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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린 특별귀화 1호… 첫 국회의원 탄생도 머지않아
2012/03/30 05:32:55 수정시간 : 2012/03/30 20:07:20
인요한 소장 '공로로 국적 취득' 첫 귀화인
최근 특별귀화자 1호가 탄생했다. 인요한(53)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주인공. 그는 구한말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은 유진 벨(1868~1925년)의 외증손이다. 법무부는 4대째 교육ㆍ복지ㆍ의료 분야 발전에 이바지한 인요한 소장에게 21일 한국 국적을 주었다.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은 인 소장은 자신의 공로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첫 특별귀화자로 기록됐다. 인 소장 예를 계기로 화제가 되고 있는 귀화외국인에 대해 알아본다.
눈에 띄는 귀화인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 엄마로 출연했던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35)씨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비례대표 17번으로 4ㆍ11 총선에 출마했다. 20번대 중반까지 당선권이라서 첫 귀화인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후보는 필리핀에서 만난 한국인 항해사와 결혼했고 1998년 귀화했다. 필리핀에서 의대생이었다고 밝혔던 이 후보는 학력 위조 의혹에 대해 30일 "자연과학부 학생 대부분이 의대를 지망해 한국 의예과 개념으로 분류된다"고 해명했다.
귀화인 정치인 1호는 몽골 출신 결혼 이주 여성 이라(35)의 몫이었다. 그는 2010년 6ㆍ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해 비례대표 1번으로 경기도 광역의원이 됐다. 2003년 한국인과 결혼한 이 의원은 2008년 귀화했고, 이주여성 취업 문제와 다문화가정 자녀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이참(58) 사장은 2009년 귀화인 최초로 공기업 수장이 됐다. 독일 이씨 시조인 이 사장은 1978년 통일교 행사에 참석하러 한국을 방문했다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다. 96년 귀화하면서 한국을 돕겠다는 뜻으로 이한우(李韓佑)로 개명했다가 한국 문화에 동참하겠다는 의미로 이참(李參)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사장이 드라마 <딸부자집>과 <천국의 계단>을 통해 얼굴을 알린 것처럼 미국 출신 하일(54) 국제변호사는 TV에서 부산 사투리를 정겹게 구사해 시청자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97년 귀화한 하일 변호사는 TV에 출연해 "이젠 영어가 더 어렵다"면서 "미국에서 출국 심사를 할 때 말이 안 통해 (한국인)아내를 불러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교과서 때문에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 출신 귀화인 호사카 유지(56) 세종대 교수는 독도 지킴이로 소문이 났다. 호사카 교수는 독도 관련 홈페이지 트루스오브독도(truthofdokdo.com)을 운영하면서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었다. 인도 출신 로이 알록 꾸마르(56) 부산외국어대 교수는 지난해 10만 번째 귀화인이 됐다.
태극마크와 귀화
프로배구 선수 후인정(38ㆍ현대캐피탈)은 귀화인 국가대표 1호다. 화교였던 아버지 후국기씨는 대만 국가대표로 활동했었지만 아들 후인정은 고교 시절인 1995년 귀화했고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수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중국 청소년 대표를 지낸 탁구 국가대표 당예서(31)는 귀화인 최초로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2000년 대한항공 연습생으로 한국땅을 밟은 당예서는 2007년 한국인이 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단체전 동메달을 수확했다. 당예서와 함께 귀화한 석하정(27)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근 국가대표급 귀화선수가 부쩍 늘자 대한탁구협회는 귀화선수만으로 국가대표를 채워질 수 있다는 이유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축구계도 귀화 문제로 시끄럽다. 프로축구 외국인 선수 전북 현대 에닝요(브라질)와 수원 삼성 라돈치치(몬테네그로)가 최근 귀화해 한국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국가대표급 실력을 갖췄지만 굳이 외국인을 국가대표로 뽑아야 하느냐는 여론이 많은 상태다.
에닝요는 한국에서 5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채웠지만 한국어를 못해 귀화시험을 통과하기 어렵고, 라돈치치는 한국말에 익숙해 애국가까지 부를 수 있지만 올해 연말에야 5년 거주 조건을 채우게 된다. 전북 현대는 일단 법무부에 체육 우수 인재에게 주어지는 특별귀화를 요청할 계획이다.
프로농구에도 귀화인 국가대표가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승준(34ㆍ삼성)이 2009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국가대표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출전해 한국이 은메달을 수확하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
귀화인 11만명 시대
수많은 귀화인 가운데 대한민국 귀화 1호는 누굴까?
법무부는 1957년 2월 8일 발행된 관보에 중화민국 산둥성이 본적인 손일승씨에게 귀화를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강원도에서 탄광을 운영했던 손씨는 평소 한국을 좋아했고 사업을 위해서도 한국인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나자 산둥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한국에 온 화교가 상당히 많았다.
한국에서 사는 화교는 꽤 많았지만 손씨처럼 귀화한 이는 적었다. 2000년까지 귀화인은 연평균 34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 처녀들이 농촌 노총각과 결혼하면서 한국 국적을 얻는 사례가 폭발적인 추세로 늘었다. 2001년 이후 귀화인은 연평균 1만명 수준. 법무부 관계자는 "혼인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인이 대다수이고 귀화인 가운데 중국과 베트남 출신이 90% 정도다"고 설명했다.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인이 된 귀화인 가운데 93% 이상이 여성이었다.
법무부 추산에 따르면 현재 귀화인은 11만명을 넘어섰다. 귀화인이 급증하다 보니 귀화 성씨도 400개 이상이다. 법원행정처 사법등기국에 확인한 결과 몽골 김씨, 태국 태씨, 독일 이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청도 후씨 등이 등록됐다. 귀화인은 김씨, 이씨, 박씨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식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출신 지역을 본(本)으로 남기는 경향이 있다.
귀화인이 10만명을 훌쩍 넘어서자 귀화와 관련된 범죄도 늘고 있다. 경찰은 지난달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여권을 위조해 한국인으로 귀화한 중국 교포 김모(30)씨를 구속했다. 귀화 신청서에 부착할 예금 잔고 증명을 위해 중국인과 베트남인에게 3,000만원을 빌려주고 연이자 365%를 챙긴 일당도 검찰에 적발됐다. 이렇게 한국 국적을 얻은 귀화인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돼 정부에 부담된다.
귀화인 10만 시대를 맞아 귀화인을 둘러싸고 긍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인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귀화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동시에 귀화인에 대한 대책도 마련할 때다.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1868~1925년). 그는 성과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꿔 자신을 배유지라고 불렀다. 배유지는 광주와 목포에 학교를 세우고 광주 최초 병원인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을 설립했다. 자기 업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특별귀화자 1호 인요한(53)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겸 가정의학과 교수는 배유지의 외증손자다. 인요한의 미국 이름은 존 린튼. 그의 집안은 미국식 성 린튼에서 첫 음절을 따서 인씨를 자처했다. 인요한 교수는 1993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해 119 응급구조 체계의 산파 노릇을 했고, 유진벨재단 이사장인 형 스티븐(62ㆍ한국명 인세반)과 함께 북한 결핵 퇴치 사업을 전개해왔다. 인 교수의 할아버지는 선교사 윌리엄 린튼(1891~1960년)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일 운동에 앞장섰던 린튼은 자신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꿔 인돈이라고 불렀다. 인돈의 아내이자 배유지의 딸이었던 샬럿은 인사례로 불렸다. 전주 신흥고와 기전여고 교장이었던 인돈은 한남대학교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했다. 인돈 선교사의 아들 인휴(1926~1984년)는 검정고무신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미국 이름은 휴 린튼. 군산에서 태어난 인휴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고, 섬과 벽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200곳 이상 개척했다. 1960년대 순천 일대에 물난리 때문에 결핵이 유행하자 인휴는 부인 로이스 린튼(한국명 인애자)와 함께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다. 이런 까닭에 요한과 세반 형제는 어릴 때 순천에서 살았다. 순천 촌놈과 전라도 촌놈을 자처하는 인요한 교수는 그동안 몇 차례 귀화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어머니에게 제지를 당했다. 한국에서 40년 이상 의료 봉사하면서 살았지만 아들이 조국인 미국 국적을 지키길 바랐다. 인 교수는 3월 21일 한국에서 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한국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됐다. 어머니의 뜻을 거르지 않으면서 한국사람이 된 셈이다. 한국 국적을 갖게 된 인 교수는 "인생에서 제일 기쁜 날이다. 전라도에서 사랑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는데 제가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다"면서 "저는 조상을 잘 만나서 한국에서 태어났고 그동안 받은 감사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적 때문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는데 드디어 한국인이 돼 매우 기쁘다고 했다. |
출처: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203/wk20120330053255121180.htm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상> 결혼이민자를 보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시선
[중앙일보] 입력 2010.06.07 01:31 / 수정 2010.06.07 01:37
부잣집딸, 의대생, 미인대회 출신 … 자스민은 필리핀에서 ‘엄친딸’ 1등 신붓감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서 온 띠동갑 연상 항해사 남편과 사랑에 빠져 그의 아내가 됐다. 열아홉에 장남 승근이를 낳고 한국아줌마 됐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을까?
귀화했고, 주민등록증까지 나왔지만 사람들은 수군댔다 “외·국·인인가봐”… 2등 국민같이 느껴졌다. 6년 전 아들 학교에 급식봉사를 갔다. 아들은 큰 소리로 “엄마”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졌다. 지금 그녀는 당당하다. 영화와 방송에 나갔고 지방선거 비례대표의원 추천 소동 유명세도 치렀다.
10년 뒤 10가구 중 1가구가 다문화가정이 된다. 배우와 정치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 이뤄질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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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자스민이 남편 이동호씨와 만난 건 1994년 의대 3학년 때다. ②95년 경복궁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자스민은 “몸무게가 43㎏ 나가던 시절”이라고 했다. ③1996년 결혼식에서 폐백을 올리는 모습. 부부는 95년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치른뒤, 첫째를 낳고 96년 한국에서 다시 혼례를 올렸다. ④이름난에 ‘자스민바’로 적힌 운전면허증. |
자스민이 남편 동호씨와 아들 승근이, 딸 승연이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
강인식 기자 [kangis@joongang.co.kr] 기자의 블로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출처: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222380&cl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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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소설이네요. 완전 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