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Feuilles Mortes (Autumn Leaves, 고엽)
Edith Piaf
Les Feuilles Mortes (Autumn Leaves, 고엽) Edith Piaf The falling leaves drift by my window The falling leaves of red and goldI see your lips the summer kisses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embleToi qui m'aimais et je t'aimais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Tout doucement sans faire du bruitEt la mer efface sur le sableLes pas des amants désunis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창문곁으로 스쳐지나가네요.적색과 황금색의 찬란한 빛깔로 물든 나뭇잎들이에요.여름날 입맞춤했던 당신의 입술과내가 잡아주던 햇볕에 그을린 손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떠나버린 후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네요.곧 난 예전에 듣던 겨울날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지요.하지만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때면,난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이 떠나버린 후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네요.곧 난 예전에 듣던 겨울날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지요.하지만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때면,난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Edith Piaf (에디뜨 삐아프, 1915∼1963) 20세기 최고의 여가수로 꼽히기도 하는 프랑스 샹송의 여왕, 1999년 미국 뉴스위크가 '20세기 100년의 스타들'이라는 특집에서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했던 에디뜨 삐아프(본명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 Edith Giovanna Gassion)... 150 이 좀 넘는 작은 키 때문에 Piaf(프랑스 속어로 참새라는 뜻)로 불리게 되었던 검은 드레스의 샹숑 여신의 생애는 그러나,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 빈민가인 베르빌의 거리에서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료 자선병원으로 달려가다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베르빌 길복판에서 순찰경찰관이 받아 세상에 태어났으니 시작부터 험한 인생이었던 것이다.에디뜨라는 이름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태어나기 1주일 전, 에디뜨 카벨이란 프랑스의 한 간호사가 독일 병사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며칠을 두고 이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삐이프의 아버지는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하필이면 비극적으로 죽은 간호사의 이름을 따서 붙일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었다.두달 밖에 안된 딸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 딸을 키울 수 없는 아버지는 도망간 어머니의 친정에 딸을 보내고 말았다. 3살 때 눈병을 앓다가 시력마저 잃고 말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외할머니의 기도로 다시 시력을 회복했다는 영화의 스토리 같은 사연을 간직한 채,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로 행인들에게 구걸하다가 자니스 캬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프레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무대에 서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극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처럼 삶 속에서도 수 많은 고통과 시련 그리고 행복과 기쁨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 또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말이다. 그렇게 어려서의 고생과 무절제한 생활로 일찍부터 병고에 시달려왔던 그녀는 50세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할머니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유년 시절에 벌써 루이 뒤퐁(Louis Dupont)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면서 1933년 Marcelle이라는 이름의 딸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그와의 사이도 벌어지고 첫아이도 두 살이 채 안되어 거리에서 죽고 만다. 그녀에게 'La Mome Piaf(작은 참새)'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데뷔를 시켜줬던 르프레 역시 데뷔 얼마 후 1936년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삐아프가 그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겨우 무죄는 입증할 수 있었으나 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레이몽 아소(Raymond Asso)와의 만남은 그녀를 밤무대 가수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수로 거듭나게 해준다. 그는 그녀의 첫번째 히트곡인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이 후에도 많은 노래들을 만들었고, 둘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또 한번 이별을 맞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여전히 극장과 카페는 문을 열고 있었으며, 그녀도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그녀는 가수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에도 진출하여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1940년 장 콕토(Jean Cocteau)의 연극 'La Bel Indifferent(냉담한 미남)'와 죠르쥬 라콤브의 1941년 영화 'Montmartre sur Seine'에도 출연하였다. 1944년 그 유명한 캬바레 [물랭 루즈]에서 이브 몽땅(Yves Montand)을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하여 열심히 선전했으며, 46년에는 샹송의 벗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 후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49년에 그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1950년 9월 20일 삐아프는 그때까지 뤼시엔느 보와이어(Lucienne Boyer)의 남편이었던 가수 쟈끄 필스 (Jacques Pills)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였고, 그 4년 후에 이혼하였다. 1962년 21세 연하인 떼오 사라포와 결혼, 그와 함께 올렝삐아 극장에서 노래하였다. 그러던 1963년 10월 11일,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원인으로 요양 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간 뒤 세상을 떠났으며, 그 충격으로 쟝 꼭또도 뒤를 따랐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녀의 죽음 앞에 오열을 터뜨렸고 팬들이 실신하여 쓰러지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에디뜨 삐아프를 얘기할 때 그녀의 비극적 인생만큼이나 꼭 이야기해야 할 것이 음악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다. 죽기 얼마 전 무대에서 일어난 일만 보아도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쓰러진 적이 있었다. 놀란 스태프가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하자, 그녀는 피아노 다리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끝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집념과 열정, 이것이 돈과 인기에 연연하는 가수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가수의 정신이 아닐까. 이 때문에 그녀가 죽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담은 그녀의 노래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여전히 우리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Les Feuilles Mortes
(Autumn Leaves, 고엽)
The falling leaves drift by my window The falling leaves of red and goldI see your lips the summer kissesThe sunburned hands I used to hold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embleToi qui m'aimais et je t'aimais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Mais la vie sépare ceux qui s'aimentTout doucement sans faire du bruitEt la mer efface sur le sableLes pas des amants désunisSince you went away, the days grow longAnd soon I'll hear old winter's song.But I miss you most of all my darling,When autumn leaves start to fall.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창문곁으로
스쳐지나가네요.적색과 황금색의 찬란한 빛깔로 물든
나뭇잎들이에요.여름날 입맞춤했던 당신의 입술과내가 잡아주던 햇볕에
그을린 손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떠나버린 후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네요.곧 난 예전에 듣던 겨울날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지요.하지만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때면,난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이 떠나버린 후 하루가
Edith Piaf (에디뜨 삐아프, 1915∼1963)
20세기 최고의 여가수로 꼽히기도 하는 프랑스 샹송의 여왕, 1999년 미국 뉴스위크가 '20세기 100년의 스타들'이라는 특집에서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했던 에디뜨 삐아프(본명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 Edith Giovanna Gassion)... 150 이 좀 넘는 작은 키 때문에 Piaf(프랑스 속어로 참새라는 뜻)로 불리게 되었던 검은 드레스의 샹숑 여신의 생애는 그러나,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 빈민가인 베르빌의 거리에서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료 자선병원으로 달려가다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베르빌 길복판에서 순찰경찰관이 받아 세상에 태어났으니 시작부터 험한 인생이었던 것이다.에디뜨라는 이름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태어나기 1주일 전, 에디뜨 카벨이란 프랑스의 한 간호사가 독일 병사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며칠을 두고 이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삐이프의 아버지는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하필이면 비극적으로 죽은 간호사의 이름을 따서 붙일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었다.두달 밖에 안된 딸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 딸을 키울 수 없는 아버지는 도망간 어머니의 친정에 딸을 보내고 말았다. 3살 때 눈병을 앓다가 시력마저 잃고 말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외할머니의 기도로 다시 시력을 회복했다는 영화의 스토리 같은 사연을 간직한 채,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로 행인들에게 구걸하다가 자니스 캬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프레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무대에 서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극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처럼 삶 속에서도 수 많은 고통과 시련 그리고 행복과 기쁨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 또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말이다. 그렇게 어려서의 고생과 무절제한 생활로 일찍부터 병고에 시달려왔던 그녀는 50세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할머니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유년 시절에 벌써 루이 뒤퐁(Louis Dupont)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면서 1933년 Marcelle이라는 이름의 딸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그와의 사이도 벌어지고 첫아이도 두 살이 채 안되어 거리에서 죽고 만다. 그녀에게 'La Mome Piaf(작은 참새)'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데뷔를 시켜줬던 르프레 역시 데뷔 얼마 후 1936년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삐아프가 그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겨우 무죄는 입증할 수 있었으나 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레이몽 아소(Raymond Asso)와의 만남은 그녀를 밤무대 가수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수로 거듭나게 해준다. 그는 그녀의 첫번째 히트곡인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이 후에도 많은 노래들을 만들었고, 둘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또 한번 이별을 맞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여전히 극장과 카페는 문을 열고 있었으며, 그녀도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그녀는 가수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에도 진출하여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1940년 장 콕토(Jean Cocteau)의 연극 'La Bel Indifferent(냉담한 미남)'와 죠르쥬 라콤브의 1941년 영화 'Montmartre sur Seine'에도 출연하였다. 1944년 그 유명한 캬바레 [물랭 루즈]에서 이브 몽땅(Yves Montand)을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하여 열심히 선전했으며, 46년에는 샹송의 벗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 후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49년에 그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1950년 9월 20일 삐아프는 그때까지 뤼시엔느 보와이어(Lucienne Boyer)의 남편이었던 가수 쟈끄 필스 (Jacques Pills)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였고, 그 4년 후에 이혼하였다. 1962년 21세 연하인 떼오 사라포와 결혼, 그와 함께 올렝삐아 극장에서 노래하였다. 그러던 1963년 10월 11일,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원인으로 요양 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간 뒤 세상을 떠났으며, 그 충격으로 쟝 꼭또도 뒤를 따랐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녀의 죽음 앞에 오열을 터뜨렸고 팬들이 실신하여 쓰러지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에디뜨 삐아프를 얘기할 때 그녀의 비극적 인생만큼이나 꼭 이야기해야 할 것이 음악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다. 죽기 얼마 전 무대에서 일어난 일만 보아도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쓰러진 적이 있었다. 놀란 스태프가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하자, 그녀는 피아노 다리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끝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집념과 열정, 이것이 돈과 인기에 연연하는 가수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가수의 정신이 아닐까. 이 때문에 그녀가 죽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담은 그녀의 노래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여전히 우리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첫댓글 너무도 예쁜 우리범방에 금빛별 후배님 이 가을에 맞는 노래 이네요 폰이라 음악을 들을수 없으나 마치 들은양 잔잔하네요 이럭헤 범방에 두후배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추웃데 건강조심하세요~♡
어느 새 가을이 떠나려고 하니 초 겨울의 문턱에서 계절을 놓칠세라늦가을을 느끼며 올려보았습니다함께 들어주시고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배님!!
슬픈사연을 가진 Edith Piaf 의 노래죠?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때면 난 당신이 그리워집니다.누구나 이런추억은 다 있을거에요...금빛별아우님,조용한시간에 감상 잘했어요....
울 선배님께선 그림뿐만이 아니고 음악에도 조예가 있으시군요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추억이지요추위에 건강 유지 잘 하시고 주말 잘 지내셔요 선배님!!
첫댓글 너무도 예쁜 우리범방에 금빛별 후배님 이 가을에 맞는 노래 이네요 폰이라 음악을 들을수 없으나 마치 들은양 잔잔하네요 이럭헤 범방에 두후배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추웃데 건강조심하세요~♡
어느 새 가을이 떠나려고 하니 초 겨울의 문턱에서 계절을 놓칠세라
늦가을을 느끼며 올려보았습니다
함께 들어주시고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배님!!
슬픈사연을 가진 Edith Piaf 의 노래죠?
가을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때면 난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누구나 이런추억은 다 있을거에요...
금빛별아우님,조용한시간에 감상 잘했어요....
울 선배님께선
그림뿐만이 아니고 음악에도 조예가 있으시군요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추억이지요
추위에 건강 유지 잘 하시고 주말 잘 지내셔요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