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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 루카 4,21-30
“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인생의 허전함>
오늘 저녁 선배 신부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편이 애매해서 택시를 탔습니다. 개인 택시였는데, 기사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습니다.
꽤 무료하셨던지 제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요즘 통 매상이 안 오른다는 말씀, 오늘 나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 6,000원밖에 못 벌었다는 말씀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업택시가 아니기에 사납금에 쫒기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는 말씀에 제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런 요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근 막내딸이 취직을 하게 되서 자식 농사를 다 끝냈다. 아들 하나 딸 둘 다 대학 나오고, 다들 일류 기업체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월급 받는 회사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막내딸이 마지막으로 취직하고 나서, 섭섭한 일이 한 가지 생겼는데, 가족들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인도 가게를 운영하다보니 거기에 매여서 정신이 없고, 아들딸들도 다 이제 월급타고 제 몫을 하니 기쁘긴 한데, “아빠, 용돈 좀 올려줘요”, “아버지, 신발이 다 떨어졌는데요.” 이런 말을 못 들으니 마음이 너무도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면 다들 바쁜 관계로 자신은 완전히 왕따 취급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아직까지는 가장 노릇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뭔가 역할을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그렇게 슬프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별 도움이 안 된다”, “왕따 당했다”는 말처럼 섭섭하고 슬픈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왕따 당한다는 것은 필설로 표현 못할 서러움과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오늘 루가 복음사가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는 예수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성장한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서 당한 따돌림과 거절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소외감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 손 안으로 굴러들어왔음에도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식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들 각자 마음에 존재하고 있던 거짓 메시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유다인들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가짜 메시아를 각자 안에 간직하고 있었기에 참 메시아 예수님께서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몰라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현실적 욕구나 사리사욕만을 끊임없이 충족시켜주는 해결사 메시아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 앞에 나타난 메시아는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모두들 예수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제 안에도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참 메시아를 몰라보게 시야를 가로막는 거짓 메시아가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서원을 통해 이제 오직 하느님 영광만을 위해 살기로 서약한 수도자이면서도 2000년 전 유다 백성들과 별반 다름없이 나만의 만사형통과 나만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시는 가짜 메시아를 따라가고 있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이웃들 고통 그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비정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탄생을 통해 이미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와있지만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을 깊이 반성합니다.
법정 스님 말씀처럼 “모든 종교의 핵심은 깨어있는 맑은 영혼”입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 맑은 영혼 상태로 지금 이 시대 어디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지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를 식별하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새 출발하는 갓 출가한 수행자 마음으로 세상 앞에 서는 우리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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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1일 연중 제4주일
Amen, I say to you,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When the people in the synagogue heard this,
they were all filled with fury.
They rose up, drove him out of the town,
(Lk.4.24,28-29)
제1독서 예레미야 1,4-5.17-19
제2독서 1코린 12,31ㅡ13,13
복음 루카 4,21-30
제가 30대 초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허리가 좀 좋지 않았었지요. 병원에 가면 별다른 증세는 없다고 하는데, 허리의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의사는 아니지만, 진맥을 잘 보신다는 어떤 형제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형제님께서는 저의 진맥을 봐주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이 상태라면 나이 40이 채 되기 전에 풍(중풍(中風)) 맞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형제님께서는 저의 증세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하시면서 풍을 맞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안 중에서 풍 맞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요. 더군다나 나이 들어서도 아니라 이렇게 젊은 나이에 풍을 맞는다고 하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이 형제님의 직업도 의학과는 상관없는 태권도 관장이라는 점도 저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계속해서 몸에 이상한 징조가 보이면 ‘혹시 풍이 오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나이 40이 넘어간 상태에서도 아주 튼튼한 것을 보면, 그 형제님의 말씀이 확실히 틀린 말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형제님의 말을 잊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신경 쓰며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는 분명해집니다.
다른 이들에게 힘을 빼는 말이 아니라 힘이 되어주는 말을,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말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미움과 질투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해야 하며, 슬픔과 절망의 말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힘이 되어주고, 긍정적이며,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사랑의 말만을 하셨습니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어떻게든 흠집 내는 말에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렇게 잘못된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결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지요. 즉, 부정적인 말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가장 으뜸이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 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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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4 주일: 원판 불변의 법칙(?)
몇 년 전에 한 번 술을 끊은 적이 있었는데 전화해서 아버지께 술을 끊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믿지 않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술 끊었으면 나도 끊겠다.”
아버지께서도 술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너는 절대 못 끊는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8개월 정도 끊었다가 못 참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들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은 안 바뀐다는 조금은 비관적인 목소리입니다. 이는 아마도 바뀌기를 기대했던 어떤 사람이 끝끝내 자신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아서 실망하였고 또 그런 실망들이 반복되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또 “난 그렇게 생겨먹었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번 소년원에 가서 학생들 고해성사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중학생이었는데 때려서 친구를 죽게 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소년원에 들어와서 종교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상대로 그 아이들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안 좋게 성장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부모중 한 분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 계셔서 사랑해주고 돌봐줄 사람이 없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자랐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은 어쩌면 매우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원판 불변의 법칙을 거슬렀던 많은 예들이 나옵니다.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든 죄인이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성녀 중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몸을 파는 사람들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판도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처음에 그리스도교 사람들을 잡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악독한 사람이 이방인의 최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빈 라덴이 비오 성인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오로가 변화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님을 받음으로써 가능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바오로의 원판도 하느님을 만나면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예수님이 뜬금없이 당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시는 것을 듣고 '목수 요셉의 아들이 미쳤나?' 생각합니다.
몇 달간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동네 총각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년 동안 멀쩡히 살았는데 갑자기 집 뛰쳐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이상한 말만 해 대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자렛 사람들은 원판 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가 예언자나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믿지 못하는 나자렛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나아만의 예를 들며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하느님의 예언자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삼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셨는데 그 때 엘리야는 시돈지방, 즉 이방인 지방 어느 과붓집에 피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장수였는데 문둥병에 걸렸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녀의 말을 듣고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찾아왔었습니다. 엘리사는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나아만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르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처음엔 기분 나빠하다가 나중엔 요르단 강에 들어가 문둥병을 깨끗이 고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한 분 뿐임을 깨닫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였고 이방인들에게 복이 돌아갔듯이 지금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분이 치민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뚫고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예언자는 비수 같은 말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언은 사랑하는 상대가 변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언자는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떠나면 그들은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을 떠난 뒤에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주신 두 예언자는 비유를 넘어서 하나의 예언이 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였지만 이사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엘리야까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었고 이방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죽이려 하지만 조금 있다가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엘리야가 이방 마을로 갔던 것처럼, 또 지금처럼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떠나시던 것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이스라엘을 떠나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결과는 무엇입니까?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았듯이 예수님께서 떠나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성령의 생명수가 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있던 과부의 집에서는 빵,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 또 기름, 즉 성령님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일 보던 요르단 강에 그것도 일곱 번이나 자신을 담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아만은 결국 예언자가 보낸 이의 말을 믿고 문둥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요르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일곱 가지 방법인 칠성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 그 은총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였지만 이방인들은 마치 엘리사가 보낸 사람만 보고도 나아만이 그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의 말만 듣고도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갔던 시돈, 즉 사렙다 마을이 바로 바티칸이고 나아만이 들어갔던 요르단 강 물이 바로 칠성사가 행해지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풀무 불에서 방금 나온 시뻘건 쇳덩어리와 같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머리까지도 물컹물컹하다고 합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기 때의 교육이 평생을 갑니다. 그 때 낫을 만들 것인지 호미를 만들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굽혀놓으면 점점 굳어져서 다시 그 모양을 바꾸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모양이 잘 못 잡힌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크게 바뀔 수가 없게 됩니다. 점점 열기가 식어가면서 겉만을 더 날카롭게 혹은 덜 날카롭게 다듬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바오로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뜨거운 불로 제자들에게 내려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180도 바꾸어서 용맹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만드셨습니다. 낫이 호미가 되고 호미가 삽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다시 녹여서 처음부터 새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 자신이 확 바뀔 수 있으려면 성령의 불 안에 들어가 꼼짝 말고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가 회개를 한 것도, 막달레나가 회개를 한 것도, 소년원의 아이들이 고해성사를 눈물로써 보는 것도 이 변화를 믿지 못한다면 나자렛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남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어!', '난 원래 그래!'. 이런 말들은 이제 천주교 신자라면 하면 안 됩니다. 정해져서 못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성령의 풀무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얼마든지 새로 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변화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대장장이이십니다. 성령의 불로 우리를 녹여서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 전엔 어떤 모양이었든지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의지입니다.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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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손이 꽁꽁!-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어제 밤에 밤새 얻어맞았습니다.
저게 무슨 말인가!
감기, 몸살로 온 몸이 아파요....그러니 밤새 얻어맞은 거죠?
감기 조심하시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멍해서~~
정신 차리고 강론을 해야 하는데~~
‘주님, 이 미사 잘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저를 향해서 화살기도 쏘아 주세요!’
부제님께서 부제서품 받고 오늘 처음으로 복음강론을 읽으셨는데
부제발을 받아 가지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죠?
저 목소리가 사제가 되어 복음을 읽을 때도 천천히 또릿또릿해야 하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우물우물...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자꾸 직업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사제는 직업입니까?
직업이 아니죠?
사제생활이 내년이 은경축이고 올해가 24년째인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제일 어렵고 힘든 것이 자꾸 직업화 되어 간다는 의식입니다.
그냥 미사 드리는 기계!
성사 집행하는 기계!
사제는 절대 직업이 아닙니다.
늘 깨어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직업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영성이 없어지고 기술, 테크닉만 남기 시작하죠~~
사제에게서 영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룩함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사제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교님이 사제들을 인사발령 할 때 전해 내려오는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출신 고장에는 절대로 파견을 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감곡본당 출신 신부님들은 절대로 감곡본당신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자기 고장 사람들에게는 떠들어봐야 솔직히 폼이 안 납니다.
권위가 안 섭니다.
동네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내 살아온 꼬라지를 다 알고 있거든요~~
‘아유~~ 저 자식 코 찔찔 흘리고, 맨 날 소금 얻으러 다니더니
어떻게 신부가 돼 가지고~~아이구~~ 출세했어~~ ’
아무리 얘기해 봤자 말발이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0년 동안 내려오는.....글로는 남겨 있지 않지만 불문율이 뭐냐?
자기출신 본당에는 절대 사목을 못 합니다.
저야 고향이 인천이니까 청주교구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감곡출신은 죽었다 깨도 감곡본당신부를 못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고향 나자렛에 왔을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아주 어렵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시는데~~
내 어릴 적, 소년 시절, 아버지, 어머니, 나의배경을 알고 있는
바로 그런 곳에 가서~~
어떻게 보면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그리고 용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랍비로 오셨는데 랍비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셨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랑이요, 존경과 놀라움의 가르침이 아니라~~
경멸로 받아들이고 분개합니다.
'예수 같은 저런 배경을 가진 저 인간이 감히 우리를 가르쳐?
네 집안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첫 번째 이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이 말은 뭐겠습니까?
요셉의 직업은 목수요~~.
다시 말하면 하찮은 노동을 하는 비천한 노동자로 봅니다.
‘저것 목수 아들 아냐?’
지금은 손재주가 좋으면 출세합니다.
TV에도 나오고, 돈도 많이 벌지만.....
옛날에 유다땅에서 목수는 하층민, 천민이며~~
나무를 가지고 일거리를 얻어~~
닭장서 부터 집 짓는데 가구까지 고쳐주고~~
밥 한 끼 얻어먹고 살아가는~~
아주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자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멸한 이유>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 요셉처럼 목수, 노동자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할래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말의 내용 보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 고향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했던 겁니다.
물론 그 사람의 출생 가문, 그 사람의 재산....
이런 것은 인격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절대로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집안 배경이라든지 또는 외부적인 것....
사람을 평가하고 싶다고 하는 그 유혹 앞에 우리는 늘 직면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격을 보다는 출신 성분을 많이 보고 판단합니다.
“아이구 저거~~ 쟤 아버지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았어...참 어디 가서 공부하고 오더니 그 자식 출세해 가지고~~ 우리동네 경찰서장으로 왔으니...
지금은 행세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형편없던 집안이었어~~
저 할머니가 밥 얻어다가 손주 키웠던 집안이야....”
그 사람의 참된 됨됨이를 알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
오늘 복음과 비숫한 복음이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요셉은 이미 죽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래서 수수께끼가 하나 풀립니다.
이것으로 왜 예수님께서 30이 넘도록 고향을
떠나지 않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세부터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노릇을 했다면
3년 공생활 하다가 죽으시지 않을 것이요~~
10년 넘게 공생활을 하셨을텐데~~
30세까지 고향 나자렛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양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머니를 돌봐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이 30세 될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다가
30이 되어서야 당신의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죠!
마르코복음 6정 1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거 과부의 아들이 아니야~~
저런 가문에서 어떻게 똑똑한 자식이 나올 수 있겠나!”
과부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노동자 출신이기에 거절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 사건 이후에는
나자렛에서는 어떤 기적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치유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서 묵상해야 할 것은
첫째, 본인자신이 중병환자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병 낫기를
거부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명의가 온다 하더라도
“ 나 아픈 데 없어요!”
하면 어떤 병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선입견이라고 하는 중병을 앓고 있었지만
본인들이 중병에 걸린 지 모르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명의가 왔는데도 무시했고~~
오늘 복음을 보면 달려 나가서 벼랑에 끌고 가 떨어트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환자가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의사는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고향인이고 친척들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고 한 고향 나자렛에 산다고 하는 것이
천국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제의 부모라고 하는 것이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학생의 부모라고 하는 그 자체가 구원의 표시는 아닙니다.
수녀의 부모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의 표시가 되지 않습니다.
성모순례지에 산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표시는 아닙니다.
왜?
예수님과 한 고향 사람들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 낫기를 거부하는 환자는~~
의사를 거부하는 환자는~~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나자렛에서 쫓겨난 이후
단 한 번도 자기고향으로 가지 않으십니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고 싶었던 것이
자기 고향사람들이요, 친척이었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문을 잠그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 우리들이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것은 나쁜 분위기 속에서 강론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제들이 절감합니다.
기대에 가득 차 있는 곳에서는 적은 노력으로도 성령에 불을 붙입니다.
미사 때 교우분들의 얼굴을 봅니다.
이제 사제 생활 20년 넘게 하면 딱 제대에 올라서면 교우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새 신부들은 앞이 하얗고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누구의 눈이 오늘 사제의 강론을 들으려고 두 눈이 똘망똘망한가!
저 사람은 샤터가 내려왔네!
속으로 졸고 있구나!
저 형제 얼굴은 나를 쳐다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다른 데를 헤매고 다니는 구나!
얼굴을 보면 대략 감이 옵니다.
뭔가 얻으려고 하는 그런 기대가 가득 차 있는 곳에서는 사제의 그 말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쫘~악~쫙~~ 빨아들이는 것을 사제도 느낍니다.
철야기도나 피정 때라든지 가보면 뭔가 얻으려 기대가 가득 차서 바라보니까~~
본인이 갈급해서 온 사람들이다 보니까~~
7~8시간 강론을 해도 숨을 죽이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과 귀를 사제의 강론에 기울입니다.
그러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그런 무관심한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박력에 찬 설교도 생명이 없이 그만 땅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안 들었던 겁니다.
하느님 자체이신 메시아가 강론을 하는데도~~
회당에 있는 나자렛 사람들은
‘신통하게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좋은 얘기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머리로 받아 들였고~~
‘어, 똘똘한 얘기 하네~~그런데 저것 요셉의 아들 아니야~~ 하긴...
아이구~~참 출세했다~~ ’
나쁜 분위기 속에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군종신부도 오래 했고 교도소 사목도 6년 정도 했습니다.
교도소에서 가면 교도소장이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들, 오늘 귀한 신부님 모시고 인격지도 받습니다. 자, 졸지 말고 차렷! 열중 쉬엇! 신부님 얘기 하시죠~~”
푸른 죄수복을 입고 수백 명이 앉아 있는데 살인범, 강간범, 조폭... 전과자들 쳐다보는 그 가운데 서면 쫄아 붙습니다.
인상이 험악한 조폭이 째려보면 말이 나오려 하다가도 쑥 들어갑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고 해도 말이 결코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군종신부 때 연병장에 일개 대대가 대열해 있는 곳에서 천주교신자
손들어 보라 하면 7~8명 손 들까 말까~~
개신교, 불교, 무종교....
그런 아이들을 불러 놓고 2~3시간 강론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처음부터 하느님, 성모님 찾다가 졸기만 하지....들은 척도 안합니다.
그 아이들과 싸이클을 맞추어 가면서 결국 하느님 쪽으로
씨앗을 뿌려줘야 하니까~~쉽지 않죠!
그게 바로 미쎠네리 선교사입니다.
아예 설교를 거부하는 곳에서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면~~
그들이 서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면~~ 서로가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크게 열어 드릴 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집에서 예수님을 끌어다 벼랑으로 떨어트려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나자렛을 영원히 떠나서 다른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업적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 가에 버려진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영세 받았다는 것으로 우리는 절대 안심하지 못합니다.
세례 받은지 6~70년 되었다고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부모라고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성모순례지에 교적이 있다는 자체가 천국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여기가 비록 성모성지이지만 우리 감곡신자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신하면서 평화의 분위기를 깬다면 성모님은 저 위에서 걸어내려오셔서 다른 곳으로 가실 겁니다.
이곳에 성모님이 사시지만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내려오셔서 딴 곳으로 가실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처럼....
사도행전 13장 46절의 말씀을 끝으로 오늘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잠시 후에는 성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오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과 비교가 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게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문을 닫았을 때는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나자렛 고향에서 예수님은 많은 상처를 받고 떠나셨습니다.
여러분의 집안, 여러분의 마음, 영혼도 성체를 모실 때마다
우리들의 삷이 신앙인답지 않을 때......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서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님, 저희들은 부족합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늘 결심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저희들 버리지 마시고 성체로써/ 말씀으로써/ 저희를 성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31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레1,4-5.17-19 1코린12,31-13,13 루카4,21-30
"승리의 삶"
‘승리의 삶’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희망의 승리이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내가 살고 네가 죽는 승패가 분명한 승리가 아니라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상생(win-win)의 승리입니다.
이런 승리의 자랑으로, 하느님 자랑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는 지난 1월29일 한 사건을 통해 이런 감동적인 하느님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는 착하고 믿음이 좋은 중년 부부입니다.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꼭 한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남편인 형제분이 직장에서서의 승진시험에 계속 통과하지 못해
제때에 승진하지 못함이 늘 마음에 짐이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며 눈물겹도록 정성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번번이 불합격이었습니다.
이번도 수도원의 특별한 배려로 약 2주 동안 피정 집에서 본격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하며 맹렬히 준비했는데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듯 29일 시험결과 까지
약 10일간 초조와 불안 속에 지낸 형제님이었습니다.
29일 발표 당일에는 오후 4시경부터 수도원에 와서
기도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오후 7시20분까지 연락이 없어 어둡고 추운 표정으로 떠난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끝기도 후 전화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합격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집에 가는 도중 합격 연락을 받고
흥분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핸드폰 전화를 한 것입니다.
마침 그날이 부인의 생일이라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생일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 새벽 미사에 성전 뒤쪽을 보니
그 부부가 조용히 앉아있었습니다.
그 먼 곳에서 새벽 일찍 감사 미사를 봉헌하러 온 것입니다.
미사가 끝난 후 저도 그 부부와 함께 한 자리에서
합격한 남편에게 진심에서 울어난 덕담을 하기 전에
우선 궁금한 점을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이번 시험 몇 번째 본 것입니까?” 아주 쑥스럽고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일곱 번째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승리, 희망의 승리, 사랑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였습니다. 매년 1회, 일곱 번째 합격이니 무려 7년 동안
부인의 사랑의 내조와 더불어
말 그대로 칠전팔기요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하느님의 힘으로, 몸과 마음 하나 망가지지 않고 살아 온 것입니다.
“그대로 칠전팔기입니다.
형제님 자신에 대한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고시 합격 이상의 큰일을 해냈습니다.
부인에게 최고의 생일 선물입니다. 이제부터 잘 사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어는 젊은 수도형제에게 들려줬더니 그 형제의 대답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아마 하느님이 그분을 크게 쓰시려고 그런 시련을 주셨나 봅니다.” 이 말을 그 형제님께 꼭 전해주려 합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전쟁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체력, 권력, 금력의 우상들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언젠가 사라질 힘입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권력을, 재력을, 금력을 잃어버리면
그 삶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진정한 힘은 영혼의 힘, 정신의 힘, 믿음의 힘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뿌리 내린 힘이기에
보이는 것들 모두 사라져도 영원히 남아있어 존엄한 품위를 유지해 줍니다.
제가 즐겨 드는 예가 팬티와 팬티 끈입니다.
팬티 끈만 튼튼하면 팬티는 좀 떨어져도
속에 입어 보이지 않기에 끝까지 입을 수 있습니다만,
팬티 끈이 끊어지거나 느슨해지면
아무리 팬티가 좋고 고와도 쓸모없어 버려질 것입니다.
팬티 끈이 영혼이라면 팬티 천은 육신입니다.
영혼만 튼튼하면 웬만한 육신의 고통은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영혼이 튼튼하면 육신은 영혼에 순종하지만,
영혼이 약해 주인 역할을 못하면
육신의 배반은 줄을 잇고 끝없는 육신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진정한 힘은 영혼의 힘입니다. 몸은 커도 점차 체력도 정신력도 약해져서 병도 많은 현대인들 이지만
예전 사람들 몸은 작았어도 탄탄했고 정신력도 튼튼했습니다.
믿음과 함께 가는 영혼이요 영혼과 함께 가는 육신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영혼의 힘이요,
영혼이 튼튼하면 몸도 더불어 튼튼해지기 마련입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 영혼의 끈은 얼마나 튼튼한지요.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의 믿음 있어 튼튼한 영혼입니다.
다음 말씀 예레미야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요
이 말씀 그대로 믿을 때 샘솟는 영혼의 힘입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낳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거 너를 세웠다.”
온통 하느님이 주어이고 예레미야는 목적어입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결코 우연한 우리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뜻하셔서 세상에 파견된
필연적인 우리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관계가 깊을수록 좋은 믿음에 튼튼해지는 영혼입니다.
다음 말씀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의 승리는 바로 믿음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요 믿는 모든 이들의 승리를 앞당겨 보여줍니다.
둘째, 사랑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인자무적이란 말도 있듯이 사랑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사랑의 무능이 하느님의 전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마지막 승리를 이끌어 내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려야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 없는 무사한 사랑,
기다리는 사랑,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의해 부단히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우리의 조급한 이기적 불순한 사랑입니다.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마치 태양 같은 것,
사랑 사라지면 영혼은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좋은 은사들도 사랑 없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오늘 2독서 사도 바오로 역시 사랑의 승리를, 하느님의 승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대헌장이라지만
실상 분열 상태에 있는 코린토 교회를 향한 간곡한 충고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양상만 다를 뿐 다 분열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바로 분열의 치유와 예방에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의 거울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내 사랑을 비춰보십시오.
길다 싶지만 워낙 좋은 내용이라 인용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평생공부가 이런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히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게 겸손입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우리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공부에 항구하여 우리의 존재가 사랑자체가 될 때
보이는 모두가 하느님의 얼굴일 것입니다.
셋째, 희망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희망의 승리입니다. 희망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절망하는 것이 대죄입니다.
절망이 만연한 세상입니다.
희망으로 빛나야할 젊은이들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어두워지는 오늘의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에게 참 희망을 주는 정치가 종교가, 좋은 정치 좋은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아무리 좋은 세상, 좋은 사람이라도 보이는 세상 것들에 궁극의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곧 절망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세상이,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고,
힘들고 험한 세상에 망가지지 않고 항구히 제 자리에 충실하면서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절망에서 샘솟는 희망이요,
슬픔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불안 중에 샘솟는 평화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희망의 승리는 결국 하느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결코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궁극의 희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한 고향 사람들이지만
안타깝게도 희망의 눈은 닫혀 있어,
‘하느님의 희망’으로 그들을 방문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선입견에 희망의 눈이 닫힌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희망을 두었더라면
상처에 그 마음을 추스르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해 희망의 눈이 활짝 열린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보다는 이방인들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은연 중 시돈 지방 사렙타의 이방인 과부에게 파견된
엘리야와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한 엘리사를
자신에 견주는 예수님이십니다.
희망의 사람들이 진정 강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이길 자 아무도 없습니다.
희망의 사람만이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화가 잔뜩 난 고향 사람들,
예수님을 고을의 산 위에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새처럼 훨훨 희망의 날개를 치며 날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희망의 힘으로 두려움 없이 적진을 정면 돌파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희망의 광채에 눈멀어 옆으로 길을 터 준 고향 사람들입니다.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해 가는 희망의 사람들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우리 삶은 평생 전쟁입니다. 고맙게도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믿음의 힘, 사랑의 힘, 희망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게 진정 내적힘이요 더불어 튼튼해지는 영혼, 육신입니다.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희망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승리입니다.
이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불퇴전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우리를 꽉 채워 주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언제나 당신만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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