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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던 중 위키 백과에서 살라흐 앗 딘, 즉, 살라딘에 대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문명을 하며 별 볼일 없는 군주 정도로 생각했었던 살라딘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적인게 아니겠습니까? 살라딘에게는 고대 지도자들과 무언가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복광도 아니었고 오히려 십자군 전쟁으로 수비만 줄기차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의와 신념이라는 그의 이름답게 자비로웠으며 약속을 잘 지키는 군주였습니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에게 존경을 받기도 했던 그의 삶에 대해 한 번 살펴보시죠.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 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 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 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터키어: 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경 - 1193년 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Yousuf) 였다. 그는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흐 앗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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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발베크의 영주였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흐 앗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흐 앗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 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흐 앗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흐 앗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1170년과 1172년 살라흐 앗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흐 앗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도 늘상 승리하였다. 단 한번,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흐 앗딘은 패배를 기록하였는데,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흐 앗딘은 대패하여 병력의 9할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흐 앗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흐 앗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흐 앗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흐 앗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날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흐 앗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흐 앗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흐 앗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흐 앗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흐 앗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흐 앗딘은 바이트 알 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흐 앗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흐 앗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흐 앗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흐 앗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흐 앗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흐 앗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흐 앗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흐 앗딘의 군대는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흐 앗딘은 리처드와 싸워 패배하였지만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흐 앗딘은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흐 앗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흐 앗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흐 앗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살라흐 앗딘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보고 놀랐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흐 앗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흐 앗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흐 앗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흐 앗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흐 앗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흐 앗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 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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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살라딘 존경해요. ㅎㅎ (여담이지만, 지금도 가끔 하고 온라인에서 회자되는 창세기전에도 살라딘이 나오죠. 볼 때마다 멋짐...)
영화 Kingdom of heaven에도 나오죠 / 가산 마소드 라는 이란의 국민배우가 살라딘 역을 했죠 / nothing and everything 이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예전부터 많이 한 애착가는 리더, 하지만 일반적으로 리더특성이 꾸지다고들 하죠.../변태방어의 달인이라고들 하죠...
성과 이슬람부대 사이에서 잠깐 벌어진 협상장면에서 ..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발리앙 역) " " 내 모든 것이지..." (살라딘 역) 돌아서며 부대진영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잠깐 뒤를 보고 약간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이장면이 기억에 남네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영화를 봤는데 순서가 바뀐것 같아요. 먼처음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다가 뒤돌아서 모든 것이지 라고 하는걸로 앎
갑자기 창세기전3가 생각나는건 왜지......
포로학살이 눈에 걸리는군요. 아무래도 전 주관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살라딘에게 자비를 붙이다니... 제가 자비의 개념에 엄격한 편인걸까요? 휴우-,
끝까지 일관되게 자비롭거나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적이 불공정한 상황에 빠진다면 그 적의 불공정을 없에기 위해 노력을 다하겠다는 볼테르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원칙주의라면 이게 원칙주의일 겁니다. 물론, 볼테르가 강직하기는 했어도 학자에 불과합니다만.../ 더불어 볼테르가 죽기전에 신을 추종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날조입니다. 볼테르는 자유주의 원칙주의자 였어요. 다만 자유주의를 역설하면서 카톨릭의 폐단을 외친게 적을 만들... ) 이중 잣대를 대는 사람도 많죠. 예, 살라딘이 자비롭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 이중 잣대가 통했거든요.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런데 살라딘이 있었던 지방에 아랍인들은 살라딘 보다는 십자군에게 매우 포악했던 발바롯사를 더 높게 친다고 하더군요. 살라딘은 인자한 반면, 유럽인들의 목숨을 살려주거나 강탈한 재산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서 그 인자함으로 이후에 십자군 정벌이 계속될 여지를 만든 반면, 발바롯사는 아주 철저히 괴멸시켜 십자군 정벌의 끝을 맺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살라딘을 높게 평가하자 최근에 그 지방에서도 살라딘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살라딘의 관용과 포로'학살'을 잘 겹쳐보면 전세계적으로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비로움과 명예로움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로를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일부분의 측면에선 괴씸한 짓을 저지르고도 자비롭다고 이해받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대표적으로는 유럽의 검은 왕자를 들 수 있습니다.
살라딘을 배출한 쿠르드족은 지금 나라도 못 세우고 터키한데 300만 이라크한데 200만이 학살 당하고, 미국은 동맹국 터키한데는 아무 소리 안 하면서 200만명을 학살한 후세인한데는 전범 재판에 쿠르드족 학살도 죄목에 포함시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