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북안의 국내성 근처(중국 길림성 집안시)에는 높이 6.39미터, 무게 37톤에 달하는 거대한 응회암 비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이다.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인데, 그 많은 비석 가운데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비석이 광개토대왕릉비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중국당국은 1982년 주황색 기와로 비정을 세워 능비를 보호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의 글씨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쳐나 강인한 고구려인의 기상에 부합되는데 현재 능비의 글씨체를 로고로 이용하는 곳이 있을 정도로 멋이 있다. 비의 네면에 새긴 글자의 총수는 원래 1,775자 이지만, 탈락되었거나 마모되어 판독할수 없는 글자가 141자 있어서, 이 글자들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 일본, 중국,북한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어쨋거나 이 비문은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보완해주는 일차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를 갖고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운 장수왕의 속마음.
광개토대왕릉비는 동왕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장수왕은 재위 2년(414)9월 29일 광개토 대왕을 안장하고 그 능 앞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므로, 왕이 죽은 뒤 곧바로 능비 제작에 착수했던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능비를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부왕의 훈적을 기리는 것도 능비 설립 목적의 하나였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개토 대왕릉비를 세운 장수왕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이 거대한 비가 광개토대왕릉비로 밝혀지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황제의 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능비 조성목적과 관련해서 원초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용은 모른다 하더라도 거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비였기에 천 오백년도 더 지난 후대에까지 황제의 능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중국의 황제는 천자를 자칭했는데 천자란 하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고의 신으로서 하늘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비가 건립될 당시 고구려인들이 느꼈을 감정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장수왕은 무슨까닭으로 이토록 거대한 비를 건립하였을까? 광개토 대왕비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비문은 첫머리에서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다. 시조는 북부여에서 나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천제란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인 천신을 뜻하는 것인데, 추모왕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함으로써 고구려의 시조는 곧 천자라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게다가 추모왕은 물의 신 하백의 손자이기도 하다. 결국 추모왕의 아버지는 하늘의 신
이고 어머니는 물의 신의 딸이니 그 자손인 추모왕 또한 천하의 주인임은 물론이고, 그 성스런 왕통을 이은 장수왕을 포함한 고구려왕 모두가 천자라는 얘기이다. 비문의 이 첫머리는 능비를 조성한 목적이 왕의 권위를 신성시 하여 전제왕권을 수립하려는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넓게 영토를 확장한 임금"이란 뜻의. 광개토 대왕이라는 이름 자체에서부터 강력한 권위가 느껴지기 때문에 고구려는 원래부터 왕권이 강했던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고구려는 원래부터 왕권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당초 다섯 부족 중의 하나인 계루부의 수장에 불과했다. 부여에서 만주의 비류수(혼강) 졸본 지역으로 이주한 주몽의 계루부는 또다른 부족인 소노부와 맹주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연맹체의 맹주로 등장하게 된다.
고구려는 왜 자주 수도를 옮겨 다녔을까?
주몽의 계루부가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고 해서 그 지배권이 실질적으로 다른 부족에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3세기 고구려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삼국지>위서 동이전은 " 연노부는 본래 국주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차제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게 따로 제사 지낸다."고 적고 있는데 다른 부가 자체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주몽의 계루부가 여전히 다른부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왕권이 취약하였음은 귀족세력이 왕을 살해하거나 축출한 사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근신 두로는 모본왕(48~53)이 잔인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죽였다. 연나부 출신조의 명림답부도 백성들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대왕(146~165)을 살해했다. 봉상왕(292~299)도 기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왕궁의 보수공사를 하다가 국상 창조리에 의해 퇴위당하고 뒤이어 자살하고 만다. 이렇듯 고구려의 왕들은 귀족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그 지위를 박탈당할 정도로 그 권한이 취약하였다.
고구려의 잦은 천도도 사실은 고구려의 미약한 왕권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전에도 몇차례 천도한 적이 있었다. 유리왕 22년(서기3)에 졸본에서 국내성을 천도했다가, 산상왕 13년(209)에는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가, 이듬해 다시 평양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잦은 천도는 동천왕 21년과 고국원왕13년의 경우처럼 위나라와 연나라의 공격을 받은 탓도 있었지만, 내부권력다툼의 여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왕권 쟁탈과 천도 사이의 이러한 함수관계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가령 유리왕때에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유리왕의 뒤를 이은 대무신왕이 동왕 3년(20)에 동명왕묘, 즉 주몽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주몽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왕실을 잇는 정통으로서 어느정도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주몽계열이 그 이전에 왕위를 차지하였던 세력과 분명한 구분을 짓는 상징이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주몽 계열인 계루부 왕실이 졸본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다른 부들, 즉 귀족 세력의 견제를 벗어나기 위한 조치로 볼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상산왕 때 환도성으로 천도를 단행한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은 그의 형수인 제나부 출신 왕후 우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산상왕은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동왕 13년 9월 관노부 출신 여자를 소후로 삼고 그해 10월에 천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동왕 17년에는 소후가 낳은 교체를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왕후 우씨는 소후를 살해하려 하였다. 결국 산상왕은 제나부의 견제를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왕권강화를 위한 장수왕의 노력
이와 같은 고구려의 왕과 귀족간에는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있었다. 그래서 광개토 대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일정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맥락에서 장수왕도 귀족들의 견제를 받지 않는 배타적 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자신의 재위 기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중국 주변 여러나라 가운데 최초로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그 이전에는 중국 왕조의 연호를 빌려서 사용하였는데, 연호를 쓴다는 것은 주권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중국의 각 왕조나 5호 16국 시대에 중국에 왕조를 건설한 여러 민족들도 각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 황제의 권위처럼 그 자신의 권위도 절대적인 것임을 내외에 과시하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광개토왕은 이런 이념적인 장치만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도 정비하였다. 가령<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전하는 고구려의 군사작전은 주부가 지휘하는 왕실 직속 군대와 귀족 세력인 대가의 군대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능비에 보이는 '관군', '왕당'등의 표현은 귀족 세력의 족병을 국가의 공적 질서 내에 편제했거나 통제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또한 광개토대왕이 왕권강화에 어느정도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가령 모두루묘지에서 모두루가 자신을 노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귀족내지 관료들의 왕권에의 예속도가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는 현상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생전에 '영락태왕' 이라 칭해졌는데, 이는 광개토왕의 뛰어난 지도력과 빛나는 업적이 왕보다 상위 개념인 '태왕'이라는 새로운 왕호로 불리었을 만큼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이는 결국 전대에 비해 왕의 권위가 신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장수왕은 이러한 선왕의 후광에 힘입어 왕권강화와 함께,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장수왕의 왕권강화 정책에는 당시 고구려의 국내외 정세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워진 5세기 초엽,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러나라로 분열된 상태였다. 북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가 멸망을 거듭하고 있었다. 남쪽의 신라는 아직 힘이 미약하였고 가야는 작은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세력을 확장하기에 좋은 국제정세였던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의 적수는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와 백제의 배후에 있었던 왜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371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계속 위협하며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비문에 따르면 고국원왕의 손자 광개토 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대승리를 거두고 60여성을 빼았았다. 나아가 신라에 침범한 왜를 물리치고 신라를 복속시켰으며 북으로 거란,숙신,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고구려는 급기야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국내외적으로 유리한 조건위에서 장수왕은 왕권강화책을 수립해 나갔다. 그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부왕의 능비를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을만큼 거대하게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의 신비스런 출생및 건국 이야기와 왕가의 내력, 광개토대왕의 치적, 그리고 비를 세운 목적을 간단히 기록하였다. 둘째 부분에서는 호태왕의 정복사업 목적,과정 결과등을 열거하고 있다. 거란과 백제를 정벌했고, 신라에 침범한 왜를 격퇴시켜 신라를 구했으며 동부여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총 64성 1천 4백촌 이었다는 내용이다. 셋째 부분에서는 왕릉을 관리하는 묘지기에 대한 규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처럼 비문은 능비의 주인공인 광개토 대왕이 시조 추모왕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신성한 왕통의 계승자임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의 탁월한 업적에 의해 이룩된 고구려의 영광과 평화를 과시하고 있다. 아울러 왕릉의 묘지기에 대한 규정까지 선포한 것은 그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고구려왕들이 배탁적 권위를 인정받게 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장치였다.
하지만 장수왕이 집권초기인 동왕 2년에 능비를 세운 일 자체가 사실은 광개토대왕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능비의"선왕 이래로 왕묘에다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의 연호에 차이나 착오를 일으켰다. 오직 국강상 광개토경호태왕께서 역대 선왕의 묘에 모두 비석을 세워 연호의(내력과 숫자를)명기하여 그들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지 않게 했다."는 구절에 나타난 대로, 능비를 건립하는 데 있어서도 부왕의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양천도는 남하 정책의 일환이 아니었다.
장수왕이 왕권의 전제화를 추구하자 귀족세력의 반발이 뒤따랐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 집권층의 세력 관계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결과 장수완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숙청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능비를 세우는 조치만으로는 왕권강화 정책이 곧 한계에 부딧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또 다른 정책을 쓰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수단이 바로 천도 였다. 문헌 기록에 강족으로 표현되는 귀족 세력의 강력한 토착 기반이었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이들 세력의 견제를 벗어나 강력한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왕은 평양에 궁궐, 종묘사직, 도성등을 마련한 후 마침내 동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평양 천도로 왕의 목적이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 가운데 <위서> 동이전 백제조에 실려 있는 " 지금 연(장수왕)의 죄로 나라는 어육이 되었고, 대신 강족들을 끝없이 살육하여 죄악이 천지에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다."는 기록은 이런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그의 왕권 강화에 반발하는 세력은 대신과 강족으로 표현되는 귀족 뿐만이 아니었다.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풍씨일족(북연유민)의 사람과 말에게는 조축지연이 있고, 낙랑등 여러군은 수구지심을 품고 있습니다."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중국 망명 세력도 왕권에 반발한 세력틈에 끼여 있었다.
위 국서는 장수왕이 본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하기 3년 전인 개로왕 18년(472)에 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장수왕은 천도 후 무려 40여년이 지나서야 왕권강화에 반대하는 귀족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귀족은 장수왕의 왕권 강화에 반발하여 북위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조(<위서>고조전), 고숭(<위서>고숭전),고영(<북사>고영전)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남하정책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장수왕이 본격적인 남하정책을 펼친 때가 평양 천도후 무려 48년이 지난 장수왕63년(475)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 장수왕은 나이 여든 두살의 노인이었다. 서른 네살의 한창 나이에 평양으로 천도해 좋은 시절 다보내고 미수가 가까운 할아버지가 되어 본격적인 남하 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재위63년 9월에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로 침입해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켰으며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때 장수왕이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백제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국왕까지 살해했으면서도 남하를 계속해 백제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한 목적이 결코 남하정책 실현을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한다. 이점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문자명왕 16년(507)조의 "왕이 장수 고로를 보내어 말갈과 함께 의논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려고 횡악아래에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보내 맞서 싸우므로 곧 퇴각하였다."는 기사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기록은 장수왕때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장수왕이 백제 국왕까지 살해하고도 한성을 점령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 갔다는 것은 백제 공격이 남하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중다.
장수왕의 남진 목적을 전하는 인물은 북위의 헌문제이다. 그는 백제에 보낸 국서에서"(장수왕의 남진 목적이) 선군의 옛 원수를 갚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선군이란 두말할것 없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죽임을 당한 고국원왕을 뜻한다. 이는 장수왕의 백제 침략이 삼국통일을 위한 남진 정책이 아니라 100년만에 구원을 풀기 위한 것 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평양 천도의 주목적이 남하 정책에 있다기 보다는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내는 국서에서 주장한대로 왕권에 도전하는 '대신강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평양으로 천도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대신 호족들에게 피의 숙청을 가한후 선군의 옛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로 쳐들어가는 제한전을 전개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