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인터넷 상에 떠돌던 '한국사의 미스테리'를 반박한 내용입니다.
이 방에도 올라있는데... 방님들의 냉철한 비판과 사고를 위해 옮겨옵니다. 오자는 수정하고 몇가지는 추가했습니다. 역사인식에 참고가 되시기를.....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 인터넷에 이 말이 떠돌고 있은지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근거자료가 없습니다.
2. 중국의 '중국 고금 지명 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 중국 고금 지명 사전을 뒤져봤지만 이런 구절 없습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 몽고가 제주도에 말을 사육한것은 삼별초 제압이후 제주도에 남아있을 제주도의 삼별초 잔존세력 억압을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하기 위함이었으며(당시에 군마는 현재의 탱크와 비슷한 개념이므로...) 나중에는 몽골의 일본 원정군의 군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 위촉오의 병력이 20만명 안팎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없습니다. 이런 사료도 없습니다. (추가)~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서는 삼국의 병력이 수백만으로 나오구요.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 병력이 100만명이라는 사료도 공식적으로 없습니다. 공식적인 기록(구당서)에는 백제의 호구수가 76만호로 가장 많지만 이것조차도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대세이며 또한 전주에서 발견된 신라가 말한 금석문에는 백제 멸망당시 호구수가 24만호라는 등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설사 76만호라 하고 고대 호구통계상으로 계산해볼때 620~700만명의 인구수라고 한다고 해도(이 주장대로라면 삼국의 일국일뿐인 백제 인구만해도 수백년후의 고려전체인구보다 많습니다.== 백제가 산동반도등 대륙에까지 힘이 미칠때는 인구가 꽤 많았겠지만 그 인구도 순수 백제인보다 노예등 피지배 중국인들이 많았을테니) 100만명의 군병력은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현재 남한 인구가 4400만 정도인데 군사수는 60만에 불과할뿐입니다. 이것조차도 주변국의 인구수 병력비율에 비하면 엄청나게 과한 상태입니다.(북한의 170만 군병력때문이죠..) 그런데 당시 백제의 군제상(당시 백제는 귀족들의 사병들의 집합체에 가까운 군대였습니다. 귀족들의 사병으로 오히려 현재의 모병제와 비슷했습니다.) 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아이빼고 여자빼고 노인빼고 하다보면 인구의 대부분이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줘 백제의 인구가 600만명이상이라고 해도 생산활동을 할 남자가 전무한 국가가 고금에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중국에서 전국시대에 둔전제 등 평시에는 경제활동을, 전시에는 병사로 활용하기위한 고민들은 있었지요)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한번에 동원한 최대의 군사력은 채 5만명정도에 불과하며 군사학적으로 추정하면 멸망당시 최대치로 잡아도 15만이 채 되지 못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풍전등화의 상태에서 이것저것 다 끌어모아 동원한게 겨우 계백의 5천결사대였습니다.(이것마저도 귀족들을 닥달해서 겨우 얻어낸겁니다.) 모르겠습니다. 당시 백제 인구가 한 2,500~3,000만명 된다면 100만 군사가 가능할지도... 더더군다나 백제보다도 인구사가 적다는 고구려가 100만의 군사라... 군사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 전성시기인 광개토대왕의 시절에도 군사력은 30만이 되지않았을꺼라는 게 정설입니다. 30만의 군사가 적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징기스칸이 세계를 제패할때 모두 동원한 군사력이 겨우 15만명정도입니다. 그걸로 전세계를 정복했지요. 더더군다나 듣기로는 그중에서 정예병력은 2~3만의 기마군에 불과했다고 하더군요. 군사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정예병이냐 아니냐가 중요할뿐입니다.
더더군다나 전국을 평정하고 고구려에 침공했던 수나라 침공때 군사가 133만명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단지 싸우는 군대의 수이고 물자보급병등까지 합하면 250만명이 넘는 병력이 고구려를 침공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때 위촉오의 군사수가 20만도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원래 난세일때가 군사수가 더 많습니다. 그 근거로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할때 병력만도 100만이 넘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고구려를 침공한거였죠.)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이는 기상대 자료만 꼼꼼하게 따져봐도 당장 거짓임을 알수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15~20년정도를 주기로 이런 현상이 한반도내(더더군다나 남한만 따져도!!!)에서도 일어납니다. 몇년전 경상도쪽에서는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같은날 충청도와 전라도쪽은 가뭄으로 논이 갈라지는 장면등이 뉴스에서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 이것도 허구자료입니다. 곤충학자에 의하면 지금도 한반도내에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하고 몇년에 한번씩정도 일부지역에 소수가 나타나곤 합니다. 다만 지금은 조선말이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현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로 이동성 메뚜기등이 거의 사라졌을 뿐입니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조선중기이후 실록등에서 메뚜기 피해가 급격히 사라져가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합니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 제멋대로 해석한 것으로 비슷한 문장은 있지만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한문학의 이해부족이랄까...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 이는 하북성이나 산동성 또는 현 중국의 일부 해안가쪽에서는 일부 이런 지명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요서와 산동, 하북성을 아우런 일이 사실인만큼 그때의 영향이 아닐까합니다. 다만 옛 문서에 나오는 지명등이 중국에는 남아있는데 한반도에는 없다는것은 억지입니다. 이는 백제나 웅진, 곰마루는 말이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남아있다고 그곳이 백제의 수도인 웅진이라거나 사비공주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주장입니다. 이는 백제계 유민이 일본의 건너가 고향등과 비슷한 지형을 가진 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을뿐 그곳이 웅진이나 사비성이 아님과 같습니다.
다만 중국에 남아있는 지명등이 고구려나 백제가 영유했던 땅의 흔적으로 일부 그런 지명이 남아있을수도 있고 우리는 고려이후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소중화사상때문에 고려에서 불러오던 우리의 전통사상을 대신하기 위해 사대부들이 옛 지명을 파괴하고 엄청나게 많은 지명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우리말로 되어있던 지명등이 한자로 표기되며 변화하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 큰 이유중 하나는 일제 침략기이후 지명의 파괴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이 100년전만 해도 완전히 다른 경우가 일제가 남긴 이미 발견된 사료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구나나 이는 밝혀진 소수일뿐 일제의 측량과 국토정비 사업시 얼마나 많은 지명이 변한것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상당수를 변화시킨 기록만 있을뿐....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 김부식이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한 사료가 없습니다. 어떤 문구인지는 알겠으나 이는 미숙한 한자번역의 오류로 짐작됩니다. 다만 살수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이 학설이 지금과 같이 굳어진 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이후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살수가 어느 곳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 이는 사실입니다. 2~3년전 국내학자들이 몽골로 고구려 성터를 확인하기 위해 내몽골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전통의 성곽 축성기법과 일부 고구려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단지 땅위로 들어난 것만 확인했을뿐 구체적인 유물발굴등은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몽골과 더 긴밀하게 협조한다면 자세한 유물조사가 가능하겠지만 실상 정부나 학계에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하는 눈치입니다. 이 고구려 성터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 고구려의 영토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영토보다 배 가까이는 커지게 됩니다. 더군다나 만주뿐이 아닌 몽골지역의 초원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어 당시 실크로드의 하나인 '초원의 길'이 고구려의 영향력아래 있었는지를 밝힌수도 있는 유물들임에도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깨질까봐 나서지 않고 있고 정부는 일부러 나설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이후 연구는 답보상태로 알고 있습니다.(당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이를 방영한적도 있습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 이도 허구입니다.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이 풍속이나 문화, 생김새등이 우리와 상당히 닮은것이 사실입니다. 언어학적으로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고구려 칸이라는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칸'또는 '한'이라 불리는 어떤 영웅에 그들이 존경의 염을 품고 있는 것은 있지만 그게 동명성왕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명칭도 다른데 말이죠.. 수많은 가설의 주인공 후보들중 하나의 학설이 동명성왕이 아닐까하는 추측일뿐입니다. 거기다가 고구려칸이라니...그런 명칭은 없습니다. 오히려 동명성왕보다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환웅이라고 말하는 인물이 아닐까하는 주장이 더 정설에 가깝습니다.(흔히 말하는 '칸'에 주인공에 대한 것은 몇년전 국내방송사의 다큐멘터리나 BBC, 디스커버리등의 다큐에서도 다룬적이 있습니다. 다만 해외 다큐에서는 소개에 불과하지만 국내의 학계에서는 그 인물이 어떻게든 동이족의 한 분류가 아닐까하는 추측은 있습니다.)
그리고 징기스칸등에서 말하는 '칸'은... 동아시아 초원에 널리퍼진 '칸', '한','단'등 지배자의 명칭의 유사성등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 치우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고리의 수괴이며 묘족의 선조로 여긴다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게 동이족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상고사에 대한 중국의 해석으로는 동이족은 묘족의 3분파중 하나로 여길뿐입니다. 즉, 남쪽의 묘족은 현재의 장족이며 서쪽의 묘족은 티벳족의 조상으로 또 하나의 동북쪽의 묘족은 동이족이라는 식입니다. 묘족 = 동이족이 아니라 동이족+장족+티벳족 = 묘족이라는 식입니다. (추가) 위의 설명은 중국 중심의 왜곡사학이구요, 요즘 양심적인 소수의 중국학자들에 의해 치우가 동이족의 수장이고 고대중국이 동이족, 묘족, 화하족의 쟁투장이었음이 발언되고 있으니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요. 즉, 고대 중국강역이 우리 동이족과 남쪽 베트남중심의 묘족, 그리고 서쪽이 근거지였던 화하족(중국인)의 경쟁터였다는걸 인정하는 중국학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이족은 중국본토의 경쟁에서 동쪽으로 밀려 지금의 곶(반도라는 말 자체가 일본이 자신들의 섬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우리를 격하하기위해 사용한 단어라는데 동의함--섬의 절반(반도)으로 밀려났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사학을 배운 현재의 강단사학자들만 치우를 부정할뿐 국내에서 치우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조선시대등에도 우리의 민간풍습에 치우는 뿌리깊이 스며들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역사적 기록이 아닌 풍습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중국의 입장도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치우가 동이족이나 또한 미개한 족속의 수장등으로 표현하며 한족과 완전히 다르게 엄격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치우를 부정하는 것은 국내가 아닌 일부 강단 사학자들 뿐입니다.(최근은 강단사학자들 중에서도 치우를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 백제의 8대성씨등에서 말하는 풍씨등이 현재 중국에 있는 풍씨등과 어떤 인척관계인지는 알수없습니다. 중국에도 김씨 성이 있지만 혈연적으로는 한반도계와 완전히 다른 김씨인것 처럼 말입니다. 또한 관계가 있다하더라도 지금 진씨성의 중국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지만 천수백년전에 귀화한것처럼 그들도 그런 관계일수 있습니다.
(추가)(풍씨?--백제의 8대 성씨는 사,연,어,해,진,국,목,백씨라고 전하며 홀씨도 있었고 목리만치, 조미걸취, 제증걸후, 고이만년, 흑치상지들의 이름이 전해지며 온조를 따라 백제를 건국하여 십제공신의 반열에 오른 전섭과 마여를 시조로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으나 그 조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백제 멸망후 당에 끌려가 웅진도독으로 돌아온 부여융이 시조로 있는 부여 서씨도 있다. 백제 왕족인 복신의 경우 일본서기에는 귀실복신으로 나오는걸보면 부여라는 건 성씨가 아닌 왕족을 가르키는 호칭이 아닐까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성씨는 신라와 합병되며 백제의 성씨는 일부러 숨겨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백제의 8대 성씨는 백제귀족으로 신라입장에서는 척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성씨를 버리고 어쩔수없이 신라의 성씨를 받아들이거나(고려 왕족인 왕씨가 옥씨로 변하거나 발해왕가의 대씨가 태씨가 되어버렸듯이) 목숨을 구하기위해 성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하다못해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후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정체를 버리고 성과 이름을 바꿔버려 지금도 그분들의 정확한 성과 이름을 모르는 독립유공자도 많습니다.--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였던거나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이란 사람 본명이 장지락으로 추측되듯이..--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현대가 이럴할진데 당시 나라가 망하고 수백년간 성씨를 숨겨야했던 백제 귀족들이 본성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백제 멸망후 당시 일본 기록의 의하면 백제의 8대 성씨는 오히려 일본에 다 나타납니다. 그후 일본의 지배층으로 편입되면서 그들의 성씨가 대부분 바뀌어버립니다만... 명치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한반도계 성씨를 유지하던 가문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명치유신 이후 하나의 일본이라는 모토아래 일본정신이 강화될때 핍박을 피하기 위해 다들 바꾸어 버렸다고 하던데...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 이런 기록이나 무덤도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박혁거세는 승천하였으나 뼈가 다섯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져서 하나로 합치려고 했으나 구렁이가 방해를 하여 어쩔수없이 무덤을 다섯군데에 만들었다는 기록만이 있을뿐입니다. 박혁거세의 무덤은 발견되지 못했습니다.
다만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알려신 동신성모의 무덤이 중국 절강성에 있다라는 말이 와전된것으로 압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저자로 알려진 김부식이 송나라에 외교사절로 갔을때 왕보라는 중국인이 '중국 선도산의 동신성모는 고려의 신인데 아느냐?'라고 물었는데 김부식이 동신성모가 누군지 모른다고 답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철저한 신라계 중심주의자였던 김부식마저 박혁거세의 모친이 동신성모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이는 박혁거세의 모친이 동신성모라는 주장이 후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정화연간(1111~1117년 사이)에 송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식이 모른다고 했던 동신성모상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고려도경에 보면 동신성모상이 고려의 동신성모지당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어쩌면 송에 다녀왔던 김부식이 중국에서 신으로 모신다는 동신성모을 신라계 인물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박혁거세의 모친으로 날조를 하기위해 모셨거나 아니면 박혁거세의 모친이었다는 것을 몰랐다가 신라계 인물들의 단합을 위해 모셨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동신성모의 무덤이 절강성에 있다고 하지만 그게 반드시 박혁거세의 모친이라거나 하는 기록이나 유물은 없고 설사 동신성모가 박혁거세의 모친이라고 해도 그 무덤이 반드시 동신성모의 무덤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추가)이는 중국인들 특유의 실제 무덤이 아니라고 해도 가묘와 사당을 만들어 숭배하는 습속일수도 있고 또 실제로 박혁거세의 일부 후손이 선조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발전이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관운묘(관운장 영정을 모신)가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해 있듯이 추종자들이 건립한 일종의 사당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이로 인해 박혁거세의 무덤이 중국에서 발굴이 되었다거니 하는 주장은 터무니 없습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 이는 도대체 어떤 물품을 말하는지 알고 싶군요. 단순하게 한반도에서 생산할수 없는 것을 수출할수 있다니... 또한 그렇다고 해도 고려와 조선은 당시 중국의 통일왕조를 제외하고는 동북아의 주인이었습니다.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했지만 여진족은 전통적으로 고려이래 고려와 조선의 속민이었고 하다못해 고려, 조선과 3대 우호국이었던 유구왕국조차 조선의 왕을 명의 황제와 동격으로 대했다는 기록등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일본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영향력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남기지 않지만 은근하게 상국대접을 하던 상태입니다.
이런 고려와 조선이 명등과 조공무역을 했듯이 이들 연해주, 만주, 일본, 유구왕국등에게서 조공무역과 유사한 형태로 물물을 교환하고 이 물물을 또 명제국등과 조공무역이나 사시무역의 형태로 수출했었던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설사 고려나 조선에서 생산할수 없는 물품도 수출할수 있었던 내용이 설명가능합니다
(추가) 당시는 우리의 해상세력이 지금보다 월등하였습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린뒤에 적국에 지도를 넘기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형을 내렸듯이 당시는 강토를 보존하기위해 육로를 중심으로 하지않고 수로중심의 조운이 성행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 이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더욱 필요한 부분입니다. 단지 이 이유하나로 삼국이 한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삼국의 유물이 천체관측지점에서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가) 삼국이 한반도(곶)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등은 대륙에도 그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어느정도 해석할수 있을듯 합니다. 고대의 우리 강역이 중국본토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인(화하족)과의 쟁투에서 패하여 한반도(곶)로 밀려나는 과정이었고 중국의 북부과 동부는 상당기간을 우리 강역으로 지배하였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으면 해석이 가능하지요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 개인적으로 한단고기는 내용검토가 필요한 문헌이라고 생각됩니다. 천체관측기록등에 비추어 무시할수 없을 기록의 정확성도 있기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만큼 위서로 판독될만한 기록도 같이 있다는게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한가지 꼬투리를 가지고 이게 진서니 위서니 따지기보다는 그저 담담하게 연구해볼만한 문헌이라는 의견입니다.
거기에는 무시할수 없을만한 기록도 분명히 있으며 또 쓰레기같은 기록들도 같이 공존하니 연구를 통해 버릴것은 버리고 얻고 연구해볼만한 것은 연구해야지 몇가지를 트집잡아 위서다 아니다라고 할수 없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어차피 한단고기는 단 하나의 책이 아닌 옛 여럿 기록들을 하나로 모았다는 게 서문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위서도 있을것이고 또 진서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충분히 참고할만한 자료들도 역시 있을것입니다. 하나가 맞았다고 전체가 다 맞다고 우기거나 하나가 틀렸다고 전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하나 나누어 분석, 연구,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추가) 계연수선생이 저자로 되어있는 <한단고기>는 수많은 번역서가 있으며 하물며 일본인이 번역한 책을 다시 재 번역하여 출판한 책도 있습니다. 그 책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를수밖에 없으며 일본인이 번역한건 그조차 왜곡을 많이 해놓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볼수 있지만 제 생각에는 임승국 번역의 <한단고기> 가 그중에서 제일 원본의 뜻에 가깝게 해설된 책이 아닌가 합니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 한단고기를 제외하고는 백제의 인구가 얼마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구당서등에 76만호기록등이 보이나 백제 멸망의 당사자인 소정방의 당시 기록이나 신라가 말한 백제의 호구수는 훨씬 적은 20여만호에 불과할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제일 많이 기록된 구당서등을 이유로 백제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보다 많다고 할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근대인 조선중기의 인구기록 조차 수십년 사이에 수백만명이 늘었다 줄었다 할정도로 엉터리인게 대부분입니다.
왕실의 잔치때 썼던 숫가락 갯수까지 기록하며 세계 역사상 전무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같은 수백년의 기록마저 남긴 조선조차 인구 호구수 조사에서는 엉터리였습니다. 그런데 천수백년 백제 인구수가 단순하게 얼마다라고 말한다는게 오히려 우스울뿐입니다. 컴퓨터와 전산등의 호구 기록이 완전히 정비된 현재조차 인구조사는 하나하나 수를 헤어리는게 아니고 이만큼 인구가 늘었으니 인구조사동안 얼마가 죽고 얼마나 태어날꺼라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 인구조사를 합니다. 그것도 각각 집을 개인 방문해서까지 조사하면서도요(인구센서스(인구 총조사)는 10년에 한번, 5년에 한번씩 간이 센서스).
백제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았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런방식으로 계산을 해도 믿을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추가)-- 대륙백제를 인정한다면 대륙백제 인구수와 일본 경영백제(김성호의 일본본토 비류백제론)를 포함한 인구수는 구당서의 기록이 맞을수도 있습니다.
백제 멸망시기에는 외부영토를 모두 잃고 반도(곶)안으로 왜소화된 백제일뿐이니 기록의 차이가 나는 것일수도 있지요
혼란기 조선 중기에는 임진, 병자 양란으로 말미암아 인구수가 일정치 못했고 세금을 걷기위해 무리한 인원등재가 비일비재했으며 이때문에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보면 인구기록이 완전히 엉터리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바라보아야 할듯..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 흔히 말하는 삼국은 한반도에 존재한적도 없고 대륙에 몽땅 있었다라는 사람들의 주장중 하나가 이것이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유물문제때문에 이는 무참하게 깨어진 문제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한반도에 삼국이 없었다고 주장해도 한반도에서 삼국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쩌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주장이 말하는 장안에서는 우리 삼국시대 유물은 전무하구요...
아무리 역사학이 유물이나 사료만으로 설명할수 없다고는 해도 기원전 수백년전 유물부터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의 멸망시대 유물까지 천년의 시대의 흐름의 유물이 한반도에서 쏟아지는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일제가 날조하기 위해 낙랑 봉니같은 것이야 평양에 몇개 덜렁 가져다 놓을수는 있는거지만 정작 사람들이 생활했던 유물이 나오지 않아 날조가 이미 증명되었던 것처럼 천년의 세월이 쌓인 삼국의 유물을 무시하고 삼국이 한반도에 없었다라고 주장해도 그 주장의 허구성만 드러날뿐이지요.
그리고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최근 북한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고구려 평양성의 규모는 현재도 계속 외부로 확장중이랍니다. 즉, 지금껏 생각했던 고구려 수도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것이 최근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되고 있지요. 발굴이 완전히 끝나봐야 알겠지만 예상되는 고구려 수도의 크기는 오히려 중국 당나라의 수도 못지않은 규모일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학설입니다. 도대체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양이 고구려 수도로는 작다느니 장안과 소름끼치게 일치한다느니 하는 주장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소름이 끼쳐보게 그 장안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는 자료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전 아무리 봐도 그런 소름끼치는 장면이 없더구만...
일제의 역사왜곡도 왜곡이지만 이렇게 줄기차게 역사적 유물과 사료를 깡그리 무시한채 아무런 근거없이 대륙삼국설을 주장하는 자들도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 있어야 한다.
===> 이 문제는 성의 형태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이분들은 한반도내에서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돌로 지어진 성을 찾기때문에 한반도내에 그만한 성이 없다고 우깁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일 발달된 축성기술을 가진 것은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는 '성의 나라'라고 할만한 무수한 성이 존재했는데 특히나 석성을 상당수 가진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고구려 지형의 상당수가 초원이 벌판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면도 있습니다. 석성이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산을 기준으로 성을 쌓은 산성과 토성등이 존재했었습니다. 다만 이런 성들은 천수백년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거나 자연지형같이 변해버렸기 때문에 잘 모를뿐입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의 성은 바로 판축기법등으로 이루어진 '토성'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일 번성하고 세계 4대도시로 꼽히던 당나라의 수도 마저도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중국의 만리장성도 벽돌이나 돌로 지어진 번득한 모습이지만 실상 이는 대부분 명나라나 청나라시대 만든것이고 진시황제 시절에 지어진 만리장성은 토성이었습니다. 이는 진을 계승한 한나라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발견되는 삼국시대 성은 대부분이 토성중심이지 석성 중심이 아닙니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시대 성인데도 석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대부분 고려와 조선조 시기 석성으로 변경된 것들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토성은 무너지고 또는 자연에 파묻혀 산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성의 흔적을 찾을수 없을뿐 단지 성이 없다고 저 기록이 틀렸다고 말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백제 무왕, 의자왕시절에는 백제가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100여개 성을 빼았았다고 나옵니다. 이만해도 흑치상지가 저항했다는 200여성의 절반에 달할정도입니다. 이 대부분이 산성이나 토성일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 쌓기 시작한 석성을 중심으로 200여 성을 찾으니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추가)--성(城)의 개념을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도성을 둘러싼 산성(山城)으로만 한정하지말고 부락단위의 생활 근거지 개념으로 보면 작은 지역에도 수백개의 성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할 수있을것임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 이는 위에서 100만 군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했기때문에 줄입니다. 또한 조선 초 인구의 37만명은 대부분 양반을 중심으로 한 남자들만을 조사했을뿐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나 양인, 아녀자와 고려시대 수많았던 승려들을 모조리 제외한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보다는 훨씬 많습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 이는 중국 사학자들과 우리나라, 북한 사학자들간의 현재도 논쟁의 대상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사학자들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이 확정된 것은 거란족인 요나라가 그 지역에 등장한 이후입니다. 그 이전인 삼국시대의 요동, 요서와 현재 말하는 요동, 요서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 도대체 이런 뻥을 누가 쳐대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지도가 있다면 제발 공개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중국애들 동북공정 한방 먹이게.... 이런 지도는 발견된적도 작성된 적도 없습니다.
다만 교황청의 조선교구를 나눈 지도에 간도지역이 표기된 소시에때 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시즘 앙꼬레'에 게재되었던 지도가 유일합니다. 저도 간도가 조선의 영토였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만... 아쉽게도 이 자료마저도 당시 남하하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일부러 엿먹이기 위해 프랑스가 제작했다는게 최근 정설입니다. 이 시대만 해도 이미 러시아와 청이 이 지역의 영향력을 다투고 있었고 조선은 분명히 자국 영토였음에도 별로 관심도 없고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때이죠. 정말 열받는다는...휴...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 이는 그야말로 야사일뿐입니다. 물론 어느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오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국내학계는 별 관심을 두지않고 있습니다.
(추가)--얼마전 텔레비젼 역사다큐에서 연개소문이 퇴각하는 당군을 쫓아 중국 깊숙이까지 쫓아가 섬멸하였다는 방송에서처럼 사실일 수도 있지요. 후퇴하는 적에게 치명상을 입혀 회복을 더디게하고 재침을 막기위한건 병법의 상식이니까...그때 장안을 정복하고 중국의 본토를 장악했더라면.^^* 정사, 야사 구분에 연연함 없이 냉정하게 역사를 복원해내려는 노력을 경주해야겠습니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 고려성터 존재합니다. 아마도 이곳이 광개토대왕시절 영향력을 미쳤던 지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언제까지 이곳을 영유했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상당수 기간동안 이 지역을 고구려가 지배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있다.
===> 고구려가 북경근처까지 진출했던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이건 패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 고구려왕족인 고씨 물론 존재합니다. 고구려 멸망시 왕인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 귀족층 수십만명이 당으로 끌려갔으니 고구려 왕의 후예가 있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장수왕 후손인 사람이 유리왕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에는 의문을 표할수밖에 없습니다. 예전 다큐멘터리로 이들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10여년 전만해도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며 다들 한족인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몇년전부터 자신들이 장수왕의 후예이니, 유리왕의 무덤이 있다거니 하는 진의가 의심스러울수밖에요.
오히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에 이용되기 위해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가 말하는 고구려 왕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고구려 왕이 무덤이 왜 이곳에 있겠느냐? 당연히 고구려는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거다." 이런 뉴앙스가 중국 정부 관계자 인터뷰에서 묻어나더군요.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 수많은 성이라니요..휴 천수백년간의 역사기록을 다 들추어봐도 만주를 제외하고는 하북성 부군의 수십개 성에 불과합니다. 아무래도 이곳까지 고구려가 진출했다는 증거는 될수 있을지언정 그때문에 고구려가 중국 대륙 내부에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않습니다.
하북성 주변을 제외한 고려성이나 고구려성이 중국 내륙 어디에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 어떤 지명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중국에 의자나 흑치라는 지명이 있나보지요? 하나 의자라는 지명이 의자왕을 말한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패망한 왕국의 마지막 왕의 지명을 따서 부른다고 하는것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전성기를 이끈 나라라 백제라는 이름이라면 또 몰라도...
또 흑치에 관련된 지명은 베트남등의 동남아시아쪽에도 존재합니다. 베트남의 일부 부족중 어떤 이들이 이를 까맣게 하기 때문이지요. (黑齒)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 대단합니다. 이 글을 작성한 분이 어떤분인지 지금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는 백제의 지명들을 다 알고 계신 분인가봐요. 그 지명들을 다 나열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중국대륙에 일부가 있다면 몰라도 "모두" 있다라...허허허... 말할 가지조차 없네요.
그리고 지명의 일부는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룡곡' 이라는 지명이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등에 여러곳이 있는데 이곳이 모두 한곳을 가르키는 지명이 아닙니다. 처음 이름을 지으신 분이 대충구불구불하고 구름 자주 끼고 골짜기이면 비슷한 생각을 가지니 지명도 비슷해지지요.
그리고 백제 멸망후 지명은 대부분 신라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고려때도 바뀌었구요. 조선으로 바뀌며 상당수가 변했고 일제때 대변혁을 또 한번 했지요.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 이 근거 자료를 좀 보고싶네요. 한 360여개도 아니고 김부식이 일일이 세어서 359개라 정확히 맞추었다니..허허..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 일반화의 오류 아닌가요? 한단고기를 증명하기 위해 규원사화가 위서라고 혼자서 전제하고 원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으니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고 한단고기도 위서가 아니라고 우기는....
위에도 말했듯이 한단고기는 하나의 사서가 아니고 여러 사서를 하나로 묶은 겁니다. 규원사화 하나가 위서가 아니라고 한단고기의 다른 기록들이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른 원본들이 모두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밖에 없다.
===> 중국의 고문헌에 나오는 발음법이라는게 정확히 뭔가요? 또..그 고문헌은?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한자 발음법이 맞고 대만이나 중국대륙에서 말하는 본토 중국인들의 한자 발음법이 틀렸다는 건가요? 실소를 금할수가 없는....
이는 마치 콩글리쉬 발음이 정답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군요.(추가)-- 한자를 처음 사용한 민족이 우리 동이족이라고 하는 여러 가설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화산 활동기록은 알수없군요. 하지만 경주에서 기원전부터 유물이 나오고 또 신라 수도인 서라벌에 있다는 유물이 나오고 있군요.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중국 문헌 어디에 동명성왕에게 한나라 수장들이 패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설사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 한나라 수장들을 한무제가 육시했다는 것을 가지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는 이미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도 주장하는 있는 한사군의 허구나 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더라도 요서지역 일부 지역에 설치하려다 쫓겨갔다는 것으로 정설이 된게 아닌가요?
도대체 동명성왕이 한나라군을 패배시켰다는 구절이 고금의 역사기록 어디에 나오나요?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 이 주장의 근거는? 단지 애신각라라는 한문을 풀이해서? 그럼 김대중은? 마이클은? 고이즈미는 왜 고미즈미이지? 토요토미는 왜 토요토미인거지? 우스운 소리일뿐이다.
사료를 해석하며 무조건 한자로 해석하는 덕분인지 이제는 단순하게 한자로 표기했을뿐인 성씨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가구가락(可口可乐)라고 쓰는 코카콜라의 뜻도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소리를 표기한 저런 것마저 한자로 하나하내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애신각라는 그저 단순한 만주어로 금나라황족의 성씨를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완안씨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성씨가 애신각라라고 변했을 뿐인 것이다.
신라? 망한지 수백년이 되어가는 신라가 뭐가 그리워서 잊지않고 사랑한다고 애신각라라고 할까... 그렇다면 그전에 금나라를 건설했던 완안씨는 왜 성씨를 애신각라라고 안하고 완안이라고 했을까?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이라고 표기했다고 해서 그게 코카콜라를 자기네 표기법으로 쓴게 아니고 입에서 허락하고 입이 즐거운이라는 뜻풀이를 해야만 하는가?
금나라 시조가 신라사람 김함보이고 그가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신라를 잊지않고자 했으면 금이 아닌 신라라고 나라를 짓거나 성을 신라로 짓지 왜 완안이라고 하였을까? 결론? 아무 뜻이 없다는 거다. 그저 완안이라고 하고 애신각라라고 하였을뿐이다. 자기가 금나라 왕족인것도 모르던 자가 어느날 문득 깨닫고 그저 성을 바꾸어 애신각라라고(이것도 만주어를 한자로 쓴거니 발음은 또 우리가 아는것과 틀릴꺼다.) 한것을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라...
그렇게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해서 청나라가 조선 서라벌에 무슨 혜택이라도 베풀어줬나? 이야말로 결과를 놓고 아전인수로 해석할 뿐이것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 이번에는 위 글을 쓴 사람이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한다.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한다더니 이제는 몽골어로 그저 금나라 겨레를 말하는 것이란다..휴
맞다..금나라 겨레... 당연한거 아닌가? 자신이 금나라 왕족의 후예인것을 모르던 자가 우연히 자신이 금나라왕족의 후예인것을 알았다. 그래서 난 금나라의 후손이다라고 한것이 바로 만주어로 금족이라는 아이신카라... 단지 그걸 한자로 발음에 맞게 표기한게 애신각라일뿐이다. 그뿐이다. 거기에 무슨 신라가 끼어들 건덕지 따위는 없다.
청나라가 후금이라고 한것은 금나라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왜 신라 왕족이 금씨다라는게 들어가나? 이해불능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 이 글을 쓴 사람이 점점 역사가 무지하다는게 드러나고 있다.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것은 신라의 후예인 조선이기때문에 부모님의 나라라고 한게 아니라 당시 여진족에게 조선은 부모의 나라임을 강요했다. 이는 조선이전 고려때에도 마찬가지이다.(심지어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에게도 고려는 부모의 나라임을 강요했다. 물론 금이 강성해지며 뒤집혀버렸지만..) 이는 마치 조선이 명을 보며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흔한 외교적 수사일뿐이다.
더군다나 당시 누르하치가 조선에게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라고 말한것은 조선의 힘을 염탐해보기 위해서였던것 것이지 무슨 조선이 신라를 이었기 때문이 아닌것이다.
원래 당시 만주의 지배자는 이성량으로 바로 조선계인 성주이씨 가문의 사람이었다.(이 자가 바로 조선의 원군으로 왔던 이여송의 아비이다.) 이성량은 만주를 지배하며 여진과 조선의 중계무역을 조정하며 힘있는 여진족장이 나타나면 서로 분열시켜 여진족의 통합을 막는등 명 중앙 조정에까지 막강한 힘을 뻗치던 만주일대의 제왕이었다. 이자가 버티고 있을때는 천하의 누르하치마저도 공손히 그의 힘앞에 머리를 조아릴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암살인지 급살인지 알수없게 갑작스럽게 이성량이 사망하자 누르하치는 재빠르게 부족을 통합하고 이성량이 키워놓은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 세력은 한족과 여진, 조선인의 통합체같은 조직이었는데 이 세력을 흡수하며 누르하치의 후금은 그후 청나라가 될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한족을 통치할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성량의 세력을 이어받은 아들들이 모두 중앙인 북경에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누르하치의 야심을 간파하고 이성량으로 하여금 누르하치를 제거할 명분을 찾기 바빠던 명은 갑작스런 이성량의 죽음으로 만주일대의 세력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해 혼란해 빠지고 더군다나 이성량의 아들들은 서로 자기가 아비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북경에서 세력 다툼을 하는 사이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고 만주일대의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누르하치는 명의 군벌로서 존재할것만 생각했지 독립을 생각한것은 아니었는데 만주일대의 세력권을 손에넣은 누르하치가 명 조정에 신하로서 충실하며 대신 만주지역의 자신의 세력을 인정해 명의 관직을 요구했지만 명 조정이 거부하자 후금을 건국하게 되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왜에 침공을 당하자 그동안 상국으로 명과 조선을 모두 섬겨왔던 여진족의 수장인 그러서는 조선의 힘이 어느정도 되는지 확인을 해봐야 겠고..이런 이유로 부모의 나라를 침범한 왜구를 몰아내겠다라는 핑계를 대고 조선에 들어오려고 했던것입니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 신라후예 김함보의 후예이니 이건 사실이죠.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 김함보의 후손이니 신라계였을지는 모르지만 신라인은 아니죠. 정확힌 말하면 고려인이지...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 아까도 말했다시피 김씨 후손이다보니..김씨 후손이면 족보에 있겠죠. 다만 금나라 태조가 신라계라고해서 애신각라가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소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 이때 백제 북동쪽은 낙랑국이 맞음.(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님) 낙랑국이 망한것은 313년 고구려 대무신왕때로 이때만 해도 고구려는 만주벌판의 아직 약한 소국이었고 온조왕 13년이면 낙랑국이 아직 강성할때임. 백제 북쪽이 고구려로 막히려면 아직 319년은 더 있어야..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 고구려가 북경 근처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는데 마치 혼자만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이분은...에구..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 이 부분도 우리가 배운대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국사교과서에는 분명히 백제가 요서나 진평군등 대륙 일부를 지배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역시 이부분도 남들 다 아는걸 몰랐지?라고 하는 듯한 이 늬앙스는...난감...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 끊임없이 삼국과 고려의 대륙설을 주장하는 분들은(하긴 최근에는 조선도 만주에 있었다고 이분들은 주장하지만....-_-)어떻게든 삼국과 고려를 대륙에 끼워맞추고 싶겠지만... 이말대로 하면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상해와, 남경, 절강과 광동지역, 감숙성등의 대륙의 노른자위 땅이 모조리 고려의 영토여야 한다.
좋다.그렇다 치자.. 그럼...송은? 대륙을 통일했다는 송은 그럼 무슨 대륙을 통일한거지? 저 인도즈음에 송이 위치한건가? 송은 고려보다 몇배의 영토와 수십배의 인구를 가졌다는 송은 어디로 간거지? 저 척박한 천산산맥에 그 인구가 있거나 인도대륙에서 놀고 있었단 말인가?
그럼..유물은? 송의 수도인 개봉은 어디로 간건죠? 아니 왜 이상하게 고려 땅 근처에서 송의 수도가 나오고 송의 자기가 나오며 송대의 건물들이 있는거죠? 아니..그렇다면 고려의 유물은? 그 번성했다는 개경의 유물은 왜 전혀 대륙에서 한점 보이지도 않는 걸까요?
아무리 사기를 쳐도 사기를 치기 어려운게 수백, 수천년간 쌓인 유물입니다. 지금 중국이 아무리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부라고 우겨도 우리가 아니라고 아는것은 그 유물때문입니다. 그것도 한두해 쌓인것도 아닌 수백년간의 축척된....
아무리 고려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라고 우겨도 한반도에서만 고려의 유물이 나오는데 그걸 아니라고 할수 있다는 건가요?
당시 축척기준으로 외국인이 엉터리로 적어놓았다고 그걸 다 믿어야만 하는건가요? 현재도 외국 어느 교과서에는 한국인이 독일계라고 국립교과서에 올라와있다는데 그럼 우리는 독일계인건가요?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 이건 완전한 역사왜곡이군요. 제가 아는 몇몇 몽골인들을 잡아 물어봐도 택도 없는 소리말랍니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 제게는 잘 들어맞는 지명과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 잘 들어맞는데요.. 아무런 증거없이 한반도에는 잘 안들어맞어...하면 끌나는 건가요? 그럼 전 잘들어맞어~~ 하고 말래요..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 사람 사는곳인데 비슷해 보이는 지형에는 비슷한 지형을 붙인 곳도 있겠죠. 그리고 도대체 임잔왜란 당시의 나오는 기록의 '일부'도 아닌 '모두'가 중국에 존재하나요? 예를 좀 들어보시죠? 자신없으신가요?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 난중일기 번역을 한두분이 한것도 아니고 다른사람은 잘만 이해하는것을 이분은 왜 이해가 안갔다는거죠? 설마 한문능력이 모자라서?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 선조가 조선의 서쪽에 있는 명나라로 도망가기 위해 떠난 일이니 서행이죠. 지금의 상식으로야 배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면 간단할것을 뭘 그러냐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왕이 도성을 버린것도 그런데 배를 타고 상황을 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것을 신하들이 말려 의주까지 갔다가 다시 왕이 압록강을 넘으려는 것을 재차 말렸던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왕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서쪽에 있는 명으로 도망가려하니 서행이지만 신하들이 상황을 보자며 재차 삼자 말리니 평양으로 의주로 버티다 간것뿐 서행이 많습니다.(정말...선조 못났다...휴)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 당연히 방향이라면 북상이 옳겠지만 일본의 입장에서야 한반도가 모조리 서쪽이니 서쪽으로 진출했다라고 하는게 맞지요..
(추가) 일반적으로 서울을 점령하려면 북상한다는 표현보단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한반도는 부산의 북쪽이라고 할 수 있는 강원도와 경북은 거의 산악지대입니다. 현대도 오지가 많은 그곳인데 예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 많은 대부대의 이동이 쉬웠을까요. 데프콘이라는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려면 역시 문경새재를 거쳐야 하는데 이것도 완전한 북상이라곤 보기 어렵지요. 오히려 서북쪽으로 진출했다고 보는 게 더 옳습니다. 또한 경상도의 서쪽은 전라도와 충청도인데 알다시피 이 두도는 예전부터 곡창지대였습니다. 당연히 전쟁을 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곡창지대에 대한 수탈도 해야 할 것이고 또한 어떤 면에서 보면 북상하는 것보다 전라도를 거쳐 가는 것이 훨씬 빠를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대관령을 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말입니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김정호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등을 두루 섭렵했답니다. 김정호는 조선말기 대표적 실한자중 한명입니다. 그의 친구로는 그 유명한 최한기가 있습니다. 최한기의 박학다식함은 유명해 조선을 떠나본적이 없는 사람이 세계지리에 대한 책을 쓴것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려 브라질에 대한것도 있습니다. 단지 천하에 있는 모든 책을 수집해 공부해 그러한것이지요.
오히려 최한기에 비하면 김정호는 조금 공부가 떨어지는게 아닐까 싶을정도인데 대동여지도를 만들지 못했다라... 나중에 저승가시면 고산자님께 뺨이나 맞고 정신좀 차리시기를...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 그래서 대동여지도가 김정호가 만든것이 아니라는 건가요?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정말 여러 사람 죽이는군요. 그럼 무령왕릉은 광복후 발견이 되어서 알렸졌는데 우리나라 정부의 자작극이겠군요? 이번에 서울 강동구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지원을 받은 이명박 시장의 자작극인가요? 왜요? 천수백년전부터 있었다면서 지금에야 공개되었는데... 자작극이 아닌가요?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 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 아까는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든것은 어불성설이라면서요? 일제가 조작한거라면서요? 조작되었다면서 이것은 또 왜 맞다고 하시지? 그럼 그 조작잘하기로 유명한 일제가 왜 그건 놔두었을까요? 지워버렸지?
그리고 한문해석이 또 안되시나? 대동여지도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의 둘레라고 되어있지 어디 조선의 강역이 10900리라고 되어있나요? 왜곡이신가...해석이 안되시는 건가?
아래가 원문부분
蓋我東邦域 三面際海 一隅連陸 周一萬九百二十里 凡三海沿一百二十八邑 總八千四十三里
우리 동방 강역은 3면이 바다에 접하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으며, ((둘레는 10920리))이며, 세 바다 연안은 도합 128읍에 총 8043리이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백성은 태평의 인으로써 습속에 기자 단군의 교화 있어 사방에 내정의 도가 고루 미치고, 정해좌 남면지위가 실로 주나라 ((낙양))과 같으니, 동서관 삼경이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천부 금성이 되어 삼가 억만세 무강지휴라, 아아 훌륭하도다.
도대체 낙양과 같으니라는 비유법이 언제부터 낙양이다..라고 우리말이 바뀐걸까요? 이제부터 난 장동건 닮았어..하면 이제부터 난 장동건이 되는건가요?(그럴수 있다면...음...)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 16C 일본은 땅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금덩이다라고 유럽인들이 믿으며 지팡그라도 했는데 그럼 유럽인들이 그렇게 말하면 다 사실인건가요?
그럼 나도 안타리아라는 나라는 미국 한가운데 있다. 땅 크기는 미국과 러시아를 합친것 만하고 북쪽에는 일본이 있다. 자....이렇게 말하면 4백년후에는 안타리아라는 나라가 미국 한가운데 생기고 땅크기는 미국+러시아만해지고 북쪽에는 일본이 위치해야만 하겠군요...^^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 또 한번 반복해요? 당시 유럽사람중에 조선이 어디 붙어있는 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지금도 유럽가면 한국이 어디있는 나라야? 필리핀 옆이야? 하는 소리를 작년에 듣고 온 사람한테...이럴말은 택도 안먹힙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 20만권이지만 태운 책의 종류는 57종 뿐입니다. 다른 책들도 어느정도 섞이기는 했겠지만 귀한 고서를 다 태웠다고요? 증거있나요? 사진있어요? 증인은요? 다큐라도 찍어뒀나요?
그리고 누가 역사서가 20만권이라고 그래요? 누가 그런 뻥을 님에게 가르쳐줬죠?
아, 물론 우리 역사서도 일부 있겠지요. 근데... 미쳤어요? 돈되는거라면 껌뻑죽는 일본애들이... 귀한 고서들은 지금 다 일본왕실 도서관에 쳐밖혀서 햇빛구경도 못하고 있을껍니다. 듣기에 그 큰 도서관의 절반가량이 우리나라 책들이라는게...거기 가있지 미쳤다고 일본애들이 태워요? 차라리 연구해서 우리 역사 왜곡하려고 써먹을려고 놔두고 있으면 있지...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어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 당연하죠. 일본밑에서 설설기며 식민사학자들에게 배운 자들이 지금 강단사학자들인데...얼마나 왜곡해놨는지... 그렇다고 우리나라들이 조선시대까지 모두 대륙에 있었다고 왜곡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들이죠..
첫댓글술래님,좋은 자료 유심히 보았습니다. 제가 올린 글 중에 잘 못된 것이 있군요. 한국 역사서 20만권을 태웠다는 말은 그 악독함으로 보아 무심히 보아넘겼고, 그랬으려니 생각해 왔습니다. 저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수집벽입니다. 책이나 유물은 수집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가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아마 책도 모두 가져갔을 겁니다. 얼핏 보았지만 중국 삼국 시대의 군사가 그렇게 터무니 없는 사실 기록은 엉터리지요. 환단고기가 진서냐 위서냐 가리기 전에 학자들이 더 진지하게 연구를 해 보아지요. 대부분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에구..반박문은 제가 전체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될까 하여 역사전문가의 분석에 저는 단지 조금 살을 붙였을 뿐입니다. 비아냥거리는 식의 말투에 대한 변명입니다. <동산마술사>님의 역사인식과 해박함에 늘 감탄하며 올리신 자료는 소중하게 읽고있습니다. 퍼가다 제 서고에 넣어두기도 하구요..^^* 어서 통일대국이 되어야 중국 일본에 있는 고서를 찾아 역사를 복원할텐데...건승하십시요.
저는 이제 읽어보네여.. 우선 앞 10번정도까지 읽었어여.... 상당히 체계있는 답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강단사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부분이 있는듯 합니다. 물론 저는 재야사학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일 재야사학에 근거를 두고 본다면, 인구이 병사 등의 규모 등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단순히 한반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면,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왕건과 신검이 동원한 최대 병력이 각 각 10만 ~ 12만 정도 인 것으로 압니다. 그럼 그 후대는 당연히 더 적을 가능성에서 보아도 위의 글을 당상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야사학자분들은 고대의 강역 개념이 한반도나 만주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심지어는 유럽까지... 아직은 어느 누구의 견해가 맞는지는 불투명하지만 위의 글이 그런 쟁점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어 상당히 좋은 자료가 될 듯 합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잘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배움을 가질듯 합니다.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잘읽어보았습니다.. 저도 항상 궁금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1)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2)대륙백제 근거설 3)한사군에 대한 정확한 4)위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고조선의 정확한 해석 5)일본 왕가의 뿌리 6)칠지도의 실체 등등등 이었는데.. 위글을 읽으면서 더욱 혼란이 오내요 하지만 재야 사학자들의 부풀린 내용은 역사를 바라보는 옳바른 인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계보를 축소하는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여튼 관심 있게일고 저나름 해석해볼랍니다..
첫댓글 술래님,좋은 자료 유심히 보았습니다. 제가 올린 글 중에 잘 못된 것이 있군요. 한국 역사서 20만권을 태웠다는 말은 그 악독함으로 보아 무심히 보아넘겼고, 그랬으려니 생각해 왔습니다. 저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수집벽입니다. 책이나 유물은 수집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가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아마 책도 모두 가져갔을 겁니다. 얼핏 보았지만 중국 삼국 시대의 군사가 그렇게 터무니 없는 사실 기록은 엉터리지요. 환단고기가 진서냐 위서냐 가리기 전에 학자들이 더 진지하게 연구를 해 보아지요. 대부분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을 거울 삼기 위하여 당분간 공지합니다.
에구..반박문은 제가 전체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될까 하여 역사전문가의 분석에 저는 단지 조금 살을 붙였을 뿐입니다. 비아냥거리는 식의 말투에 대한 변명입니다. <동산마술사>님의 역사인식과 해박함에 늘 감탄하며 올리신 자료는 소중하게 읽고있습니다. 퍼가다 제 서고에 넣어두기도 하구요..^^* 어서 통일대국이 되어야 중국 일본에 있는 고서를 찾아 역사를 복원할텐데...건승하십시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글은 가져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을 약갼 가미하기도 하고요. 누가 작성하였든 그게 문제 삼을 수 없는 곳이 인터넷 카페의 글들입니다. 제 대부분의 글이 퍼온 것이지요. 그 출처를 밝히려고 노력합니다. 고맙습니다. 건필!!
저는 이제 읽어보네여.. 우선 앞 10번정도까지 읽었어여.... 상당히 체계있는 답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강단사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부분이 있는듯 합니다. 물론 저는 재야사학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일 재야사학에 근거를 두고 본다면, 인구이 병사 등의 규모 등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단순히 한반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면,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왕건과 신검이 동원한 최대 병력이 각 각 10만 ~ 12만 정도 인 것으로 압니다. 그럼 그 후대는 당연히 더 적을 가능성에서 보아도 위의 글을 당상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야사학자분들은 고대의 강역 개념이 한반도나 만주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심지어는 유럽까지... 아직은 어느 누구의 견해가 맞는지는 불투명하지만 위의 글이 그런 쟁점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어 상당히 좋은 자료가 될 듯 합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잘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배움을 가질듯 합니다.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군사동원은 맞지 않는듯 지금과 옛날은 군사의 동원자체가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은 젊은애들만 군대[현역]으로 가나 옛날에는 15-60세까지의 남자는 전부 군인이었습니다
잘읽어보았습니다.. 저도 항상 궁금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1)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2)대륙백제 근거설 3)한사군에 대한 정확한 4)위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고조선의 정확한 해석 5)일본 왕가의 뿌리 6)칠지도의 실체 등등등 이었는데.. 위글을 읽으면서 더욱 혼란이 오내요 하지만 재야 사학자들의 부풀린 내용은 역사를 바라보는 옳바른 인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계보를 축소하는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여튼 관심 있게일고 저나름 해석해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