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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예의 북쪽은 고구리와 옥저이고 남쪽은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 끝은 대해이며 서쪽은 낙랑이다. <後漢書>를 해석하는 동아시아 역사학에 의한 濊의 위치는 위의 지도와 같습니다. 즉 지금의 원산 일대가 예라는 것이지요. 濊와 貊을 합하여 "예맥"이라고도 합니다. 옥저와 고구리의 남쪽에 濊라는 땅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국사의 주장대로 라면 예라는 땅은 원산일대의 남쪽이라니까 지금의 속초나 강릉 정도가 돼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濊에 관한 설명을 보지요. "동예(東濊)는 기원전 3세기 이전 ~ 3세기예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으로는 강원도 강릉(명주)에 이르렀고 영서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하였는데, 서쪽의 마한 · 백제삼로가 통치 했다"라고 하지요. 예의 땅이 강원도 강릉에 까지 이르럿으며 강원도 영서 까지가 예라는 것으로 예는 강원도 일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沃沮에 관한 기록을 분석해 보도록 하겟습니다. 漢字는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따라서 漢字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漢字로 된 地名은 반드시 그 역사적 위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沃沮의 "沮"라는 글자로 옥저의 위치를 찿아 보자구요 "沃" 이라는 글자는 "(땅)이 기름지다" "밭에 물을 대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沃沮"라는 곳은 농사 짓기에 알맞은 비옥한 땅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국사는 옥저를 다음 지도 처럼 비정을 하고 있지요. 지금의 함흥이나 원산 일대를 말하는데 함흥이나 원산 일대가 중국 사서인 後漢書,〈제85권〉에 “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 되며 밭농사에 좋다.라고 기록될 만큼 농사가 잘되는 지역으로 등장할 만큼 비옥한 땅인지는 생각해 볼일 입니다. 後漢書는 五胡十六國時代의 劉宋의 범엽에 의해 편찬되엇으며 다루는 시기는 25년~220년까지 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범엽은 어떻게 한반도 동쪽의 원산이라는 지역을 "흙은 비옥하고 좋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오곡이 마땅히 잘 되며 밭농사에 좋다"라고 할만큼 잘알고 있었을까요? 범엽이 한반도 동쪽을 답사하기라도 햇다는 것일까요? 위 지도는 劉宋(유송)을 빨간색을 모두 유송의 영토로 그리고 있지만 이 지도는 전형적인 中華史觀的인 부풀리기 역사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유송은 後漢이 멸망을 하자 漢나라의 皇族들의 잔당들이 급히 長江 하류로 내려가서 그 지역의 토호들에 의해 皇帝로 옹립되는 망명왕조에 불과한 것임에도 유송이 마치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지요. 長江의 남쪽은 五胡十六國 시대에에 이르러서야 개발되기 시작되는 것이며 이런 것이 동아시아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증거 입니다. 沮라는 글자는 沮水만을 지칭하기 위한 고유한 漢子이며, 沮水는 중국 漢水의 옛 명칭입니다. 즉, 한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지기 전의 이름이 沮水인 갓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키 백과는 沮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沮水의 위치 沮水는 漢水의 옛 이름이며 陝西省에서 발원하여 湖北省을 지나 長江의 하류로 흘러드는 장강의 지류라는 것입니다. 陝西省은 오도로스 평원입니다. 오도로스 평원은 黃河와 淮水 그리고 長江등 중원을 흐르는 3대 하천의 發源地 이며 .小江南이라고 할 정도로 농사가 잘되는 지역입니다. 오도로스 평원은 여름에도 기온이 27도 이상 오르지 않으며 겨울에도 영상 2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지역이라고 하지요. 중국 문명의 기원인 三皇五帝의 시기와 夏, 商, 周 秦등 묘에이며 淳維(순유) 나라들은 모두 오도로스에서 부터 시작 되었지요. 바로 옥저는 오도로스 평원에서 發源하는 장강의 상류적 지류이며 秦嶺이라는 산을 등지고 바다(옥저)와 맞닿은 땅인 것입니다. 고대 내륙 깊숙히 살던 사람들은 진짜 바다를 볼수 없엇기 때문에 장강과 황하 그리고 회수와 같은 하천을 海라고 표현하는 것이며 진짜 바다는 "大海"라고 표현했다는 것을 이해 해야 합니다 옥저가 필자의 주장 처럼 漢水의 상류의 지류라면 옥저는 沮水유역에 존재하는 땅을 의미하는 것이며 옥저와 고구리가 濊의 북쪽이라면 고구리 역시 옥저라는 땅 근처에 존재 햇다느 말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는 옥저의 남쪽이라는 기록에 따라 예의 위치를 비정해 보면 옥저가 진령의 남쪽이라면 .지금의 湖北省 정도에 위치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진령의 위치 오도로스 평원의 남쪽은 지금의 湖北省입니다. 湖北省의 위치 호북성의 남쪽은 湖南省입니다. 湖北과 湖南이라는 이름은 호남과 호북 사이에 대륙에서 2번째로 큰 담수호인 洞庭湖(둥팅호)를 기준으로 지어진 지역 이름 입니다. 洞庭湖는 고대에는 중국 대륙에서 자장 큰 호수였으나 상수(湘水)와 자수(資水), 원수(沅水), 예수(澧水)라는 하천에서 유입되는 土沙 때문에 규모가 작아 져서 지금은 중국 대륙에서 2번째로 큰 호수 입니다. 특히 澧水라는 하천은 濊水(예수)의 漢字 변형된 이름으로 보이며 실제로 에맥족은 濊水 유역에 존재 하는 종족이라고 합니다. 즉. 濊라는 글자는 濊水를 말하는 것입니다. 호북과 호남지역은 고대 馬韓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百濟와 馬韓은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백제가 잇엇다는 한반도 전라도 지역을 湖南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한반도의 湖南의 이름의 분명히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임에도 호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름이지요? 조금 더 後漢書의 기록을 검토해 보지요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예'는 '옥저'와 '구리'에 미치니,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 필자의 주자이 맞다면 진령과 그 남쪽인 호북성과 호남이라는 곳은 모두 조선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上古時代의 朝鮮이라는 것은 중국 대륙 거의 대부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한초에 큰 난이 있었는데 '연','제','조',나라 사람 수만호가 피하여 이 땅에 왔다. 한나라 초기의 대란이라면 아마도 유방이 흉노를 공격하다가 백등산에서 죽을 뻔한 사건을 말하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平城(백등산)의 위치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유방이 冒頓 單于(묵돌 선우)를 공격하는 백등산의 위치인데 이때의 흉노 최고 통치자의 위치가 산서성 북쪽인 代의 땅인 평성 근처라는 의미 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燕, 齊, 趙는 遼東(산서성과 하남성 북쪽과 산동반도 서쪽) 일대에 존재했던 나라들입니다. 바로 이 나라 사람들 수만호가 濊의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이지요. 흉노의 일파인 고구리와 선비 일족들의 위치와 겹치기 때문이며 이것은 고구리=묵돌 선우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더해 주는 기록이기 때문 입니다. 즉 묵돌 선우와 한고조 유방과의 백등산 전투는 紀元前 200년에 일어 났는데 기원전 200년대의 산서성 북쪽과 오도로스 평원과 그 북쪽은 모두 흉노의 영역이였으며 흉노는 부여와 영역과 나타나는 시기가 거의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따라서 흉노=부여 이며 부여는 232년 부터 존재 하는 것이며 부여는 고구리 초기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 입니다. 232년이라는 시기 역사 흉노가 나타나는 묵돌 선우의 아버지인 두만선우의 재위 시기와도 거의 겹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두만 선우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약 220~209로 추정 하지요. 고구리 역사를 900년 이라는 舊唐書의 기록을 증명해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유력한 사건은 韓王 韓信의 유방에 대한 반란 입니다, 그러나 한신의 반란이 연, 제, 조 나라 라는 거대한 영역이 혼란에 빠질 정도 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한초의 큰 혼란은 이 두사건 이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초에 연, 제, 조나라 사람 수만호가 이 대란을 피하여 濊로 이주 한 것은 이 시기의 인구 밀도로 볼 때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後漢書의 기록은 濊의 북쪽은 흉노가 아니라 고구리와 옥저라는 것입니다. 즉 예는 고구리와 옥저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예의 남쪽은 辰韓이라는 것이지요. 진한의 위치는 마한의 동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한의 위치는 호북성 동쪽이며 전국시대의 韓나라 서쪽입니다. 중국 역사는 秦과 晉, 燕 , 齊라는 이름이 대륙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끊이 없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유독 韓이라는 이름만 戰國時代의 韓나라 멸망이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나라 멸망이후에 나타나는 이름은 漢이라는 이름입니다. 漢이라는 이름은 韓나라가 존재 하던 때에는 없던 이름입니다. 한나라의 위치 필자는 漢이라는 이름은 韓을 대체한 이름이라고 확신 합니다. 韓나라는 漢水의 상류에 존재하던 나라 입니다. 漢이라는 글자는 漢水만을 표현하기 위한 고유한 글자 입니다. 韓=漢일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沃沮 라는 지명은 한수 유역에 존재 했던 것 만은 분명하며 한수는 오도로스 평원에서 발원하여 대륙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長江으로 흘러 드는 장강의 최대 지류인 항수의 지류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의 동쪽 끝은 大海라는 것에서 대륙 예의 기록 해석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예 역시 한수의 유역에 존재 했다는 해석이 맞다면 예의 동쪽 끝이 대해라면 이 기록의 대해는 중국 동해안 이라야 하지요. 그렇다면 예라는 땅의 규모는 지금의 호북성과 강소성을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이 되기 때문 입니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예의 서쪽이 낙랑이라는 것이지요. 필자는 낙랑의 위치는 지금의 南四湖 일대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위치의 비정은 뭔가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만, 후한서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분명한 것이라고 확신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後漢書는 前漢書의 기록을 그대로 筆寫(필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 입니다. 현재의 잣대로 고대의 땅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특히 前四史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상머리에서 기록했다는 한계가 있는 역사서 라는 것이지요.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연'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왕에 올라, 나라를 전하니 손자 '우거'에 이르렀다. 우리 국사는 고대 중국의 역사와 우리 역사를 분리하여 구분하지만 필자는 고대 秦代 까지의 역사는 우리 역사라고 확신을 합니다. 燕, 齊 晉, 秦,韓등을 우리 역사로 대입하면 우리 고대사가 쉽게 설명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원삭' 원년['무제'년이다.] '예'의 군주 '남여'가 '우거'를 배반하고, 이십팔만호를 거느리고 '요동'내에 이르러 속하자 '무제'가 이땅을 '창해군'이라하였다. 이십팔만호라면 적어도 100만명의 인구가 이동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인구 기준으로 볼 때 민족 대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함경도의 원산일대가 濊라면 적게 잡아 120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현대도 이 지역의 인구는 120만이 안되지요, 요동으로 이동된 사람들이 濊의 땅에 있던 사람들 전부는 아닐 테니 말입니다. 즉 이 시기 이 정도의 인구가 밀집해서 예의 땅에서 살앗다면 예라는 땅을 너무 작게 설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요? 滄海(창해)의 위치는 정확하게 고증은 할 수 없지만 황하의 중상류 즉, 山西省 北西쪽과 접해 있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화살표가 시작 되는 지점이 창해로 보이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 오던 조조가 갈석에서 바로 보고 지었다는 관창해라는 詩의 내용에 滄海가 황하의 중상류인 산서성 북쪽를 말하는 근거가 존재 하기 때문이지요. 數年乃罷. 오랫동안 방치 하였다. 즉, 한무제는 창해군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말이며 통치하지 못햇다는 말인 것으로 보입니다.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 >· <眞番>四(部)[郡].據殿本改.{番音潘.} '원봉' 삼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나누어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사군을 두었다. ['番'음은 '潘'이다.] 원봉은 한무제의 여섯번째 年號 입니다. 武帝는 방치해 두엇던 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엇다는 것입니다.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 >.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에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소제는 무제의 아들이며 한의 8대 임금 입니다. 임둔과 진번 그리고 현도는 모두 산서성의 고대 지명이며 낙랑은 산동반도 패현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합하여 요동이라 하는 것이지요. < 玄 >復昭帝<句驪>. '현도'는 다시 '구리'가 회복 햇다. 구려가 회복했다는 것은 본래 현도는 구려의 영역이엇다는 말이며 현도의 위치는 팽성의 서쪽 즉, 현 山西省 北西쪽 입니다. 한무제에 의해 괴멸되다시피 했던 흉노가 서서히 고구리라는 이름으로 흉노의 옛 故土인 山西省 일대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기록으로 보입니다.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단단대령의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단단대령의 위치는 지금으로는 알수 없습니다. 낙랑이라는 지역은 의외로 남사호 서쪽인 하남에서 부터 호북성 동쪽까지로 보여 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단단대령은 지금의 秦嶺일 가능성이 크며 沃沮와 濊貊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라는 것은 樂浪의 범위는 서쪽으로는 한수 유역 까지라는 의미 이며 河南의 남쪽과 湖北 그리고 江蘇와 山東半島 西南부의 거대한 영역으로 구성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때에도 여전히 낙랑은 멀기 때문에 직접 통치가 안되었던 것으로 보여 지구요.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후에 그 (낙랑의)지경이 넓고 멀어 다시 동쪽 칠현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즉, 최초의 낙랑은 남사호 일대 엿지만 이후 낙랑의 범위는 점점 넓어 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무제가 정복한 땅을 낙랑이라는 治小를 통해서 다스렸음을 의미 하는 것이지요 都尉(도위)라는 직책은 秦나라와 漢나라의 朝廷에서 직접 파견하는 군사 조직의 책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漢나라는 낙랑이 너무 멀고 넓은 관계로 동쪽을 다시 七縣으로 나누고 낙랑의 동부를 관장하는 都尉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無大君長, 其官有侯·邑君·三老. 큰 군장은 없고 관에 후와 읍장과 삼노가 있다. 老라는 글자는 촌장을 뜻합니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어른이 스스로 이르기를 '구리'와 한 무리이다 예의 종족적 구성은 고구리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북 또는 호북의 예가 고구리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은 구리라는 종족의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기록이며 이에 따르는 구리의 영역 또한 어느 특정한 지역만을 지목해서 해석해서는 안됨을 의미 하는 것이지요. 好太王 碑文에 고구리의 舊民을 韓과 濊라고 적시 하고 있는 것으로도 고구리와 고대 중원은 동일하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韓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춘추전국시대의 韓 이외에 三韓 밖에서는 찿을 수가 없습니다. 言語法俗大抵相類. . 언어와 법과 풍습이 비슷하다 즉, 예의 언어와 풍습이 고구리와 같고 종족이 같다는 것을 同種同類(동종동류)라고 합니다. <樂浪>檀弓出其地. 又多文豹, 有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낙랑은 단궁이 나오고 또 표범이 많으며 과하마가 나오는데 높이가 삼척으로서 과하마를 타고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가 있다. 한반도의 과하마는 몽골로 부터 유입되엇다는 것이기 때문에 후한서의 과하마를 한반도와 연결지울수는 없는 것입니다.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바다에서 반어가 나오고, 사자가 오면 이를 모두 받쳤다. 班魚는 민물고기로서 한반도에는 없는 물고기 입니다.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沃沮와 濊와 樂浪이라는 地名을 한반도에서 찿는 것은 억지 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
첫댓글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예의 남쪽으로는 진한, 북은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대해 즉 바다와 접하는데 동쪽은 모두 지금의 조선의 땅이다.)
=> 今<朝鮮>之東皆其地也. 부분의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지금 조선의 동쪽(今<朝鮮>之東)은 모두 그 나라(예)의 땅이다'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마치 '예의 동쪽은 지금 조선의 땅이다' 라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3.15 15:44
@무명 저고리 내용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씀 드리지 않으려 합니다. 한문의 번역 문제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今<朝鮮>之東 은 당연히 '지금의 조선 동쪽' 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나요?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이십팔만호를 거느리고 '요동'내에 이르러 속하자 '무제'가 이땅을 '창해군'이라하였다.)
=> 본문에서를 이를 두고 28만호의 인구가 '이동' 했다고 보시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인구가 이동했다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28만호의 사람을 이끌고 한나라의 영역 안으로 이주해 왔다면, 이들은 땅을 한나라에 바친 건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 한무제가 '그들의 땅'(其地)을 창해군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는 그 이전에는 한나라 영역이 아니었던 지역이 이 사건으로 비로소 한나라 땅이 된 것 같은 뉘앙스가 되지요.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유태인들이 이집트 탈출하는 출애굽기처럼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28만호가 사는 지역의 통치권을 중국에 넘겨 한나라가 28만호가 사는 지역을 새로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인구가 이동한 게 아니라, 인구가 사는 땅의 '주권' 만 이동한 셈이 되지요.
참고로 내속(內屬)이라는 건,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가 귀화한다는 의미만 갖는 게 아니라 (사람의 대규모 이동 없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속국으로 복종한다는 의미나, 한 지역이 다른 나라에 복종하여 귀부하겠다는 의미를 모두 포괄합니다. (예컨대 백제가 (고구려 견제를 목표로) 북위에게 내속하겠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무른 님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실제로 이 시기에 동아시아 동부는 격랑의 시기를 지나면서 한반도로 인구가 유입 된것으로 보기도 하지요.
좀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인것 같습니다
필자는 발해와 창해를
산동반도 끝 지점을 기준으로 북ㅊ?ㄱ은 발해 남촉은 창해로 학석을 합니다.
따라서 창해군은 산동반도 남쪽의 미산호 동쪽이라고 생각 하며 그 땅이 예의 땅이라는 생각 입니다.
@무명 저고리 제가 스마트 폰으로 답글을 쓰는 관계로 정확한 답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시간 되는 대로 답글 올리지요
@무명 저고리 제 이야기는 예의 위치가 어디인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속' 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입니다. ^^
즉, 위 구절이 인구의 이동일까, 인구의 이동없이 땅의 귀속문제일까의 이야기지요. (그게 어느 지역이든지 말입니다.)
"한반도에 과하마와 표범이 많다는 기록은 없다."
=> 일단 과하마는 건너뛰고 표범 부분만 살펴 보겠습니다. 일제시대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해로운 맹수를 제거한다' 는 명목으로 대거 사냥하게 되는데, 공식적인 집계로만 잡힌 표범의 수가 624마리 정도라고 하고, 1960~70년을 마지막으로 남한지역 표범은 사실상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금 검색해 보시면 일제시대 한반도 표범 사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참고로 1970년 경상남도에서 잡힌 (아마도) 남한지역 마지막 표범 포획 기사와 사진을 첨부해 봅니다. (경향신문 1970. 3. 6. 7면 좌하단)
만약 표범이 최근까지 살았다면 당연히 정부가 '멸종위기종' 같은 걸로 지정했을 겁니다. 실제로 표범은 멸종위기종입니다. 구체적으로 환경부에서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에 의거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에 해당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70년대 이후 남한지역에선 이미 멸종했다 봅니다만....)
종류로는.... 한반도 표범은 '아무르 표범' 에 속하지요.
아참, 앞에서 일제시대 사냥된 표범 수가 624마리라는 말의 근거입니다. (국립생물자원관 홈피 중 '멸종위기 야생생물' 설명에서 발췌)
@좋은사랑 그러게요.
이 말씀이 맞다면 제가 예를 잘못 든것 같군요.
"海出班魚, 使來皆獻之. (바다에서 반어 나오고, 사자가 오면 이를 모두 받쳤다) - 班魚는 민물고기로서 한반도에는 없는 물고기다."
=> 후한서에서는 분명 위와 같이 나오지만, 삼국지에서도 예의 기록에 비슷한 내용이 있으니 비교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그 바다에선 반어피가 나오고, 땅에서는 표범이 많으며, 또한 과하마가 나오는데, 한나라 환제 때 헌상한 바 있다)
모두 '예' 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니, 후한서의 '반어' 와 삼국지의 '반어피' 는 모두 같은 생물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반어' 라는 건 그 가죽을 벗겨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동물
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반어피를 반어라는 물고기의 가죽(껍질)이라 볼 경우, 물고기 껍질을 중국에서 딱히 쓸 일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보통 저런 기록에 나올 정도의 물건들은 대개 가격이 비싼 귀한 교역품인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지 장담하긴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만.....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작은 물에 의지하여 살아 감으로 소수맥이라는 이름이 유래 되었다)
=> (대수맥이라는 게 따로 없다면) 小水는 어떤 특정 강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작은 물에 의지한다' 는 부분은 '소수라는 강물에 의지한다' 로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황하가 노란 색 강이면 다 지칭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황하' 라는 이름의 특정 강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
"有小水南流入海" (작은 물이 황하로 흘러 들어 가는데)
=> '작은 물' 을 '소수' 라는 고유명사로 바꾸면 될 것 같고..... 문제는 여기서 '入海'(바다로 들어간다)를 왜 '황하로 들어간다' 라고 번역했는가입니다. 海를 바다가 아닌 황하라고 보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아... 말씀 시원시원하십니다.^^ 묵은때가 벗겨나가는거 같습니다.
님께서는 전체 글의 맥락은 보지 않고 글의 부분만을 지적 하시는구요?^^;
질문하나 드려 보겠습니다.
大海는 무엇이며 그냥 海는 어떻게 다른가요?
海를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라고 생각 하시고는 중국 역사를
절대로 제닥로 해석 할수가 없지요.
중원은 내륙이며 내륙인들은 진짜 바다를 구경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해가 아닌 그냥 해는 황하와 회수 그리고 장강을 海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실제로 회수의 고대 이름은 夏海이며 화하족 이름의 유래가 되지요.
맥족은 지금의 산서성 북쪽에 거주하던 부족을 말하는 것이며
서안평의 정화한 위치를 모르고 역사를 해석 하면 제글을 이해 할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설명을이미 오래전 글에서 다 드렸음에도
제 글의 일부만을 읽고 문제를 제기 하시면 같은 글을 반복 할수 밖에 없습니다.
서안평은 요서로 불리지요.
요서는 산서성 서쪽입니다.
왜시촉이냐고 무는다면 제 전글을 일고 질문 하시기 바랍니다.
산서성 서쪽이 서안평이라면 소수가 되었든 작은 물이 되었든
그 물은 황하로 흘러드는 것이지요.
@무명 저고리 무명저고리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무명저고리님의 '옛 글'까지 모두 일일이 찾아가면서 읽어주리라 기대하시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이 글에 이 글이 연달아 쓰는 '시리즈 글' 의 일부라는 이야기도 없구요.
그렇다면 왜 海 를 바다가 아닌 황하로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글쓴이가 간략하게라도 이 글에서 언급을 하시는 게 더 좋을까요, 아니면 독자가 알아서 무명저고리님의 모든 글을 뒤져가면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게 더 좋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급적이면 어떤 주장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가급적 논의하지 않은 채 외형만 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한문 번역을 볼 때 海 를 '황하' 로 해석하는 게 이상
@무명 저고리 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어떤 '맥락' 이 있다면야 海 를 황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맥락이 무엇이기에 海의 문의적 의미를 벗어나 '황하' 라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건 제 몫이 아니라 글쓴이의 몫이겠지요.
그러니 한문의 기초 해석에 대한 제 댓글의 답변으로 '제 전글을 읽거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답변하시는 건 적절한 답변으로 생각되진 않는군요. 마치 '네가 알아서 찾아봐' 라는 식으로 들리기도 해서 조금 불쾌하기도 합니다.
무명님도 제 댓글 스타일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그림자료 같은 걸 인용할 수 있으면 그것까지 가져와서 상당히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댓글을 달고 있다고 생각
@무명 저고리 합니다. 그게 댓글다는 예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전 지금 이 댓글에서 서안평이 어디인지, 요서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 주장 하나만 절대적으로 옳다. 다른 건 다 틀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니까요. 여튼 지금 이 글의 댓글에서는 한문의 해석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요)
@좋은사랑 님은 제 답글은 읽고 계십니까?
역사를 저보다도 많이 공부하고 알고 게신듯 하시기에 본론만 말씀드린 건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동을 지금의 요동 반도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으시다면
님의 시각으로 제 글은 황당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전글이 요동의 위치가 어디이가를 설명한 글인데
그 글에는 아무런 댓들을 달지 않으시는군요?
제안 하나 드리자면 역사를 해석하시는데 대해와 해를 같은 바다라고 해석 하시지 말고
해를 황하나 회수 그리고 장강이라고 해석해 보세요.
해를 바다로 해석하면 동아시아 고대사는 절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좋은사랑 제 글에 분명히 맥족은 산서성 북쪽에 존재하는 부족이며
맥족은 소수에 의지해서 살기 대문에 소수맥이며
그 소수가 작은물이 됏든 소수가 되었든 산서성에서 흐르는 물은 황하(해)로 흘러 들수 박에는 없지요.
@무명 저고리 이 글을 읽는 모든 회원들이 무명님의 과거 글들까지 남김없이 읽었으리라 단정하진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회원이 그러하듯 저도 이 글이 제가 이 게시판에 들어온 때에 가장 위에 있었기에 읽었을 뿐이지요. 그러니 이전에 무명님이 써온 글을 일일이 읽어 본 일이 없습니다. ^^
그리고 저는 무명님과 지금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海 를 '황하' 로 해석하는 그 배경주장의 옳음 여부는 제 관심 밖입니다. 제 관심은 어떤 맥락에 의해 海 를 '황하' 로 해석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동이. 예,맥. 고리. 삭. 은 이음동의어 정도로 보심이..
앵글색슨. 아메리칸. 양키등이 각각 개별의 종족이라는
예 맞습니다.
도의어라기 보다는 거의 같은 지역의 교집합적인 부족들의 이름으로 보입니다.
다만 동이가 조금 더 포괄적이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