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祚 南夫餘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고대 백제는 주몽에게 물먹은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형제를 데리고 지금의 한반도로 내려 와서 온조가 지금의
황해도 어디엔가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 된다.
<三國史記>는 "沸流는 소금기가 많은 땅을 차지 하여
農事를 지을 수사 없게 되자 自殺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나라의 君王이 농사가 되지 않아서 자살을 햇다는 역사의 논리는
<三國史記>를 믿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만을 제공할 뿐이다.
君王이엇던 沸流를 한갖 농사꾼 정도로 밖에는 설정하지 못한 것 아닌가?
수렵 유목민이었을 北夫餘 사람들이 한반도로 내려와서
곧 바로 농사를 지엇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온조가 세운 나라를 百濟로 가르치지만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역사다.
溫祚가 세운 나라는 夫餘이며 북쪽의 夫餘와 구분하기 위해
북쪽 夫餘를 北夫餘, 그리고 온조가 세운 나라를 南夫餘라 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 國史가 이 대목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4세기 이후에는 분명히 한반도에 백제가 존재 하고 있는데
온조로 부터 시작 되엇던 한반도의 부여가 언제 어떤 이유로
백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는 처음 부터 백제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와 같은 것이 우리 역사, 특히 백제사를 심각하게
歪曲하고 잇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지금 부터 백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일본이 바라 보는 백제를 포함해서
백제의 형성 과정을 민족 이동 경로 까지 찿아 내어 살펴 보도록 하자.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한반도 백제만을 믿고 잇으며 백제가 遼西와 같은
지금의 중국 대륙에 뚜렷한 백제의 흔적이 발견 되자
"백제의 요서 진출" 정도로 역사를 절충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부분의 재야 사학은 대륙에 존재 햇던 백제의 그림자를
온조의 형인 비류가 세운 또다른 백제가 존재 햇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 비류 백제가 4세기에 한반도 백제와 결합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비류 백제는 그 어디에도 기록적 실체 없이 "그럴 것이다"라는
추정적 역사관에 불과 하다 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百濟 建國者는 仇台
다시 말하지만 한반도 백제의 실질적 건국자는 "優台"로 알려져 있다.
우태는 소서노의 남편이자 비류와 온조 형제의 아버지로 알려 잇다.
그러나 <隋書>는 백제의 건국을 "仇台"라고 전한다.
구태 百濟는 처음 부터 백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十濟'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十이나 百은 백제의 규모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백제는 초기는
十이라는 숫자에서 보듯이 규모가 작은 해양 세력의 결집을 의미하는 것이고
百이라는 濟는 거대한 해양 세력의 총 결집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濟"란 "건너다""나루터"등의 뜻으로 쓰이는 글자지만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부두"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구태 백제는 상인들 특히 국제 무역업에 종사 하던 세력이 만든 나라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구태 백제는 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래인-야요이
이때의 왜의 본류는 長江 중하류의 남방계 쌀 농사를 경작하는
정주민족으로서 지금의 일본 역사학계는 야요이 문화의 본류로
바로 長江의 倭를 기정 사실화 하고 잇다.
바로 이들이 바다를 건너는 도래인들인며 이 도래인들이
지금의 큐슈와 한반도 남부에 도착을 하고 큐슈와 한반도 남부에
벼농사가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와 큐슈는 도래한 야요이 사람들이 정착 햇을 것이고
뒤 늦게 한반도에 들어 온 수렵유목민족인 온조 부여 사람들과 충돌이 잇엇을 것이지만
농경민족이 수렵 유목민을 당해 낼수 없엇을 것이고
한반도는 온조 부여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初期 仇台 百濟의 위치는 遼東으로 보이지만 4세기에 나타나는 近肖古王에 의해
지금의 중국 동해안 大部分이 구태 백제로 편입되는 것이며
이때 한반도의 온조 부여도 近肖古王 시대에 구태 백제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며
일본 열도 역시 구태 백제의 일부분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다같은 시기에 백제의 그림자가 드리워 지는 이유이다.
日本의 百濟 =くだら
일본은 백제를 "くだら" 즉 "쿠다라"라고 표현을 한다.
일본이 어떤 어원적 근거로 백제를
くだら라고 하는 지는 아직 까지 밝혀 지지 않고 잇다.
그리고 くだら의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설정을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쿠다라의 역사관은 일본 역사의 정설은 아니다.
일본 국사는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교과서 마다 다른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위의 쿠다라는 일본 역사의 일부 주장이다.
韓半島에 대한 일본 역사의 主流는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내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는 일본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말하는 극동 아시아
일본은 자신들의 이동 경로를 위의 지도와 같이 설정하고 잇다.
倭의 移動
즉, 흉노의 본류거 산동 반도와 요동을 거쳐서 한반도로 건너가서
일본 열도로 도착한 세력과 장강 중하류의 쌀 특히 논에서 쌀을 경작하던
야요이 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일본 열도의 유입을 말한다.
한반도 남부와 큐슈는 아열대 작물인 논농사에 의한 벼 재배가 가능핸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 유입된 사람들은 남방계 게열의 사람들이 맞을 것이며 이와 같은 이유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언어 구조는 수메르 언어를 바탕으로 한다는 가설이 가능 하다
한반도에서만 나타난다는 卵生神話와 天孫神話가 결합되는 신화가 나타나는 이유가
한반도에는 북방계 수렵민족의 천손신화와 남방민족이 가졋던 난생신화의 결합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 하는 것이다.
일본의 또다른 주장은 마자르 또는 마라하라 계열의 말갈계 민족의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 남족으로 이동한 민족이 소위 말하는
"새끼줄 무늬 토기"인들이라는 것이다.
위 지도는 穢와 貊과 古代朝鮮의 범위가 축소되기는 햇지만 일본의 역사 인식은
자신들의 민족 형성이 북방계와 무관하지 못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정말 없어 졌으면 좋을 것 같은 일본의 뿌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한반도인들과 大同小異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 열도로 밀려드는 북방계 대륙인들은
대부분 지금의 오오사카인 나라현으로 몰려 드는 것이며
남방의 漢族들인 倭人들은 지금의 큐슈에 정착하는 것이다.
日本 民族의 形成
이와 같이 일본 민족의 형성은 일본인들의 방언에서도 뚜렸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일본의 서일본과 큐슈와 한반도 남부의 역사는 왜의 역사 일수도 잇다.
이런 이유로 일본 역사의 딜레마는 倭는 漢族이라는 것에 있다.
중국의 동북 공정은 우리만의 憂慮에 그치지 않고
일본 역시 동북 공정을 두려워 하고 잇는 것이다.
지금 중국의 동북 공정은 한반도를 넘어 큐슈와 서일본 열도 까지를
중국의 역사로 설정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이유로 지금의 알본은
2050년의 동북아 역사 지도를 아래와 같이 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2050년 한반도와 동해성이라 불리우는 일본의 남부는
중국 영토가 된다는 가상 시나리오
지금의 일본은 흉노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민족으로 자신들을 구분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역사를
고구리와 분명하게 선을 그어 놓고 역사를 쓴다.
지금의 일본은 고구리를 東胡 즉 흉노로 보고 있다.
즉 일본의 역사 프레임은 한반도 남부와 큐슈
그리고 서일본은 남방계 민족이 형성한 문화라는 인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설정을 하고 잇는 것 같다.
이런 이유가 확대 되어 중국의 동북 공정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經濟大國이며 潛在的 軍事 大國이기도 한 일본의
이와 같은 憂慮는 역사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태평하다.
경제 대국도, 군사 대국도 아닌 우리는 어찌 하여 이렇게 태평스러운가?
이와 같이 우리가 태평스러운 이유를 필자는
"우리는 역사를 잃은 민족이기 때문"라고 감히 정의 한다.
具體的인 뿌리 역사를 내놓지 못하고 神話的 要素가 가득한
단군조선 만으로 역사의 뿌리를 찿으려다 보니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신화의 뿌리를 박고 있는 민족이
어떻게 역사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
고구리는 동호이며 동호는 흉노라는 것을 중국과 몽골 터어키 일본등
모든 나라들이 인정하고 잇음에도 정작 當事者인 우리는 흉노의 피가
한방울이라도 튈까봐 野壇法席이다.
그러면서도 고구리는 우리 역사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이 말하는 것 처럼 마라하라 즉, 마자르게열의
말갈계와 남방의 한족이 섞여 만들어진 민족인가?
남방의 한족의 문명적 역사는 五胡十六國 時代에
東晉과 같은 나라들이 急造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漢族
漢族은 두가지로 구분된다고 한다.
바로 남방계 한족이 倭와 같은 種族이며 북방계 漢族은 우리 한반도인들과 같이
흉노와 不可分의 關係를 形成하는 것이다.
大陸 百濟
백제를 우리 만의 역사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백제는 한반도와 고대조선의 중심이엇던 山東半島
그리고 지금의 광저우와 베트남의 북부에 까지 이르는 영역을 자랑하던 나라이다.
즉 백제는 한중일의 교집합적 국가인 것이다.
대부분의 백제 유물에서 남방 중국 냄새가 물씬 나는 이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백제 금동 대향로
이러한 백제의 유물에서 더운 지방에서나 존재하는 악어를 조각한 이유는 무엇이며
남방 문화의 상징인 수닭이 맨 곡재기에 우뚝 서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반도가 작은 지역이지만 고구리의 흉노와 선비와 말갈 그리고 남방의 한족들 까지
다 함께 존재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일본과 다른 것이 있다면
흉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잇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은 흉노와 분명하게 역사의 선을 긋고 있다.
흉노의 역사가 우리 역사가 아니라면
고대 조선 그리고 부여와 고구리, 백제 신라는 우리 역사일 수가 없다.
흉노의 후예 국가는 아래 지도안에 존재하는 나라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좁은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보면 안된다.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이다.
탱리고도선우, 단석괴, 영락제, 징기스칸, 그리고 강희제에 이르기 까지
우리 역사의 정복 군주들이 추구하고자 햇던 민족의 영역은
바로 탱리고도선우의 영역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습니까?^^*
반론을 제게 하실때에도 작은 예의라도 갖추고 답글을 쓰시면 안돌까요?^^*
역사는 우리만 주장한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와 관련된 나라들이 함께 합의된 역사만을 정사러고 하는 것이지요.
즉 역사란 대차 대조표가 필요한 학문입니다.
구태가 고이왕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반도사관에 근거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적어도 구태는 한반도의 군주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 하니까요.
그리고 온조 백제가 유물적 근거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딱 잘라 온조 백제를 허구라고 하는 것은 조금 과한 느낌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저 역시 초기 한반도 백제 초기의 왕족들의 성씨는 고구리와 같은 해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 입니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말갈은 唐代에 부르던 이름 입니다.
즉 말갈이라는 용어는 6~7세기 경에 수 당조에 의해 불리우던 이름입니다.
말갈의 정확한 위치를 어떤 기록으로 증명 할 수 있습니까?
위 글의 일본에 관한 기록의 근거는 일본의 시각이라는 전제 하에서 쓴 글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어느 기록에 근초고왕이 지금의 일본 열도를 정벌했다고 되어 있나요?
@지다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肅愼->夫餘->勿吉->靺鞨->女眞->文殊이며 말갈이라는 용어는 수 당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말갈이라는 용어는 <구당서>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조가 만든 <북사>와 같은 역사서이 이미 등장을 하고 잇지요.
그이전에는 말갈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지다이 <구당서>등... 어떤 기록에 말갈이 1~2세기에 활동햇다는 기록이 잇는가요?
숙신이라는 용어는 <사기>에 등장하며 <사기>는 기원전 90년 이전의 기록이며
부여와 물길은 후한대와 오로십육국 시대에 불리우던 이름이며
오호십육국 시대를 평정한 수와 당대에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며
거란(요)에 의해 여진으로 불리우고 청대에 이르러 문수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역사의 기록 입니다.
<구당서>는 940년 대의 기록물입니다,
@지다이 스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 하는 것과 사용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물론 文殊라는 말은 개천홍성제의 조상 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문수부살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기에
문수라는 말은 오래전 부터 그들 스스로 사용해 온 것으로 추정이 되지요.
즉 숙신에서 부터 여진이라는 ㅇ름 까지는 그들 스스로가 부르던 이름이 아니라
남의 역사서들이 지짗하던 용어지요.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밝힌 기록은 청대에 등장 한다는 말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梁나라가 존재 햇다는 그 시기에 중국의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백제의 강역을 장강의 양쪽을 모두 차지 햇다고 기록 하고 잇는데
왜 우리는 암조의 망명 왕조에 불과한 양나라에 백제가 영향을 받앗다고 생각 할까요?
기록대로라면 양나라는 백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 불과 하며
양나라는 그 흔한 유물 하나 남겨 놓고 잇지 못하느데도 무근 이유로 백제가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동아시아 역사가 주장하는 역사와 기록에 등장하는 역사와의 틈새는 양립 할 수 없습니다.
@지다이 오호~~~!!^^*
무리한 주장은 님께서 하시는것 아닐가요?^^*
그런 기록은 믿지 못하고 "주장"이라고 하시면서 양나라가 백제에 영향을 주엇다는 것음 믿고 계시네요?^^*
제 글이 모든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겟지만 춘추필법으로 무장된 중국 역사의 허구를 들춰 내는데 주안점을 둔 글입니다.
중국 역사으 풍선 효과가 지다이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듯 합니다,^^*
역사에 진정으로 관심이 많으시다면 깊이 깊이 연구를 해보세요.
문구 하나, 기록의 용어 하나에 수 많은 날을 고민 하지 않고서는
그리 쉽게 우리 역사의 진실에 접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
반갑습니다..^^ 먼저 개병도와 개석호와 조선사편수회랑 이음동의어인 강당사학파와 잔나비와 짱깨들을 쳐죽이고 싶습니다..^^ 한반도 삼국시대로도 이렇게 복잡한 데 하물며 대륙삼국을 마음에 상정하고 또 거기에 따른 한반도의 위치 설정에 따른 고대사가 무척 어렵습니다...
분서갱유의 진실을 알고싶고...
첨수도 가림토 진실을 알고싶고...
그리고 500 여 년 동안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수없이 개작한 개좃선 귀태왕조 신진사대부 유생들을 부관참시하고저...
한번 각인된 지식으로 부장된 나이든신 분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게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느낌 입니다.^^*
반도사관과 지금 까즈이 재야 사학이 주장하는 모든 근간을 뒤 흔드는 필자의 역사 이야기가
짧은 시간에 해결될 수는 없겟지요.
적어도 한번쯤은 글쓴이의 관점에서 글을 일고 역사를 해석해 본다면 어떨까 하는 희망을 해 봅니다.^^*
우리 역사의 골격은 일제의 식민사관이 바탕이며
귀하께서 언급하신 이병도와 신석호가 일제의 충실한 역사의 개들이죠.
반갑습니다.^^*
의아한 부분 몇 가지 적어 봅니다.
1. "<三國史記>는 "沸流는 소금기가 많은 땅을 차지 하여 農事를 지을 수사 없게 되자 自殺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나라의 君王이 농사가 되지 않아서 자살을 햇다는 역사의 논리는 <三國史記>를 믿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만을 제공할 뿐이다."
=> <삼국사기> 의 해당 기록에는 비류가 '죽는다' 라고만 되어 있을 뿐 '자살한다' 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늙어 죽은 것일 수도, 병들어 죽은 것일 수도, 아니면 전쟁 중에서 죽었을 수도 있으니 이 기록을 자살이라 단정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이 기록은 매우 단순하여 비류가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 추론하기가 어렵습니다.)
해당 기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沸流以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비류는) 위례성을 보고는 돌아와 (온조의)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후회하다가 죽었다. (비류가 죽은 후)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
@좋은사랑 죽는다를 자살한다고 표현 해서 죄송 합니다.^^*
죽는다라는 것은 타살이 아나라 자살 아닐까요?^^*
@무명 저고리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원문 기록이 너무 소략해서 죽음의 형태를 짐작하기가 힘듭니다. ^^;
@무명 저고리 ㅎㅎㅎ 대단히 큰 실수 입니다..^^ 만약 자기가 출처를 대고 자기 류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모를 까 아니면 원문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글쟁이의 양심 입니다..^^ 그리고 글쟁이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품성이 나타납니다..^^
@지다이 <삼국사기> 해당 기록의 주석에는 비류를 시조왕으로 삼는 기록이 추가로 나옵니다. 대략의 내용은 이런 식이죠.
"일설에는, 시조는 비류왕인데,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나라를 세우는 데 소서노의 내조가 많았
@지다이 기 때문에 주몽이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비류와 온조를 자기의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 (중략 : 주몽의 전처 자식이 고구려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남쪽에 가서 별도로 나라를 세우자는 이야기) ....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비류를 '시조 비류왕' 이라 표현하고 있으므로 비류를 시조로 하는 정치체가 일정기간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비류가 바로 자살하고 비류집단이 온조집단에 바로 통합되었다면
@지다이 비류를 '시조 비류왕' 이라 인식하는 전승이 존재하기는 어려웠겠지요. 따라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비류가 단순히 자살하지 않고 '시조왕' 으로 인식될 정도로 몇 대 정도 왕위를 이었을 가능성도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 위 기록을 단순 자살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다이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비류왕이 죽은 이후 바로 온조 세력에 통합되지 않았다면, 이는 비류 세력이 나름대로 유지될 정도로 정착이 이루어졌다는 말인데, 비류왕이 미추홀이 위례보다 못하다면서 자살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지요.
그러니 저 구절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비류가 '자살했다' 고 단언하긴 힘들다는 것입니다.
2. "지금의 일본은 고구리를 東胡 즉 흉노로 보고 있다."
=> 일본이 고구려를 어떻게 보는 지, 그런 내용적 부분은 제 관심사가 아니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한 점은 '동호 = 흉노' 라고 인식하시는 부분입니다.
<사기> 흉노전을 보시면 그 유명한 묵돌선우 이야기가 나오는데, 묵돌선우 즉위시의 흉노는 동쪽에 동호, 서쪽에 월지의 압박에 처한 다소 약한 상태였다가 묵돌이 결국 동호와 월지를 모두 정벌해 흉노제국을 건설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흉노 당대에도 (설사 흉노와 동호의 혈통이 매우 유사하다 쳐도) 흉노와 동호가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유하자면, 고구려와 부여가 비슷한 종족이고, 고구려와 백제가 비슷하다고 쳐도 그 나라들이 같은 나라는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의 기록이며 중국의 시각으로 흉노를 구성한다는 것이지요.
胡는 秦 이전에 흉노를 부르던 이름이며 虜와 奴와 胡 그리고 戎은 모두 흉노의 다른 표현의 글자 입니다.
즉 기록의 싯점 마다 기록 하는 자 마다 다르게 표현 햇을 뿐 위 글자들은 모두 흉노를 짗ㅇ 하는 글자 입니다.
즉 秦代 이전에 동쪽 흉노를 동쪽 흉노라는 뜻의 東胡라 했다고 하며
종족과 관계 없이 흉노의 동쪽 종족을 모두 동호라 햇다는 것이지요.
@무명 저고리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종족이 비슷하다는 것이 같은 나라라는 의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구려와 부여의 종족은 거의 같으리라 생각이 되지만, 두 나라를 같은 나라로 볼 수는 없죠.
저도 <사기> 의 저 기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무명님 말씀처럼 중국인들이 호(흉노)와 동호가 실은 한 나라 또는 집단인데 잘못 기재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기> 기록을 반박하는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좋은사랑 고대 기록속의 "國(나라)"이라는 개념은 고대 국가의 나라라는 개념과 다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흉노와 조선 부여 선비등 북방 종족들의 이름이 모두 나라가 아니라
종족 또는 포괄적 지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사기>는 한과 흉노라는 2분법적으로 동아시아를 구분할 뿐입니다.
수많은 북방 부족들이 존재 햇겠지만 기록은 흉노일 뿐입니다.
漢 이후북방 부족들을 세분화 하여 기록 하는 것이지요.
奴와 胡, 虜, 戎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근거입니다.
<삼국지>에서 고구리를 설명하는 고구리 5부의 奴라는 글자 자체가 고구리는 흉노 국가임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좋은사랑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면 奴라는 표현은 <사기>와 <한서> <후한서> 그리고 <삼국지.의 표현이지요.
앞에 언급된 역사서들은 모두 한족 사관자들의 표현입니다.
虜와 戎, 胡라는 글자는 당나라가 편찬한 八史에 주로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호한융합의 정신에 따라서 특별한 용어를 찿을 수 없엇던 당조의 사관들이
奴를 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戎狄이라는 표현은 賊이라는 글자를 빼고 戎이라고 기록하는 식이지요.
예컨데 "고구리는 그들(백제)를 이기지 못하고 戎으로 돌아 갓다"라는 표현이 그것이지요.
@무명 저고리 지금 무명님 말씀을 보면 <사기> 가 한과 흉노라는 2분법으로 동아시아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무명님이 당대의 동아시아를 한과 흉노 2개로만 구분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기> 에서는 열전 체계로 보면, 흉노, 남월(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 정도), 동월(오월지방), 조선, 서남이(귀주, 운남 쪽) 등을 구분하여 적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흉노' 로 통합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은 <사기> 에는 없습니다.
무명님 말씀처럼 동아시아 북방 민족들(고조선, 고구려, 부여 등까지 포함하여)이 흉노에게 기인한 것이 사실일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기> 에서 그런 흔적을 읽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무명 저고리 다음으로 "고구리는 그들(백제)를 이기지 못하고 戎으로 돌아 갓다" 라는 표현.... 이거 좀 이상한데요? ^^
위 표현의 원문이 무엇일지 찾아 보니 아마 <수서> 동이열전 중 '신라' 파트의 기록에 나오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http://blog.daum.net/omye-mail/741 에서 동일한 번역과 그에 대응되는 원문을 찾았는데, 이게 무명님 글인 것 같습니다.)
원문으로 추정되는 건 다음 구절입니다.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무명 저고리 위 구절에서 ... 戎役, 相率歸之 라는 구절을 무명님은 '戎으로 돌아갔다' 라고 번역하신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오역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융역(戎役)이라는 것은 군역을 말합니다. (인터넷 검색해 보시면 '융역'이 군역 또는 병역을 의미한다는 것은 쉽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당장 Baidu 검색만 해 봐도 용례와 함께 나옵니다.)
그러니 저 구절은 '戎으로 돌아갔다' 는 뜻이 아니라 '군역이 (극심하므로) 서로 무리를 지어 귀화해 왔다' 는 의미가 됩니다.
@무명 저고리 위에 제시된 원문 전체에 대한 위 사이트(무명님 사이트??)로 보이는 곳의 해석과 제 해석을 대조해 보겠습니다.
- 위 사이트 해석 : 먼저 백제에 의지하다가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하자 고려인들이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융(戎)으로가 돌아갔는데 후에 강성해져서 백제를 습격하자 가라국에 의지하였다
- 제가 생각하는 해석 : 신라의 그 선대(앞 구절은 진평왕 언급이므로 그 선대[其先]는 진평왕 선대의 신라를 지칭)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뒤에 백제의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戎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신라에 귀화하니(이 파트가 수서 신라전이므로 대명사 之는 신라로 해석)
@무명 저고리 마침내 신라는 강성해져서(강성해진 주체의 명시적 언급은 없지만 이 파트가 수서 신라전이므로 당연히 신라가 강성해졌다고 해석) 백제를 습격하고.....
걍 쪽바리 눈으로 안보고 말래요. ㅎㅎ
완전 백지로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도. 갸들 눈으로 민족형성과정을 본다는 건. 고양이 보고 사자라고 하는걸 믿게심
고맙습니다..^^ 치열하게 논리를 전개하셔서 독자와 논객의 격을 높이신 무명 저고리님 좋은 사랑님 지다이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