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눅 15:17-24
하나님의 자녀들이나 아닌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생각대로 가장 위대한 결단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자 하는 움직이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가장 위대한 결단인 것은 솔로몬이 인생의 말로에 자신이 살아온 뒤를 살펴보면서 성령님의 강권한 임재 하에 쓴 전도서를 보면 이 세상의 것을 쫓아 행했던 모든 것이 헛되다 하면서 하나님 뜻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복되다 했습니다. 인생이 끝날 때 이 세상의 즐거움도,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이 내게 쓸모없어지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위대한 결단은 인생이 끝날 때 더욱더 즐거워지고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고백합니다.
<솔로몬이 헛되다는 것은? 자신의 화려한 궁, 아름다운 아내<3천명의 아내>, 풍부한 부> 이것이 날 죽음 이후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을 때 부한 자나, 가난한자나, 지혜로운 자나, 미련한자나, 아름다운 자나, 미운 자나 모두 동일한데 유일하게 다른 것은 하나님 뜻과 같이하는 자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의 전도서를 남기기전 그는 두 번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그의 잘못을 돌이키라 했지만 아름다운 아내들의 뜻을 따랐던 그가 인생의 말로에 깨달음입니다. 또한 그로인해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고,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탕자의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우리들이 특별히 마음에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먼저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8절은 죄악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탕자는 이 깨달음에서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죄를 전가시키지 않습니다. 그가 이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그의 영혼을 병들게 했을까요? 그러나 이 문제의 온전한 해결은 돌아가야 하겠다는 소원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에게 죄악의 깨달음은 필수적이지만 이 깨달음만 가지고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20절에서 그는 드디어 일어납니다. 그러나 18절에서 그는 일어나야지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는 새로운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일어나야겠다는 상상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소원이 그 사람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지는 못합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은 일어나서, 결단을 행동으로 시작할 때입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나, 현재 우리들이나, 미래의 사람들 역시 이런 망설임 가운데서 반듯이 일어나야합니다.
“내가 돌아가면 과연 아버지께서 받아 주실까?”
“이렇게 죄 지은 나를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아니 문을 닫으시며, 못된 자식아! 돌아가라고 하지 않을까?”
“지금 결심했지만 또 옛 생활을 그리워해서 더 먼 나라로 도망치면 어떡하지?”라는 수많은 마음의 소리와,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은총의 표적으로 내게 보이시고, 성경의 기록된 긍휼, 자비, 은총, 은혜의 모든 말씀이 내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만 참 생명을 누리며 교제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죄를 깨닫고, 일어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탕자가 먼 나라의 사람들과 의논하였더라면 그들은 이 청년에게 어떤 충고를 주었을까요? 다 부질없어, 너를 봐. 그 누구도 널 도울 자가 없어. 그냥 너의 인생을 받아들여. 용서받지 못할 테니 마음껏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상책이야. 이들의 충고는 달콤할 수 있지만 긍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드는 큰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단은 외롭지만 홀로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의견은 들을 수 있으나 그 누구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대신해 줄 수 없기에 외로운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도우시지만, 그럼에도 이 결단은 온전히 내 스스로 해야 하는 결단이기에 외롭고도 힘든 싸움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참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단의 순간에 포기하게 만드는 마음의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왔어, 너무 창피하고 더럽혀졌는데, 이런 마음으로 돌아갈 순 없어! 등등 이유가 마음에 가득해도,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그러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더기를 입고 있든, 죄악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에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모든 것이 용서되어지고,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갈등을 넘어 돌이키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 말씀은 아직 우리가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항상 언제든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려 할 때 그 거리는 항상 멀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아버지를 대할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직 거리가 먼데” 말씀처럼 언제나 죄인인 나를 언제든지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계신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이 모든 고민은 시간 낭비였음을 알게 되죠! 그 이유는?
***창기와 함께 보내는 것과 같은 우리들의 마음과 행동의 수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보고 계셨습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과 같은 우리들의 길을 아버지는 곁에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단지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돼지우리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 속에 빠져있는 것과 같을 때도 여전히 손 내미시고 내 손만 잡으면 된단다. 용기를 내야지! 하시며 성령님을 통해 용기의 마음을 항상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제 돌아갈까? 아니다” 하며 망설이던 탕자와 같은 모습을 보시면서 예야! 내가 사랑한다. 내 안에는 네가 쉴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 져 있단다. 어서 들어와 쉬고, 먹고, 회복하고, 가야할 길을 가야지! 라고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 “돌이킴과, 일어섬의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것을 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누리길 바랍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고 말씀합니다. 이 말의 원어의 뜻은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감정적으로만 자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자녀가 외로울 때 아버지도 외로웠고, 자녀의 가슴이 찢어질 때 아버지의 가슴도 두 배로 찢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용서하기를 속히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측은히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 속성을 가르치시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너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준비가 되어있음으로, 하나님께 당당하게 그 자리를 박차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한 걸음을 옮길 때, 아버지 하나님은 열 걸음, 아니 내 곁에 와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더 찾고 계신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더욱더 나를 찾으시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의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아버지는(하나님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원어 성경을 보면 여러 번 입술을 맞추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행동은 바로 “나는 너와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교제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용서의 선언이고, 영접의 표시이며, 위대한 회복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 의복을 가져다 입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너를 높여 생명의 빛의 자녀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잔치를 베풀어 함께 기뻐하며 모든 이들에게 공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보이심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자녀임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알려, 그 자녀가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해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심으로 더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함으로 세워져가길 바랍니다.
반지를 끼워주는 것과 신을 신겨 주시는 것은 새로운 언약을 맺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언약과 더불어 만군의 여호와가 나를 돕고, 위로해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모든 지위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만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의 축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쥐염 열매를 먹으며 처량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들도 이와 같은 처지에 있을 때, 내게는 하나님이 남아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고, 그 하나님을 꼭 품어 앉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돌아가선 절대 안 돼 「자존심을 포기해서는 안 돼」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그대로 죽어라.........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포기하게 만들고, 자살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할입니다. 수능을 본 학생이 공부 때문에 자살을 왜 하게 됩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다가 왜 자살합니까? 그것은 마귀가 넌 돌아갈 곳이 없어.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 그러니 정신 차리고 여기서 끝내자. 그게 최선이야 하는 속삭임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조건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악한 마귀가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마귀가 주는 이 달콤한 선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돌아오라」 말씀합니다. 모든 만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성경도 세상의 모든 죄인들은 다 돌아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합니다. “돌아오라” 그러면 승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이 성령 음성만 마음에 가득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시기를 원하십니까? 참 평화를 원하십니까? 모든 문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까?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악몽의 자리에서 탈출하기 원하십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움으로 숨이 막히는 상황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내 삶에 펼쳐지길 원하십니까? 힘들고 지쳐 있는 마음에 쉼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생각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가장 위대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승리할 것이고, 하나님은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여호와 우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께로 움직이는 것을 가장 잘하는, 가장 위대한 결단력의 소유자들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