니다.(루카 23,26) 신앙생활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의 길도 혼자서 고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수호천사가, 성모님이, 주보성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3)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도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부활, 구원, 생명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십자가를 만날 수 있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정은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이 힘들다고 걸어가기를 포기해버리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1베드 5,7.10)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그것은 ‘잠시’ 겪는 고난일 뿐이며,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14장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구리 뱀’을 언급하신 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구하려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이(민수 21,9) 당신의 십자가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은 악한 일이고 범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악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수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말씀은,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오직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만을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그 ‘응답’입니다. 무슨 거창한 신심 행위나 예물 봉헌 같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하느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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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제1독서는 민수기의 구리 뱀 이야기를 전합니다.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불 뱀들을 보내시어 불평한 자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그러자 백성은 죄를 뉘우치고 구원을 간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곧바로 모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자, 뱀에 물린 사람이 그것을 쳐다보고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구리 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다는 사실이 오늘 복음에서 드러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 뱀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 구리 뱀을 달아 놓은 기둥은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리 뱀이 들어 올려진 것처럼 당신 자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쳐다본 사람도 누구나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두 사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뱀은 모세가 구리로 만든 조형물에 지나지 않으나, 골고타에서의 ‘뱀’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셨습니다. 왜 그토록 아끼시는 외아드님을 ‘뱀’으로 내주셔야 하셨을까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십자가는 결국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지입니다. 그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도록 높이 들어 올려졌습니다. 세상 한가운데 우뚝 솟아 그것을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도 구원의 표징이 매달리신 그 기둥을 바라보며 경배드립시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하고, 바로 그곳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성금요일, ‘십자가를 보여 주는 예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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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뱀 우상 숭배의 대표는 고대 근동의 이집트로 꼽을 수 있습니다. 1922년 이집트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3-1939)에 의해 발굴된 투탕카멘(Tutankhamen)의 황금마스크를 꼽을 수 있고 멕시코의 마야(Maya)에서는뱀과 건축과 결부시켰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Angkor Wat) 뱀 신의 전당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섬 사람들은 뱀을 ‘부군신령(府君神靈)’이라 하여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동서고금을 통해서 나타나는 뱀은 사람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이고 혐오감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는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뱀에게 어떤 힘이 있다고 보고 신성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경에서는 인간을 유혹하는 동물로 등장하고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것으로 뱀을 꼽고 묵시록에서는 뱀의 또 다른 상징인 용을 박해자로 보았습니다.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올려서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보면 낫게 하는 것은 다른 데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목입니다. 그것은 이집트와 가나안의 우상들 중에 하나가 뱀이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성경 저자는 모세의 구리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우상숭배이고 또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모세가 이것을 만들어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구리뱀을 보관하고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다의 히즈키야 왕 때에 종교개혁을 하며 산당과 함께 이 구리뱀도 없애 버립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열왕기 역사서 하권 18장 4절)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광야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명에 따라 구리뱀을 만들었는데,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사상과 맞물려 갈등을 가졌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구리뱀이 높이 올려진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시는데, 사실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복음 3장 14절) 장대에 높게 매달린 구리뱀이 생명을 가져다 준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그 옛날에 벌어진 일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구리뱀의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때까지 혐오스럽고 수치스럽던 극형의 십자가를 세상 구원의 틀로 바꾸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것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신비를 니코데모에게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3장 16절-17절)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신 것을 기념하며 그 십자가를 드러내는 주일입니다. 우리말로는 현양(顯揚)이라고 번역한 것을 영어로는'triumph of the cross'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워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제일 쉬운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쉬운 일을 ‘누워 떡먹기’ 또는 ‘땅 짚고 헤엄치기’ 말대로 누워서 떡 먹는 것이 쉬울까요?
땅 짚고 헤엄치는 것이 쉬울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보다 더 쉬운 일이 있습니다. ‘남의 흉보는 것’ ‘불평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딸 아이 때문에 속상하다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 한 집을 방문했는데, 그 가족은 아이들을 칭찬해주는 것입니다. ‘아 우리 아들 식탁에 접시도 잘 놓네. 아이고 예뻐라. 우리 딸, 숙제도 잘하고 힘든 엄마도 잘 도와주네.’
그래서 나중에 식사가 다 끝난 다음에 그 부모에게 항상 그렇게 칭찬하느냐? 아니 칭찬 할 것이 있느냐?라고 질문했지요. 그랬더니 이쪽 엄마가 말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야단치는 것에 열배 더 효과가 있다.’고요.
물론 야단치는 것과 칭찬하는 것을 자로 잰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한 것은 야단보다는 칭찬이 큰 효과기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냥 기념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어에도 현양을 ‘승리’라는 긍정적 표현 'triumph'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긴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로마 제국으로부터 300여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313년 교회는 긴 박해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326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땅 속에 버려졌던 십자가를 발견하고 아들 황제에게 성당을 짓도록 부탁했던 것입니다.
성녀는 그 성당에 십자가를 안치했습니다. 십자가의 일부는 콘스탄티누스의 동상 머리에, 그리고 일부는 로마의 성 십자가의 성당 제대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부는 롬바르디아 왕관에 트리어와 밀라노 유물관에 보관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흉측한 형틀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자랑스러운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와 대화에서 민수기의 구리뱀 사건을 회상하시며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물론 니코데모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연후에야 그 뜻을 이해하고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얼핏 보기에는 인간적인 실패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이 무덤에서 끝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성전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에 의해서 잡히셔서 수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맞으시는 대목을 객관적이고도 고통의 면으로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비해 요한복음은 비교적 짧지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전하며 부활의 장면들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와 사도 토마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모습이십니다.
요한 복음은 인간적인 비참한 모습보다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시는 아드님과 십자가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구리 뱀이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아들도 또한 그렇게 십자가에 올리시고 부활을 맞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다 십자고상을 모십니다. 우리가 만일 불평하고 남을 헐뜯고 부정적으로 살고 있다면 십자고상은 벽에 붙어 있는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도 그렇고 교회의 전례에서도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양’ 또는 ‘triumph'로 보는 정신대로 긍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필리비서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서 설명하듯 십자가에서의 주님은 한 없이 겸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영광스럽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현양이며 세상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산다면 주님의 십자가는 분명 우리에게 겸손을 통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자.’라고 표어를 내걸고 다 같이 불평하고 비방하기 보다는 먼저 이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칭찬하눈 취지로 실천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적인 의미가 살아나고 이웃에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십자가의 주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순명하며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정신을 받아들이며 주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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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건너가는 두 번의 여정에서(탈출 15,22-18,27; 민수 10,11-21,35 참조)
굶주림과 갈증,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회의, 이민족의 공격으로 자주 불평과 갈등에 빠졌는데, 제1독서는 두 번째 광야 여정의 말미에 있었던 구리 뱀 사건을 전합니다.
에돔 임금이 길을 막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져, 모세와 아론을 탓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만나를 “보잘것없는 양식”이라 폄훼하며 불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계약을 맺고 계명을 따르기로 맹세한 이 백성이 이토록 쉽게 순명과 믿음의 자세를 버린다면 결코 가나안 땅에서 축복의 삶을 이어 갈 수 없음을 아셨기에, 광야의 불 뱀(독사)을 보내시어 그들을 나무라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다만 백성이 불평과 불신을 멈추고 회개하였을 때에는, 모세가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을 모두 살게 하시어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교회의 교부들(유스티노,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은 구리 뱀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을 십자가로 풀이하면서, 이 구원 사건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형으로 가르쳤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와 전자 기기의 즉각적 응답에 익숙해진 오늘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삶의 태도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한 영적 진보가 더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일상 속 불 뱀 같은 괴로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자주 시선을 들어 올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바라보며 위로와 확신을 얻는 지혜를 가집시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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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
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 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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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가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독일, 영국도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콜롬비아 등을 비롯해서 국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이 의외로 행복 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관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력한 가족 유대감이나 지역 사회의 연대감 등 서로 지지하고 연결하는 관계가 사회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인 중 93%는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고,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행복 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3년 동안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개인주의가 훨씬 더 커졌고, 동시에 행복도는 크게 내려갔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끊는 데에만 노력을 쏟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주님과의 관계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어렵고 힘든 것을 모두 치워주는 주님,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운 사람을 가뿐하게 치워주는 주님 등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줄 주님과의 관계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편안함과 쉬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를 보여 주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의 상징이고, 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사랑과 평화가 있었으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순간의 만족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주님과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가 들어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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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사람>
요한 3,13-17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믿는 사람>
송두리째 비우시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을
닮고 따라서
아래로
아낌없이 베푸시어
하늘과 땅과
함께하신 분을
닮고 따라서
함께
살리시러 죽으시어
땅에서 하늘로
오르신 분을
닮고 따라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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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독서 민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가 히브리어를 모르기에 원어의 뜻을 직접 해석할 수 없어 다른 번역들, 공동 번역과 개신교 성서와 영어 번역을 찾아봤는데 이러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with their patience worn out by the journey,”
이 네 번역을 다 감안할 때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무척 지치고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마음 안에 조급함과 불만이 차올라 마침내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올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바로 떠오른 말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고통과 긴 고통이 떠올랐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나라고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사랑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제는 80이 넘으신 노부부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남편이 치매에 매주 3번 신장 투석을 해오셨는데 이번에 자매님까지 폐암을 앓게 되신 분들이었지요.
그런데도 자매님께서는 남편을 요양 병원에 보내지 않고, 손수 돌보시는데 너무도 정성껏 그리고 깔끔하게 돌보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많이 힘드시지요 하고 위로를 건네니 자매님께서 견딜 만하다고 너무도 훌륭하게 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만하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시지 않고 견딜 만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항암치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달리 그 큰 고통을 그분이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큰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는 큰 고통과 더불어 긴 고통에 관해서도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긴 고통을 견뎌낸 분들이 큰 고통을 견뎌낸 분들보다 위대합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애를 지닌 분이나 오래 고통을 겪은 분들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긴 고통을 견뎌내심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분들 중에는 행복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 앞에서 저는 제가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사실 행복은 사치이고 사랑을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이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힘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저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통에서 승리하시게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고통에서 승리하고 죽음의 고통까지 승리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는 사랑,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일컬어 Passio 또는 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Passio의 사랑이 이분들의 긴 고통의 열매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주님 Passio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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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합시다”
<십자가 예찬>
- 한반도의 십자가 -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이 참 고맙습니다. 9월부터의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로사리오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은 대림시기, 그러다보니 1년이 성큼 지난듯 합니다. 참으로 깨어 간절히 기도해야할 총체적 난국, 총체적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반갑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중 가장 짧으며 가장 좋은 기도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역시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리스도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 후 만세육창을 하고 성가처럼 애국가 1절을 부른 후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쓰는 매일 묵상글 강론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참 절박한 기도입니다.
어제 모일간지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공감했습니다.
“한국은 다극주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다. 미국이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더라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기억할 것은 한국은 주권국이란 사실이다. 균형을 갖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의 안보를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최근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략 접근법이 아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했다. 미래에 한국에서 미군 철군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을 온전히 믿지 마라. 심각한 실수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문도 열어놓아야 한다. 초강대국이 개별 국가의 안보를 대리해주는 시대는 195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참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십자가 주님의 지혜와 보호 은총이 각별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기도뿐이요 고맙게도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대상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한반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심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신의 벌로 불뱀들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는 기도했고, 이어 그들은 모세가 만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결같이 일편단심 사랑하고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좌표가, 삶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의 도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자 도반이 되십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표지가 되고, 희망의 표지가 되고, 영적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됩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백절불굴의 믿음도 십자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니코데모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천명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사랑해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화해와 평화의 상징도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중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중 마지막 대목이 생각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19-20)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하느님 수준으로 넓혀야 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행복이 선택이듯, 믿음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늘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믿음의 선택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원의 문, 구원의 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중의 복음이 더욱 십자가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에 주신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온 세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늘 바쳐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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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
오늘 복음(요한3,13-17)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위로부터, 곧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내용인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들어 올려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나무에 들어 올려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실패와 죽음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날이며,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감사송 中에서)
십자가는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승리의 표징입니다.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신비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믿음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경배하고, 십자가를 지니고 다닙니다. 그래서 성당이나 가정의 중심이 되는 곳에 십자고상을 걸어놓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인 십자가를 자주 바라보고, 십자가 신비 안에 숨겨져 있는 '죽음의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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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3kXplut6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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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고
십자가와 함께
열매를 맺는
우리의 삶이다.
십자가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막을 수 없는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켜주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
십자가에
순명이 있다.
사랑과
십자가는
하나이다.
복음의 삶이란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는
믿음의
실천이다.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하늘 아래
십자가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
십자가가
은총이다.
십자가는
생생한
우리의 삶이다.
삶의 의미는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에 있다.
사람의 아들 또한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십자가에
모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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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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