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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캔버라한인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완일
썬다싱은 인도의 경건 인물로 힌두교 가정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그가 체험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으며, 예수를 일생 전했던 전도자이며 신비가이다. 13세기의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khart), 18세기 임마누엘 스웨덴볼그(Emmanuel Swedenborg)와 더불어 삼대 세계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한사람이라 칭하며, 타고르와 간디와 더불어 인도가 낳은 위대한 삼인 중 하나로 꼽힌다. 티벳에 예수를 증거하러 히말라야 산맥의 얼음길을 열 번도 더 넘다가 36세에 마침내 실종되고 말았다.
위대한 어머니
썬다 싱은 1889년 9월 3일, 인도의 북부 펀잡주 람풀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방의 아주 부유한 지주로서 가정생활은 매우 단란하고 평화로 왔다. 썬다 싱은 여러 아들 중 막내아들로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종교적인 감화를 크게 받아 후일에 위대한 성자가 되는데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종교적인 인물로서 아주 고상하고 순결하고 사랑받을 만한 행실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종교적인 인물과 교제하기를 좋아해서 그 집에는 항상 덕망이 높은 사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름철이 되면 여기저기 명산 큰 절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썬다 싱은 자연히 종교적인 성향이 많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썬다 싱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시고, 저를 사두(종교가) 되게 하신 것은 어머니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어머니 품속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은 이토록 깊은 것이었다.
절망과 방황
썬다가 열네 살 되던 해, 그의 인생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와 손위 형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 일은 어린 썬다의 마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을 던져주었고,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끼게 했다. 고독과 불안으로 병들어버린 그의 마음은 이제 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비탄에 젖어 기도했다. “신이시여! 당신 없이 나는 한 순간도 살지를 못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연모하고 갈급하오니, 오직 당신 안에서만 내 영이 쉴 수가 있나이다. 질식할 것 같은 이 불안을 거두어 주시고, 내게 평안을 주옵소서.” 그는 여러 종교를 기웃거리며 갖가지 방법으로 평안을 갈구하였지만 마음의 괴로움과 방황은 깊어만 갔다.
한편, 썬다는 교육을 받아야 했으므로 동네에 있는 장로교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그 학교가 기독교 학교니 만큼 자연히 썬다의 힌두교적 수행 태도는 교사와 학생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들은 썬다에게 기독교 교육을 더욱 강요하였다. 그는 점점 교사들과 학교를 미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이 갑자기 돌변하여 갔다. 성경과목을 싫어하여 교사가 성경을 읽으라고 해도 책 잃기를 거절하며 말썽을 일으켰고, 어떤 때는 그 시간에 불참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당혹한 질문들을 하여 교사를 괴롭히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학생이 되어갔다. 그의 행실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썬다의 원대로 3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공립 소학교로 그를 전학시켰다. 그랬더니 그는 이제 아예 발벗고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제 또래의 악동들을 모아 장터에서 전도하고 있는 전도자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고, 전도 집회 장소마다 쫓아다니면서 오물과 쓰레기를 집어 던져 집회 분위기를 풍비박산 내었다. 아무도 이 소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매주 착실하게 사원을 다니던 그 썬다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교장 선생님께 찾아가 성경을 한 권 사고 싶다고 제의를 해서 얼마 후 성경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져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갈가리 찢어 케로신 기름으로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그런 반면 그는 자기 종교로 마음에 만족을 얻으려고 요가의 달인(達人)을 찾아가서 묻기도 하고, 명상도 해보는 등 갖은 애를 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는 번민하다 못해서 자기가 찢은 성경 가운데 혹시 무슨 도움 받을 만한 게 없을까 하고 펴보니 “무릇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그는 기뻐하며 ‘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참 평안이 아닌가’하고 한순간 몹시 감격했다. 또 한 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보고 두 번째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썬다는 예수님을 믿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자살 결심
참된 진리를 찾지 못한 썬다 싱의 마음은 더욱 분열과 충돌과 번민으로 들끓었다.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구하는 평화를 얻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서 저 세상에 가서 구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서서 단호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신에게 매달리며 절박하게 간구했다. “이 천지간에 신이 있거든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저에게 바른 길, 참 도를 가르쳐 주소서. 만약 당신께서 나타나 저를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침 첫 특급 열차가 지날 때 레일 위에 저의 목을 깔고 자살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이시여, 참으로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나타나셔서 이 암흑의 공포를 거두어 주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현현
1904년 12월 18일, 자정 무렵이 되자 그는 밖으로 나와 찬물로 온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생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달도 어느덧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썬다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30분쯤 갑자기 방안 가득히 강렬한 빛이 비취었다. 썬다는 불이 났는가 하다가 곧 신이 응답을 보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욕을 가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때 그 빛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너와 전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렸단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듯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이 때까지 얻지 못했던 놀랄 만한 평안을 얻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했던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심을 깨달았다. 썬다가 일어났을 때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썬다 싱의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고, 그 후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되었다.
썬다는 잠을 자고 계시던 아버지께 달려갔다. 놀라는 아버지께 예수님을 뵈었다고 하니 아버지는 그가 잠꼬대 하는 줄 알고 “가서 자라. 엊그제 성경을 불태우지 않았니? 그리고 벌써 기독신자가 되었다고 그러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썬다는 똑바로 서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이 손이 악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죽기까지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결연한 각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예수님의 것입니다.”
박 해
1904년 12월 18일 새벽의 그리스도 발현 사건은 썬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한 것이다.
썬다는 그날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기이한 개종소식은 람푸르 일대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시크족의 전통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썬다의 이러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렇게도 다정스럽던 아버지와 가족들이 매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든 슬픔을 이겨 나갔다.
썬다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조카를 대단히 사랑하던 숙부님이 계셨다. 한 번은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고 썬다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더니 많은 돈과 값진 금은보석이 가득 들어있는 금고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의 두건을 벗어 그의 발 아래 놓고 아주 겸손한 말로 “네가 만약 그 외국 종교를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다”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썬다는 이때 숙부님의 이토록 겸손한 청을 거절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썬다의 눈에는 영광과 자비가 가득 찬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숙부님께 담대히 말했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 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가진 이 평안과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썬다 일가는 학교측과 람푸르 선교회 측에 항의를 해서 교장을 다른 학교로 전임시켰고, 선교회 측의 뉴톤 목사를 법정에까지 서게 하였으며 미션 학교는 문을 닫고 몇 안 되는 교인들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로푸르라는 곳으로 집단이주를 해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썬다는 학교가 문을 닫을 때 그도 고향을 떠나 루디아나 시에 있는 장로교 계통의 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 학생들은 이름만 신자였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고 적이 실망하고 얼마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썬다는 계속해서 설복하고 박해하는 가족 친척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보이기 위해 시크족의 경전도 버리고,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잘라보지 않았던 두발도 밀어버렸다.
모든 사람들 특히 그 형들은 몹시 격분하여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욕설과 학대를 했다. 밥도 같은 상에서 먹지 못하게 하면서 음식물을 개처럼 던져주었고, 가축과 같이 생활하게 했다. 그러나 썬다는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을 많이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는 결심은 변치 않았다.
집에서 쫓겨남
아무리 박해를 해도 변치 않는 썬다 싱의 마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마침내 최후 선언을 하였다. “가문의 이름으로 말하거니와, 우리는 너를 영원히 버리고자 한다.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지금 입은 그대로 가거라.” 그렇게도 사랑하던 막내아들을 아버지는 이처럼 단호하게 버렸다. 십자가를 각오했지만 썬다 싱의 가슴은 터질 둣 아팠다.
집에서 쫓겨난 그 날 밤은 몹시 추웠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신약 성경 한 권 밖에 없었는데, 썬다는 그것을 꼭 쥐고 로푸르 쪽을 향하여 하염없이 걷다가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그는 자신 때문에 쫓겨난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로프르를 향하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 발자국 못가서 갑자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배를 움켜쥐고 기진맥진하여 겨우 로푸르에 닿았고, 우팔 목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문지방을 넘었다. 목사에게 안기자 그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의사가 올 때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그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었다는 것과 너무 늦어 살릴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집을 떠날 때 점심밥이라고 준 그 밥 덩어리 속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썬다가 살아남아서 부끄러움을 나타내면서 기독 신자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썬다에게는 강한 확신이 떠올랐다. ‘주님께서 나를 무의미하게 죽게 하려고 암흑 중에서 구원하여 한없는 그 축복을 주실 리는 없다. 나는 더 살며 주님의 증인이 될 사명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 썬다는 심한 고통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다음 날 궁금해서 와 본 의사는 그늘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썬다를 보자 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의사는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어 미얀마에서 주님을 위한 전도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1905년, 건강이 회복되자 썬다는 루디아나의 또 다른 장로교계 학교에 보내졌다.
썬다 가족들의 무례한 침입 때문에 교장은 썬다를 수바투의 나환자 수용소로 보내어, 성공회의 레드만 신부님께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9월 3일, 16세의 그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병원 일을 거들어주면서 시간이 나면 우거진 숲 속에 고요히 앉아 묵상을 했다. 자신과 온 세상을 잊어버리고 마음과 뜻을 다 바쳐 눈물을 흘려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핍박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유세계의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모습이었다.
홍포를 입은 썬다
그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대로 세례를 받은 지 33일 만에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사두로서 세상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사두(인도 종교가)가 입는 사푸론 로브를 입고 인도 말로 쓴 성경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다. 그 외 그의 소유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살아계신 주님 한 분만이 그의 전 재산이고 소유이고 생명이고 힘이었다.
사두의 도복을 입은 16세의 어린 소년 썬다는 마음 속에 불붙는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인도 사람들의 영혼을 건지기 위해 사나운 물을 건너 전도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인도 종교가의 의복을 입은 썬다를 보고 처음에는 무조건 존경을 하였지만 일단 기독교인인 것을 알면 박해를 하였다.
그는 반석과 같은 믿음과 불같은 정열을 가지고 먼저 자기 고향으로 갔다. 몇 달 전에 죽음을 겨우 면하고 쫓겨난 그 곳에 가서 집집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받은 그 평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를 했다. 그리고 후로 가사울리, 솔론, 딕사이 그리고 심라에서 야외 전도를 했다. 그리고는 대륙을 횡단하는 장도에 올라 북쪽의 펀잡주로부터 연합주를 거쳐 봄베이, 마드리스, 켈커타까지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많은 고난과 핍박이 썬다의 길을 가로 막았다. 동상을 당하며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사람이 없는 산림 가운데 쫓겨나며, 짐승들의 굴에 들어가며, 벗은 발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과 핍박은 땅 위의 그 어떤 행복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했다.
첫 번째 입신
1906년 17세 되던 해, 썬다는 코드갈이라는 곳에서 스토크스 씨를 만나 함께 북인도를 돌며 수바투와 라호르에서 나환자를 돌봐주는 일을 했다. 스토크스 씨는 프랜시스의 청빈정신을 몸소 실천해 보고자 고국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먼 타국에까지 와서 탁발봉사생활을 하고 있던 전도인이었다. 썬다는 그와 2년 동안 함께 동행 하면서 프랜시스 성자의 정신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즉 어느 것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온 세상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신 평화와 기쁨에 대해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1908년부터 1909년 사이 2년 동안 북인도 지역과 한 번의 티벳 여행에서 온갖 위험을 겪으면서 전도했다. 회교도의 방해와 박해, 말라리아와 열사병, 눈보라와 히말라야의 급류 등 어려움 속에서 그의 목적은 오직 예수 증거에 헌신을 하였다. 밤 시간에도 자주 숲 속에 들어가 오래 기도하였다. 한번은 표범이 나타났으나 그는 꼼짝없이 기도하니, 표범은 마치 양순한 개처럼 사두 앞에 와서 앉더니 머리를 내밀었고 사두는 그것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였다. 깊은 기도 중에 ‘우주적 감정’을 체험하였다. 그의 얼은 깊이 모를 영(靈)으로 해서 히말라야 연봉 뿐 아니라 온 우주가 다 손안에 있는 듯 하였다. 그 앞에 있는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도 거룩하게 보였다. 걸터앉은 바위조차 온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1909년 12월 이 우주적 감정 체험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저녁 썬다는 라호르 지역 성공회 주교 레프로이(Lefroy) 박사로부터 성 요한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사제직 서품을 받을 것을 권유받았다. 평소에 잘 알고 존경하는 분의 제의라 썬다는 곧 동의하고 신학적 훈련과 목회생활을 위해 입학을 하였다. 위그램(Wigram) 신부와 웃(Wood) 신부가 교수였는데 이들에게서 성경과목들, 기도서, 교회사, 교의 변증학을 배웠다. 그러나 인도의 문화적 풍토에 토착되지 못한 인도교회에 그가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한 그는 신학교 생활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의 경건은 늘 묵상이나 기도를 원했는데 신학교의 생활이 그의 경건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또 주님을 위한 그의 헌신적, 희생적 자세를 동급생들이 인정해 주지 아니 했으며, 도리어 그들은 썬다의 경건과 전도열정을 비판했다. 그가 가장 갈등을 느낀 점은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되면 타교단의 교회에서 설교를 할 수 없고, 오직 성공회의 교구 내에서만 목회를 한정한다는 주교의 방침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를 8개월 만인 1910년 7월에 그만 두었다. 훗날(1922년) 제네바의 한 교회에서 간증한 그는 질문을 받고 자신의 신학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물론 나는 신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기대가 난관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교리며 교회사,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호교론 등 흥미있는 과목들을 가르쳐 주었으나, 진리를 가르쳐 주진 못했습니다. 오롯한 생명의 지혜는 진정 주님의 발아래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그의 발 아래에서 묵묵히 묵상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때 내게는 주께서 말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길속에서 고귀하신 주님의 마음과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둘도 없는 신학교는 바로 십자가 밑에서 그이 발을 붙들고 있는 것, 이것입니다.’16)
그리고는 계속 한 권의 성경책과 담요만을 가지고 부락마다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지리도 모르고 언어도 서투른 그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주로 나무 아래에서, 또는 바위 사이에서 묵상하고 잠을 잤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영혼은 더 맑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지도하에서 읽은 힌두 경전의 <解脫 Moksha >에 나오는 “매일 죽는 자는 살고, 매일 사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이나 로마서 14:8 말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과 접목시켜 ‘매일 죽자. 매일 죽어야만 눈이 떠지는 것이라면 어찌 천 번의 박해인들 견뎌내지 못하랴. 내 정신만 불이 되어 탄다면 내 몸은 아무도 죽이지 못하리라’는 신념으로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1912년 어느 날 히말라야의 은수 산인 중 특이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카일라스 산(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21,850피트)에서 209년 동안 거주해 온 ‘마하리시’(大聖師)를 만났는데 고향이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이며, 30세가 될 때까지 이슬람교도였다가, 30세에 자기 마을을 방문한 쟈르노스(Jarnos, 아랍어로는 Yernaus, Francis Xavier의 조카)에게 세계를 받고, 75세까지 전세계에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었다. 그후 이 산에서 계속 기도하며 묵상의 생활에 힘쓴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는 낡은 양피지로 된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두는 마하리시와의 만남을 생애 두 세 번 언급했고, 그후 1916년에 두 번째 만났는데 은사는 어떤 선교사에 대해 기도하면서 그 사람이 지금 처한 형편과 기도응답 받으려면 취해야 하는 태도를 다 알아 맞추는 것이다. 마하리시는 각종 약초와 식물의 뿌리를 말려서 빻은 것을 음식으로 하며, 자신의 이름은 그냥 크리스찬이라고 소개한다.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계시기 때문이란다. 1917년에도 그를 만났다고 밝혔다. 세 번째 만날 때에는 호기심이 많은 4사람(영국인 2명, 인도인 2명)이 은사를 만나려고 함께 출발했다가 길이 너무 험난하여 모두 포기하고, 마지막 길에 만난 어느 라마승과 함께 노성사를 만났다. 양피지로 싼 헬라어 고문 성경 요한복음서를 읽고 있었다. 함께 기도한 후 ‘썬다, 같이 떠났던 졋슨과 클리포드, 그리고 마시와 모한 랄은 다 돌아가고 그대만이 오셨구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뭣하러 그렇게 찾아오려고 하시었소. 주님을 찾아야 할 일이고, 그를 모시고 사는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일이오. 돌아가거든 부디 그들이 주님을 착실히 섬기라고 일러주시구료. 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리다’고 다 알아맞추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라마승에게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증거 하였다.
1913년 봄에 그가 티벳에 갔을 때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라마교 국가인 티벳에서는 썬다를 체포하여 사형수처럼 깊은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우물 속 송장들 썩는 냄새 속에 태연히 있다가 밤중에 우물 뚜껑이 열리면서 밧줄이 내려와 천사의 도움으로 구조되기도 하였다. 그의 전도를 말리지 못했다. 어느 해 티벳 전도를 위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눈길을 하루에 백리씩 걸음) 눈에 막혀 못 가고 머무는 동안 그는 기도 중에 입신하여 천국을 구경하였다. 그후부터는 기도하기 시작하면 20분이 지나 입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고 그 체험을 책으로 저술했다. 그래서 그를 신비주의자라고 한다. 1914년 6월에는 히말라야의 동쪽 산령에 있는 네팔의 일람으로 전도여행을 갔다. 폭풍우가 앞길을 가로막던 어느 날, 사두는 지친 몸으로 폭풍우 속에서 전진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그를 동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돌풍에 휘몰렸지만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아니했다. 여기에서 고난 주일의 주님의 모습들이 환상 속에서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였다. 여권이 없는데다가 기독교 전도자의 신분으로 전도를 하여 네팔 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쳐 넣어졌다. 옷을 홀랑 벗기고 착고를 채워 운신을 못하게 했다. 거머리 떼와 오물을 두고 욕을 하며 나가자 거머리 떼는 전신으로 기어올라 그이 피를 빨았다. 처음 두서너 시간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그는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순간 고통은 멈추고 감옥은 천성같이 변했다. 계속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자 죄수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경찰이 그를 석방해 주어서 나가는데 거머리에게 피를 다 빨려서였는지 현기증이 나서 잘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몰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루 종일 걸어서 티벳인 동역자 탈진(Thar Chin, 성경을 티벳어로 번역함)을 만나 건강을 회복하였다.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으며, 1914년 여름에 그의 전도 거점인 코트가르로 다시 돌아왔다.
남인도 일대를 맨발로 전도했다. 빈민굴에 찾아가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가장 겸손한 자세로 구원의 복음을 외쳤다. 벵갈에 도착하여 인도의 시성(詩聖)이라 불리우는 라빈드라나드 타골을 만났다. 긴 백발의 수염과 범상치 않는 풍모, 한눈에 보아도 그는 큰 인물이었다. 그는 삼십대부터 절대 우주주의와 범신(汎神)론적 종교혼합주의를 원융(圓融)하여 형제애에 기초한 이상적 인간상과 사랑의 사회건설을 모색했다. 브라만(절대)에 도달하면서도 인성(人性 humanism)에 벗어나지 않고, 인성에 머물면서도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인간으로 영감의 노래를 한 인물이다. 썬다를 맞이하는 타골은 아들을 반기듯 포옹했다. 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사흘동안 머문 타골의 집은 아늑한 평화의 집이었다. 썬다는 그에게서 아리아인의 종교적 뿌리에 대해 들었고, 그는 타골에게 예수가 진리 자체임을 증거했다. 창세기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타골은 에덴의 네 개의 강에 대한 이해와 고대 중근동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특히 고대 종교언어를 비교하는 지혜를 보였다. 헤어지는 날 타골은 말없이 썬다의 손을 잡고 말없이 기도를 한 후, 멀리까지 배웅을 하여 주었다.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 타골은 그대로 서서 멀어져가는 젊은 썬다를 보고 있었다.
이후 썬다는 캘커타에서 배를 타고 미얀마에 가서 전도를 하고 싱가포르에 가서 영어로 설교를 하였다. 말라야와 페낭에 가서 전도하고 남지나해, 동지나해를 거쳐 일본에 갔다. 싱가포르에 와 있던 일본인 우메모리 목사가 일본 YMCA에 연락하여 초청한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 도착하여 도쿄, 고베, 오사카, 교토, 요코하마, 나가사키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오직 성경 한 권만을 들고 겸손히 꿇어 엎드려 기도한 후 소박하게 설교하는 썬다를 일본에서 환대해 주었다. 일본 전도 집회는 가는 곳마다 은혜가 넘쳤다. 도꾜의 후지미 교회는 썬다가 강단에 썼을 때 마치 예수님이 선 것 같다고 성령에 쌓인 분위기를 전했고, 고베의 교회에서는 청년교인들이 맨발의 썬다를 따라 그 겨울동안 양말 안신기 운동과 교회 부흥 특별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주선에 따라 중국대륙을 향해 일본을 떠났다. 중국전도는 예상외로 어려움이 많았다. 중국과 티벳이 교전중이어서 외국인인 그로서는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독감에 시달리면서 여러 곳에 순회하며 전도 강연을 하였다. 썬다는 세계 일주 전도를 다닐 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에 가득 찼으며, 자기 마음에 이미 천국이 왔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실천은 현재 살아서 자기 마음에 임재 해 계시는 주님이라고 증거 했다.
1919년 5월 9일(30세) 썬다는 마드라스를 거쳐 티벳으로 갔다. 이로써 열 아홉 살 때부터 넘나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를 열 번째 넘은 것이다. 라마들은 그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저지했으며, 박해를 하다가 나중에는 죽이려고 했다. 인도와 티벳 국경지역에 썬다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티벳 정부의 지령도 하달된 상태여서 통상 이용하던 코트가르 방향은 어렵게 되었다. 험난한 길을 통해 티벳에 들어가 마을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는데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 전도여행에서 썬다는 48곳에서 전도를 했다. 하루 평균 40리를 걸으며 9월말까지 전도를 하였다. 그해 티벳은 7월 30일부터 8월 9일 사이에 큰 눈이 내렸고 9월말에는 산천이 눈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 썬다는 더 추워지기 전에 심라힐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랑게트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티벳인 한 사람과 동행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으나 동행인이 있으니 서로 힘이 되었다. 한참동안 사력을 다해 산길을 전진해 가니, 앞에 웅크리고 있는 동사체(凍死體) 하나가 나타났다. 얼어 죽은 것 같았다. 시체는 길에서 약 10미터 떨어진 가파른 비탈 쪽에 있었다. 썬다는 동행인에게 구조하여 업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 동행인은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 죽소. 나는 살아야겠소’ 하면서 혼자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썬다는 조심해서 동사체에 접근하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이를 업고 가는데 너무 힘이 들어 땀이 날 정도였다. 몇 시간을 이렇게 가고 있는데 또 하나의 동사체가 앞에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얼어 죽어있는데 그는 바로 몇 시간 전에 혼자 살겠다고 가 버린 동행인이었다. 한편 썬다 등에 업힌 사람은 차츰 온기를 되찾아 살아났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
썬다는 10월초에 펀잡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즉시 그는 펀잡의 읍들을 찾으며 전도하다가 15년 만에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셨다. ‘아들아 못난 애비를 용서해다오. 그 동안 너에게 못할 짓을 내가 너무 많이 했구나. 나도 이제 예수를 믿고 싶다만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실는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고,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온 집안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이후 썬다가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의 선편 여비를 대주었다. 1920년 1월 영국의 버밍햄에 있는 셀리옥 선교대학에서 전도초청장을 받아 가게 되었다. 폼페이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거쳐 영국에 도착하니 2월 10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1837~1903) 선교에 불타던 영국교회가 이제는 지는 해처럼 식어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썬다는 홍포에 터번을 쓰고 성경 한 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히 증거 하였다. 그는 영국교회에게 기도의 운동을 다시 붙이자고 호소했다. 그의 단순 소박한 메시지는 영국교회를 뒤흔들었다. 가는 곳마다 청중들은 성령의 위로와 감동에 싸였다. 옥스퍼드, 캠브리지에서도 그는 기도운동을 역설하여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3월 9일 버킹검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는 썬다의 메시지를 듣고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4월 6일 성금요일에는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가 시무했던 Metropolitan Tabernacle Church에서 설교했다. 부활 주일 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 갔다. 글래스고우나 에딘버러에서도 은혜로운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설교는 자연을 비유로 들어 하는 설교로서 그리스도만 증거 하였다. 영국에서 300여 집회 초청을 받았으나 다 응할 수 없었고, 마침내 1920년 5월 30일 미국으로 건너가 주요도시 순회전도를 하였다. 물질로 병들어 가는 미국인의 정신문화와 교회의 앞날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 전도 집회를 인도한 후 호주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인도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선교지 티벳 고원으로 다시 올라갔다. 간디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만나 비폭력 이론을 ‘산상수훈’에 연계하면서 간디가 눈물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저 눈물이 온 인도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인도를 해방시키는 폭풍이 되리라. 다음날 헤어질 때 간디가 썬다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간디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그의 앞날을 붙들어 주시어서 그가 어둠뿐인 인도대륙에 빛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경건생활은 저녁에 목욕을 하면서 ‘주여 정화수로 나를 씻기소서. 우슬초로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더 희리이다’며 씻고는 밤이 깊도록 기도하고 묵상에 잠겼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읽고 묵상한 말씀 중 이해가 안간 부분에 대해 하루가 지나기 전인 밤 시간에 다시 묵상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의 묵상 성경공부는 먼저 조용한 마음으로 성경구절을 읽거나 또는 머리 속으로 떠올려 읽은 후 기도하면서 그 뜻을 음미한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관련되는 구절들을 대각으로 맞추어 증거를 관주하고, 뜻을 꿰어 상고를 한다. 한동안의 묵상 성경공부가 지나면 직관으로 숨은 뜻을 꿰뚫고자 생각들을 더 세우지 않고 다시 기도 드리면서 주님 지혜를 구한다. 물론 묵상보다는 기도가 더 길다. 그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데 객실 내 한 마술사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마술을 자랑하기 시작하는데 마술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지금 이 차안에 높은 신을 공경하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1922년 1월 29일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성지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 아스완댐을 건설한 영국인 윌리엄 윌콕스(William Willcocks) 경의 안내로 베들레헴, 나사렛, 베다니, 여리고, 헤브론, 사해, 요단강, 갈릴리 바다, 가버나움, 세겜, 헐몬산을 거의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스위스에 가서 여러 교회 집회 인도를 강행하였다. 병든 서구의 문명을 나무라면서 예수를 닮자는 설교를 담대히 선포하였다. 3월 3일 스위스 로잔느에서 행한 설교에서 서구문명을 ‘동물주의’라고 혹평했다. 기도 없는 유럽 교회는 죽은 교회요,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호흡(기도)을 나누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는다고 경고했다. 독일, 프랑스를 방문하여 말씀을 증거 하면서 오직 예수만 증거 하였다. 과로에 위궤양, 폐결핵이 그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유럽 순방 전도여행을 마치고 1922년 12월 초 인도로 돌아와서 계속 전국 순회전도를 하였다.
그후 3년 동안 건강회복을 하는 중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1924년 9월에 <종교들의 진면목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생각>(The Search after Reality Thoughts on Hinduism, Buddhism, Muhammadanism, and Christianity)란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독일에서는 저명한 하일러(F. Heiler)박사가 1924년 를 출판하였다. 일부에서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이단으로 몰기도 했다. 1925년 11월 30일 썬다는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자신의 책 출판에서 들어온 인쇄 전액과 합해 복음전도 희망자들을 위한 자선 및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 계속 집필활동과 전도여행을 하는 중 1929년 4월 18일(36세) 수바투를 떠나 티벳을 향해 간 썬다는 그 후 소식이 없었다. 동사를 했거나 순교를 했거나 승천을 했거나 칩거를 했거나 여러 추측이 나오나 그 후 소식이 없음은 하나님만이 그의 최후를 아시기 때문이다. 1929년 9월 3일 나병원 왓슨 원장이 썬다의 모든 친구들에게 회람편지를 내면서 “…이제는 그의 마지막 책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With and Without Christ)가 올해 발간되어 나왔습니다”고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