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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1908-1961),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출판 1964.)
* 메를로 퐁티가 “당초문양과 같은 교차(l’entrelacs-le chiasme)”라는 말을 쓴 것을 추측해 보건데, 신체는 여러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제(기관)들의 혼합이다. 눈, 귀, 코, 혀(입), 피부 등의 감각기관은 각각이 행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하나로 통합 또는 종합되어 인식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단순히 통각이라고 할까? 이 오감의 기호(의미)인 색깔(너비), 소리, 냄새, 맛, 느낌(색성향미촉)은 신체의 기관을 통해서 감각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인식행위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다섯 기관의 조화로운 일치점에서 신체는 의식의 통합을 이룬다. -다섯 기관이야 외부와 관계이지만, 오장(五臟)의 활동은 거의 부교감심경에 의해 이루어지고 각각은 자기 고유성 또는 본징(l‘entité)를 가지고서 위상에 맞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오관과 달리 작동하는 오장은 거의 무의식적 활동이지만 신체의 통일성(다양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의식은 외부와 연관도 있지만, 내부의 조율과 조화도 매우 중요하다. 신체적 통증(une douleur) 또는 괴로움(une souffrance, 고통)는 내부에서 생리적 현상이 있고, 외부로 드러난 증상을 통해서 알려진다. 의식은 경험적(신체적) 과정의 총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의 통합은 대상이전에도 신체 안에서 어떤 공통적 또는 조화로운 일치의 방식을 선험적으로 가졌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 추론을 하기 위해 먼저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발생적 또는 생리학적인 작동(un acte)가 먼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험적 인식 능력으로 내재하는 의식을 지각(la perception)이라 할 수 있다.
단세포에서 출발해보자. 5관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 생명체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유지 보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생명체는 자기 환경에서 대하는 방식은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 삶에 도움이 되면 접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진다. 즉, 신체가 물체를 대하는 방식에서, 외부와 접촉에서 행위를 시행하는 소위 말하는 촉각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대상과 접하면서 자기의 내부의 통일성을 갖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작용 방식을 지각이라 부를 수 있다. 지각은 외부와 연관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통일성 또는 삶의 능력으로 최소한의 속성이다. 속성이라 하는 이유는 신체와 떨어질 수 없는 작동이라는 측면이다. 단세포라는 생명체에서도 신체는 아무리 적어도, 물체처럼 너비를 지니고 있고, 살아있다는 점에서 다른 대상에 대해 자기를 한정하는 의식이 있다. 이 한정하는 지식이 자기 신체의 부분(요소로서)으로 이루어지기보다, 통일체로서 덩이가 함께 의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이 통일적 의식을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설정할 것이 아니라, 그 신체의 작동 방식을 지각이라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지각은 개별 감각들이 발생과 생장하기 이전에 이미 생명체의 활동 상 자기라는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자기 유지와 자치를 하는 작동(활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각은 인식의 근원적, 원형적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생명체는 자기 발달의 과정에서 활동성을 강화하면서, 삶의 영역을 넓히면서 여러 감관들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 생명체의 활동 기제들(입, 코, 손, 발, 눈 귀)들이 다양화하여 기구들을 만들어가면서 이들 각각의 고유함(본질이 아니라)이 성립할 것이다. 각각의 고유함이 다른 고유함들과 연관은 어떻게 설정했을까?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하여 자기 정체성을 기반으로 각 기제들의 연결, 통합, 조합, 조화를 정식화할 것이다. 이 정식화가 현재 곤충계나 척추동물계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겉보기에 각 기제들의 활동이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것 같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작동은 여전히 심층에서 존속하며, 심층의 도태와 연결 속에서 각 가제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심층의 토대의 인식이 통합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이것은 통합 속에서 어떤 계열, 또는 분배(배분)로 형성되었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 현존에서 여전히 또는 선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마치 지각이 다른 어느 의식적 활동보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각은 오관의 감각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며 또한 충만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지각이 드러나는 측면은 그래도 표면에서 작동(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5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체라는 덩이를 통해서 작동하는데, 이는 신경계통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감신경(습관)을 포함하여, 의식화되지 않은(무의식적) 생리적 현상을 포함하며, 또한 오관과 달리 미미히게 어떤 징후들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그 지각의 인식은 오관과 여러 체계(신경, 호흡, 소화 등)들을 정지시켜서 드러나기보다, 삶의 이면에서 파국에서 또는 해체 앞에서 등장할 것이다. 이런 등장의 예를 벩송은 MR에서 자연의 자기 방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생명체의 신체와 연관하면, 인체 또는 인성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의 기제일 수 있다. 기 기제의 등장에서 지각이 무매개적으로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체에 내재하면서 무의식적 활동, 더불어 모든 현실적 경험에 앞서서 작동하는 활동이 지각작용(perception)이라 할 수 있다.
지각작용에 관한한 그리스철학에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라틴어(perceptio - percipiō)에 온 것을 토대로 삼았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percipiō: per- (“through”) + capiō (“capture, seize; understand”)].
버클리의 지각은 지각 활동이라기보다, 지각과 여러 감관들에서 형성된 지각체에 가깝다. 눈과 더불어 색깔, 귀와 더불어 단어의 소리들 등등의 개념에 앞서서 생명체로서 신체의 본성이 형성한 기호(un signe)이고, 이 기호들에 의해 개념과 추론이 성립하게 될 것이다. 의식은 지각된 것이고 지각된 덩어리라고 말한다면, 지각작용(perception)이 편이상 형성해논 기제처럼 의식이 형성한 덩이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개념은 이미 감관을 통해 의식 형성물을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3VKE)
#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출판 1964.) 해제 ***
꼴레쥬 드 프랑스에 후보와 연관해서 보건데, 메를로-퐁티는 표현에 전념하는 자신의 탐구의 둘째 덧문[둘째 시기]를 알렸다. 이 탐구는 둘째 시기의 형이상학적 의미화작업(la signification)을 구별해내는 데 집착하리라. 이 작업은 메를로-퐁티가 조금씩 배타적으로 전념한 작업이며, 죽음이 이 작업을 완성하지 못하게 막았다. 르포르(Claude Lefort, 1924-2010)는 이 작업에다가 수많은 주석들을 붙이면서, 작품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에서 지각의 현상학(1945)이 암시했던 이원론과 의식의 철학이 둘 다 명백하게 비판되었다. 다른 한편 이 작품은 지각의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이라 특징지워진다. 여기서 존재론적 접근이란 메를로-퐁티의 견해로는 현상학에 대한 진실한 의미화작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생활 세계(ce Lebenswelt)[가 중심이다]. 모든 표현이 뿌리박혀 있는 생활세계는 온존재(Etre)로 이해되어야 하며, 절대적 의식의 작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당초문양의 교차(l’entrelacs-le chiasme)」이라 소제목이 붙은 장을 제외하고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의 작성된 부분은 메를리-퐁티가 죽 고려해왔던 작품의 입문에 해당한다.
철학적 질문의 의미에 지지를 받으면서, 객관적 사고의 비판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를로-퐁티는 그 비판을 여러 철학들 한 가운데서 기준점을 찍는다. 이 여러 철학들은 그 비판을 넘어섰다고 소위 주장하고, 따라서 온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폭로했다(dévoiler)고 주장하고 있다. 지각적 신앙(la foi perceptive)의 세계는 내재성(immanence)과 동시에 초월성(transcendance)이며, 주관성의 종속(tributaire 의존)적이며 동시에 자기 변이들에게 하찮은(indifférent, 무관심한)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의 목표(le but)는 겉으로 모순적인 차원들을 조정하는 것[화해시키는 것]이다.
과학적 태도는 침묵으로 현상성의 계기[순간]를 통과하고, 경험 전부를 마치 “큰 대상(grand Objet)”으로서 생각했던 세계의 사건(comme événement)처럼 이해한다. 반대로 반성적 태도[반사적 태도]는 세계를 의미화로 축소시키고, 비반사적인 것(l’irréfléchi)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시초를 무시한다. 이러한 것은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경우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의식은 여기에서[사르트르 변증법에서] 마치 무(un néant)처럼 정의 된다. 그것[무]의 차이는 즉자(l’en-soi)와의 자기 동일성으로부터만 주장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그 동일성을 동일성 자체로부터 떼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은 세계의 타자성에 열려져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결책은 메를로 퐁티의 눈에는 형식적으로 남는다. 그 해결책은 본질의 평면위에 자리하고 있지, 효과적인 경험의 평면위에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해결책은 관념과 실재론의 대립을 확인할 뿐이며, 인위적 논리의 덕분에 이 대립을 동일성으로 변형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오직 현상학적 환원만이, 세계를 선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한 존재의미를 밝힐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후설의 잘못은 주체를 환원에 종속 시키는 것이다. 이 때 주체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때에 실증적이고 완성된 본질들의 우주[세계] 안에서 경험을 흡수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또한 이리하여 [세 가지 점에서] 오해하고 있다: 세계 속에 주체가 뿌리내렸다는 것을, 언어 속에 에이도스적 변이가 뿌리내렸다는 것을, [게다가] - 경험이 진실로 본질의 열린 스타일일 뿐인데- 경험 속에 본질이 뿌리내렸다는 것을 오해하고 있다.
메를로-퐁띠에 따르면 실재론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적 관념론은 각각의 “존재론적 실증주의”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 둘 다는 정의된 존재자에 – 사실이든 본질이든 - 근거한 현상성을 근거지울 따름이다. 그리고 인식을 마치 충전처럼 – 사실적 일치 또는 지적인 소유[대응적 관계든 정합적 지식이든] - 이해한다. 이리하여 현상을 특징지우는 불투과(l’opacité, 불투명)와 잠복(la latence, 잠재)를 무시한다.
그럼에도 이런 것이, 온존재(l’Etre)에서 우리가 질문하는 연관에서 끌어내야만 하는 귀결[결과물]이다: 질문들 각각들을 살찌우게 하는, 온존재는 어떤 지적 능력도 흡수하러 오지 못하는 심층(une profondeur) 속에서 나타난다. 일치라는 이면이 아닌 간격(une distance)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온존재는 사실보다 더 “높은(plus haut)” 자리를, 그러나 본질보다 “더 낮은(plus bas)”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존재론의 의미는, 존재론이 주제로 삼는 온존재에 의해서 그것[존재론]의 고유한 발전을 작동하게 하는(prendre acte) 것이며, 이것에 따라서, 존재론의 의미는 온존재를 전면에 내세워 파악하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은 “간접 존재론(ontologie indircte)” 즉 “내재 존재론(intra-ontologie)”이다.
“당초문양의 교차(l’entrelacs-le chiasme)”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에서, 메를로-퐁티는 ‘볼 수 있는 것(le visible)’애 대해 자신의 존재론의 축을 묘사한다. 접촉(le toucher 촉각)을 특징지우는 가역성(la réversibilité)의 모든 귀결들을 끌어내면서, 그는 기원적 꼼(entrelacement, 새끼꼼, 얽힘)을 밝힌다.
이 기원적 꼼을 그는 느낌(le sentir)과 세계(le monde)의 “교차”(chiasme, 염색체 교차, 꼬임)라고 불렀다. 사회적 소자아(le soi)가 그의 신체에 의해, 그래서 세계는 현상성(la phenoménalité)에 접근한다. 따라서 신체와 세계의 대립은 “살”(une chair)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넘어서게 된다. 그 “살”은 온존재(l’Etre)에 대한 존재하는 의미를 지칭한다. [따라서] 살은 사실(le fait)과 본질(l’essence)의 중간참(à mi-chemin)이며, 구현되었다는 스타일(un style)이며, 살(肉, 육)이 보도록 되어 있는 것의 뒤로 후퇴하면서 만이 나타나는 차원(une dimension)이다. 이리하여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가시성(la visibilité)은, ‘볼 수 없는 것’에 근거한다. ‘볼 수 없는 것’은 가시성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비밀스런 잎맥(la nervure, 묶은 끈, 책을 묶는 실끈)과 같은 것이다.의미는 자치적인 우주로 되돌려지는 것이라기보다,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것(imprésentable)’이고 모호성(cette obscurité, 모호한 것)이다.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것(cet imprésentable)’에 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원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la présentable)이다. 모호성은 경험의 핵심 속에 있으면서, 경험으로부터 표현할 작품을 살찌우게 한다. 이로부터 말투(la parole)로 이행은 의미의 구현을 극복하는 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에게 다른 살, 즉 목소리의 살을 부여한다. 그의 작업 노트들을 읽으면, 메를로-퐁티는 죽 염두에 두었던 철학적 변전의 깊이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 강독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출판 1964.)라는 작품과 더불어, 중심적인 작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준다. (53VKE)
(5:08, 53VKH)
# 참조1 '중간 참'에 대한 글
Étienne Bimbenet, “Merleau-Ponty: Penseur de l’impensé” Dans Philosophie (2012), pages 122 à 124 < la perception est un acte ambigu, situé à mi-chemin de l'esprit et du corps, du sujet et de l'objet, de la connaissance et de l'être. >
#참조 2: Le monde sensible et le monde de l'expression - Cours au Collège de France, Notes 1953, Maurice Merleau-Ponty / Emmanuel de Saint Aubert (Annotateur), Stefan Kristensen (Annotateur), Métis Presses, 2011, P.223 [감각적 세계와 표현의 세계 사이에서 중간참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강의에서 중간참을 강조했는지는 의문이다.(53VLE)]
- NC: Notes de cours 1959-1961. Paris, Gallimard, 1996.
* 인명록 ---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유대계 독일 철학자. 현상학의 창설자. 역사주의와 심리학주의 비판을 지향성 분석을 통해 정교하게 했다. [아세키나제 유태인은 수학적이고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1905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극작가, 소설가, 정치활동가, 문학비평가.
1908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프랑스 철학자.
1924 르포르(Claude Lefort, 1924-2010) 프랑스 철학자. 어머니 가계가 남불 유대인. 고등학교 시절 교수가 메를로-퐁티였다. 소르본에서 공부하며, 트로츠키파에 소속. 49년 철학교수 자격. Socialisme ou barbarie(1948-1967)잡지 창간에 참여. Sur une colonne absente. Autour de Merleau-Ponty, 1978 .
1955 바르바라(Renaud Barbaras, 1955-) 프랑스 철학자. 생클로드사범출신, 철학교수자격. 파리1대학 교수. 후설, 메를로-뽕띠, 얀 파토카(Jan Patočka 1907–1977)에 관심. 메를로-퐁티(Merleau-Ponty, 1997) 경험의 전환(Le tournant de l'expérience : recherches sur la philosophie de Merleau-Ponty, 1998.
1967 뱅브네(Étienne Bimbenet, 1967-) 프랑스 철학자. ENS, 보르도 대학 교수. Nature et Humanité. Le problème anthropologique dans l’œuvre de Merleau-Ponty, 2004, Après Merleau-Ponty. Études sur la fécondité d’une pensée, 2011
생-오베르(Emmanuel de Saint-Aubert, s.d.)[1968k] 프랑스 철학자. ENS(1992졸?), 철학(1990)과 수학(1992)으로 교수자격 통과. 후설 문헌 탐구 소장.
크리스텐센(Stefan Kristensen, s.d)[1975?], 제네바 대학과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
Stefan Kristensen est philosophe, docteur des Universités de Genève et Paris 1 Panthéon-Sorbonne depuis 2007 avec une thèse sur “Parole et subjectivité. Recherches sur la phénoménologie de l’expression”. Habilité à diriger des recherches en philosophie à l’Université de Toulouse Jean-Jaurès depuis 2016. Il a été collaborateur scientifique à l’Unité d’histoire de l’art de l’Université de Genève (2010-16), et actuellement chercheur à l’Université de Heidelberg avec un projet financé par la Fondation Fritz Thyssen sur “L’inconscient intercorporel”. Depuis mars 2018, il est également coach indépendant (individuel et d’équipe). Il est spécialisé en esthétique contemporaine et en philosophie de la psychopathologie, et travaille à l’intersection de la phénoménologie (Merleau-Ponty, Maldiney) et de la psychanalyse (Marty, Anzieu, Lacan, Dolto). Parmi ses publications, “Parole et subjectivité” (Olms, 2010), “Jean-Luc Godard philosophe” (L’Âge d’Homme, 2014), “La machine sensible” (Herman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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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lacs n.m. 1.(당초 따위의) 엮음 무늬, 2. 얽힘, (생각·사건 따위의) 뒤얽힘 (=enchevêtrement), 3. [건축] 얽힘 [엮음]장식
entrelacement n.m. 1. 얽히게 하기, 얽힘(=enchevêtrement), 2. [비유] (이야기·생각 따위의) 뒤얽힘, 교착(交錯) /이는 얼금얼금에 가깝고, 엉김(혼란)에 가까운 것은 얽힘(un enchevêtrement) 이다. / 혼합(混合) un mélange. / 혼자하여 붐빔(un encombrement) 엉김(la coagulation, la maton) 응고된 상태를 이른다. / 얼룩덜룩함, 얼룩무늬로 뒤섞임(la .bigarrure)
entrelacer, 꼬다, 합쳐서 얽다. tresser, natter, tisser, corder, 땋다, 세가닥 땋기(natter)
chiasme n.m. [수사학] 변화 반복법, 교착(交錯)어법(C'est blanc bonnet et bonnet blanc)
chiasma n.m. [의학] 시신경(視神經) 교차, [생물] 염색체 교차(=chiasma optique)
(6:25, 53V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