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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본인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이 평가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을 넘어 학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틈만 나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책하고 업신여깁니다. 이는 겸손의 덕도 아니고 심각한 병리 증세입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만 열만 자화자찬입니다. 틈만 나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니 주변 사람들이 정말이지 피곤합니다. 더 심각한 증세가 있으니 과대망상 증세입니다. 존재 자체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는 사이비 교주들,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체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 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 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 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마태오 12,1-8
매일 안식을 얻는 법: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광호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광호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깊은 의미를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다. 지금은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해결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 제물은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노인과 젊은이. 이 중에서 어떤 부류가 더 행복을 느낄까요? 심각한 질환, 극심한 통증, 또 가난 속에서 노인의 삶이 버겁고 그래서 불행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노인이 젊은이보다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분명 부족해 보이는 것이 훨씬 많은데 말입니다. 스탠퍼드 장수 연수센터에서는 노인이 삶에 더 크게 만족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노인들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아직 갈 길이 먼 젊은이들은 비록 앞으로 쓸모가 없을지 모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을 쌓기를 선호합니다. 또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중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을까 봐 초조해하는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추려냈다.”
결국 행복한 삶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보이는 모습을 계속 간직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 중에 불행을 느끼는 분은 젊은이의 모습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즐거운 일이 없다면서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을 지향한다면 지금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또 지금 행동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기를 바라며 키스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손녀들에게 키스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사랑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바리사이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어겼다면서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안식일 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으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나 경험하는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조지 맥도널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이사 38,5)
우리의 숨은 기도와
숨은 눈물을 보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비를 눈여겨보시고
기억하신다네.
주님께서는
세상의 굶주린 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진심과
태도를
우리의 어떤 희생제물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신다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 8)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환하게
되살아납니다.
언제나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것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단죄와
통제의 날이 아닌
사람이 자랑스러워지는
사람의 날입니다.
내 앞에 있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목숨을 위해
좋은 일을 올자르게
실천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안식일이
자비의 실천을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는 안식일이
되어야합니다.
안식일은
목마르고
배 고픈 이들이
더 이상 목 마르지 않고
더 이상 배 고프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임을
기억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사랑에
순명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랑의 멋진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금요일>(7.19)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12,7ㄱ)
'예수님의 외침!'
오늘 복음(마태12,1-7)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은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주인'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6장 6절의 말씀인,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안식일의 본질'이 '자비요 사랑'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인 주일(主日)'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는 '창세기 2,1-3'의 말씀에서 유래된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율법 규정과 관례에만 억매여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율법의 본질, 안식일의 본질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당 공동체 안에도 이런 단체들이 있습니다.
법과 규정과 관례와 형식을 엄격하게 따지는 단체, 저는 그 단체가 바로 '꾸리아와 꾸르실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들이 역설적이게도 단체 활성화에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율법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자는 외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외침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을 거부하지 맙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8,1-6.21-22.7-8
1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2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3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4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5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6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21 이사야가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 위에 발라 드리면,
임금님께서 나으실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22 히즈키야가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7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8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그러자 아하즈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해가 열 칸 뒤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