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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1912~1995)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 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좋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1947년 <문장>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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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김자야 (1916~1999)
흰 바람벽에 비취 본 그리움!
한때는 몹시 원망스럽기조차 했던 사무친 모정, 하늘이 내신 지극하던 효심! 도저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조차 할 줄 모르던 순진 효심!
어찌타 우연히 당기어진 정열의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본의 아니게 자기 양심을 속이고 부모님까지 배반하면서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등을 돌리고 마셨던 것일까
급기야 북풍한설 모진 겨울에 북만주 호지로 멀리 떨어져 외롭고 삭막한 도피성 이주를 겁없이 결행하시고 만 당신.
비단 부모님을 원망해서도 아니었으리라. 고루하고 암담한 구태속에 잠들어 있는 봉건사회를 당신은 피끓는 청춘의 벅찬 용맹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개화의 길에서 온몸으로 봉건사회에 맞선 또다른 방식의 저항이요, 온건한 방식의 복수였다. 하지만 당신은 그 황막하고도 외로운 호지에서 생각하신 것이라곤 오직 부모님의 따스한 품속이었을 것이다. 고국의 산천, 서러워하던 사랑의 슬픔에 목메인 외침만 낭자한 선혈처럼 뿌리셨으리라. 나는 이처럼 갖가지 깊은 추억의 정념에 젖어서 애달픈 환상의 필름만 거꾸로 돌려보기 만 한다.
갑자기 모질게도 추운 날에 찬물에 담근 시어머님의 시퍼러둥둥하고도 앙상한 손마디가 비친다. 그 찬물과 굵은 손마디!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꽁꽁 얼어들고 후들후들 뼈마디가 다 져려온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궂은 일, 슬픈 일, 한 세상 겪어오신 어머님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는 순일무잡한 항심(恒心)을 그대로 보여주신다. 그 거칠어진 손길도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시고, 지금쯤은 안방나님으로 고이 따스한 아랫목에 누워 계신다. 어머님께서는 누우신 채로 퇴침 돋우시고 우리 둘을 찾아서 부르신다. 우리는 쥐걸음으로 옴슬옴슬 조용히 가서 뵈오니 어머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다. 기침도 하시고 이마엔 열이 느껴진다. 우리는 공손히 어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서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머님의 팔다리를 가만가만 주물러 드린다.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냉정한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제 와 뉘우치는 불효의 뜨거운 눈물, 다 무슨 소용 있으리.
다시 영상의 화면은 바뀌어진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과 소망하던 어린것을 옆에 끼고 저녁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 집은 먼 앞대의 조용한 개포가에 있는 나지막한 집이다. 아내는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서 대구국을 끓여놓고 나누 먹으며, 하루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한다. 참으로 단란한 풍경이다. 꿈에서도 그리던 단란한 가정을 당신은 작품 속에서나마 하나의 영상으로 비치어 본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애달프고 얼룩진 환상이다. 어느틈에 당신의 눈매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내 눈에도 뜨거운 피눈물이 줄줄이 흘러서 두 볼을 타고 마냥 흘러내린다.
불현듯 나는 당신의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들쳐업는다.그리고는 우르르 당신께로 달려가서 그 쓸쓸하고 허전한 무릎 위에 내려 놓는다. 당신은 흐뭇하면서도 측은한 표정으로 무릎 위의 아기를 본다. 당신의 코끝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아기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나는 기어이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고야 만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이런 애절한 환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진실로 당신이 만주로 가자고 했울 때, 나는 이것저것 헤아리지 않고 내 낭군님을 따라가야 했었으리라. 그것이야말로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신 당신께 대한 진정한 내 보답의 길이 되었으리라.
당신은 부모님께서 지천명이 지나도록 손자를 안겨드리지 못하는 것을 늘 송구스러워하였다. 당신의 부모님께서도 아들이 이런 소망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것을 항상 한탄하신다고 말했다. 이대로 손자를 끝내 못 보게 되면 조상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고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서 둘아 앉았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처지가 몹시도 한스러웠다.
자식이야 당신보다 내가 사실은 더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갈등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셨던 것같다.
그 시절 문외(門外)의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큰 소란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그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잠잠히 기라앉아 있던 슬픔과 아쉬움이 하염없이 솟구쳐오른다.
-- <내 사랑 백석 /김자야 에세이> (문학동네, 1996) 에서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갔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지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와 1996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자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영한이 창작과 비평사에 기증한 2억 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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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
한 편의 잔잔한 영화와도 같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 적막한 방에 홀로 앉은 남자는 남루하고 비참한 현실을, 늙으신 어머니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에 젖는다.
백석(白石·1912∼1995)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는 1939∼1945년 만주를 떠돌던 시인의 절절한 심정이 배어 있다. 식민지 시대에 별처럼 등장한 꽃미남 ‘모던 보이’는 지금 길상사로 변신한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여사(자야)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헤어진 뒤 만주로 떠났다. 이상향과 사랑의 시원을 찾아서 떠난 자발적 유랑의 길이었으나 하루하루 일상은 힘들고 고달팠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아름답고 빼어난 시들이 쓰인 시절이 되었다.
그리고 백석은 어느 날부터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다. 맑은 서정적 시어에 굽이굽이 이야기가 녹아 있어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만 600여 편을 헤아릴 만큼 한국 문학사에서 빼어난 시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의 시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제 통인옥션갤러리에서 개막한 문학그림전이다. 백석 시와 화가 10명의 작품이 대등하게 교감하는 전시에서 화가 최석운 씨는 70년 전 시인의 쓰라린 고독을 오늘의 현실로 무리 없이 불러왔다.
시는 어렵고 지친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바라보는데, 그렇다고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운명의 짐을 하늘이 부여한 몫으로 선선히 받아들이되 꿋꿋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조용히 길어 올린다. 마지막 대목은 이런 구절로 이어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절망의 견고한 벽 앞에서도 삶을 ‘포기’가 아닌 그 반대의 ‘긍정’과도 같은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남루했던 백 년 전에 태어난 한 남자가 지금, 무엇이든 넘쳐나서 큰일인 이 시절의 벽에 대고서 마음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치유를 건네주는 듯하다.
흰 바람벽이 여기에 있다.
_ 고미석
(동아일보 201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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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子夜)와 길상사(吉祥寺)
길상사(吉祥寺)는 서울 성북구 삼각산 남쪽 자락 성북동에 위치한 절이다.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자야子夜,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을 만나 건물을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년 6월 13일 법정 스님에 의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되었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해마다 5월이면 봉축 법회와 함께 장애우, 결식 아동, 해외 아동, 탈북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2010년 3월 11일 법정 스님이 길상사에서 78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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