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버스는 미국차다.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국내에 자리 잡아 쉐보레가 국산 브랜드로 시장에 뿌리내렸지만, 한국 브랜드는 아니다. 스위스인 자동차 경주 선수 루이스 조셉 쉐보레가 1911년 11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창립한 미국의 자동차 회사다. 물론 세계 각지에서 차를 만들고 거의 모든 지역에 차를 파는 소위 ‘글로벌 플레이어’에게 국적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한 브랜드 안에서 비교적 저렴한 국내 생산 모델과 대체로 비싼 수입 판매 모델이 공존하는 건 소비자에게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국산차와 비교해 쉐보레 차 구입 여부를 결정했는데, 똑같은 쉐보레 로고를 단 차를 갑자기 수입 대형 SUV와 비교하라고 하면 소비자는 납득하기 어렵다. 하지만 쉐보레는 이 어려운 설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설득에 가장 중요한 구실은 당연히 좋은 제품이다.
이번에 처음 만난 트래버스는 결론적으로 좋은 제품이다. 일단 크다. 미국산 대형 SUV에 기대할 만한 크기다. 현대 팰리세이드보다 220mm 길고 25mm 넓으며 35mm 높다. 휠베이스도 173mm나 길다. 아울러 앞모습도 세로선 위주의 팰리세이드와 다르게 트래버스는 가로선을 강조한 디자인이다. 안 그래도 큰 덩치인데 더욱 우람해 보인다. 이러한 방향은 뒷모습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때문에 세로선이 눈에 띄는 팰리세이드보다 가로선을 내세운 트래버스가 더 커 보인다. 더불어 무난한 트래버스의 인상은 대형 SUV를 고려하는 이들의 마음을 유혹하기에 더 유리하다. 이 정도 크기의 SUV를 원하는 사람은 40~50대가 더 많은데, 해당 연령대의 소비자들은 값비싼 제품을 선택할 때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때문에 파격적인 디자인보다 무난한 인상에 더 끌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젊은 취향의 소비자를 위한 트래버스도 있다. 바로 레드라인이다. 블랙 보타이 엠블럼에 블랙 아이스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 레드라인 시그니처 블랙 알로이 휠 등 외관 일부를 변경해 젊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최고급 모델인 프리미어보다 200만원 정도 더 비싸 부담스럽긴 하지만 트래버스가 탐나는 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욕심냄 직하다.
실내는 익숙하다. 센터페시아는 말리부와 이쿼녹스에서 봤던 그 구성이다. 계기반도 말리부와 이쿼녹스에서 보던 것이다. 다만 말리부는 부분 변경하며 디지털 계기반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전반적으로 구성은 투박하고 소재감은 떨어진다. 경쟁모델인 현대 팰리세이드와 포드 익스플로러, 기아 모하비와 비교하면 꽤나 아쉬운 부분이다. 선루프에 들어간 차양막도 전동식이 아니라 수동식이다. 열고 닫는 게 그리 불편하진 않지만 공교롭게도 경쟁모델은 모두 전동식으로 열고 닫는다. 더불어 차양막이 닫힌 상태에서 선루프가 열렸을 경우 바람 소리 등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모른다.
또한 3열 탑승을 위해 2열 시트를 앞으로 밀 때도 불편하다. 시트 옆쪽에 있는 레버를 당기며 자연스레 시트를 앞쪽으로 당기면 되는데 꽤 힘들다. 여성 운전자라면 간단치 않을 것 같다. 경쟁모델은 대개 원터치식으로 시트가 스스륵 밀린다.
실내 공간은 길이와 휠베이스가 모두 가장 긴 트래버스가 제일 넉넉하다. 3열도 꽤 앉을 만하다. 무릎공간은 동급에서 가장 넓은 850mm다. 그래서 이 정도급 SUV는 미니밴과도 직접 경쟁한다. 트래버스는 경쟁할 역량이 충분하다. 국내 도입된 모델은 2열에 독립식 캡틴 시트가 들어간 7인승 모델이다. 양쪽 시트 사이 빠끔한 공간으로 2열과 3열을 오갈 수 있다.
트렁크도 기본 651ℓ에 3열석을 접으면 1636ℓ까지 늘어난다. 2열까지 접으면 최대 2780ℓ까지 확장된다. 냉장고도 싣는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돼버렸다.
엔진은 V6 3.6ℓ 직분사 가솔린 엔진이다. 최고출력 314마력, 최대토크 36.8kg·m를 발휘한다. 토크컨버터 방식의 9단 자동변속기가 네 바퀴를 굴린다. 그런데 여기에 스위처블이란 단어가 붙었다. 전환 가능하다는 의미인데 핵심은 완전한 앞바퀴굴림과 온전한 네바퀴굴림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앞바퀴굴림 모드에서는 단순히 동력만 앞바퀴로 모두 보내는 게 아니다. 앞뒤축 사이를 연결해 동력을 전달하는 프로펠러 샤프트의 회전을 차단한다. 덕분에 완전한 앞바퀴굴림 모드로 운행 가능해 연료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미국산 SUV답게 직진 안정성은 무척 뛰어나다. 최고속에서도 불안한 기색 없이 묵직하게 노면을 누르며 달린다. 또한 대표적인 미국산 SUV답게 서스펜션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세팅됐다. 코너에서는 속도를 충분히 줄이는 게 좋다. 물론 이런 대형 SUV로 코너를 질주할 일은 없긴 하겠다. 승차감은 서스펜션 덕을 확실히 본다. 특히 1열 승차감이 좋다.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2열 승차감은 1열만 못하다. 서로 멀리 떨어진 앞뒤 서스펜션 사이에 놓여 사소한 움직임이 많다. 아울러 2열 시트 자체도 등받이와 방석이 모두 평평한 편이다. 기댈 곳 없는 몸은 더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속감은 무난하다. 넘치는 힘은 아니지만 부족한 느낌도 전혀 없다. 어느 영역에서든 답답하지 않은 가속을 채근할 수 있다. 발군은 엔진보다는 변속기다. 이 9단짜리 변속기는 단언컨대 그동안 쉐보레에서 만났던 모든 변속기 중에 가장 똑똑하다. 모델명 9T65인 변속기로 미국형 말리부에 들어가는 9T50 9단 자동변속기보다도 진화한 변속기다. 쉐보레에서는 2018년형 트래버스에 처음 들어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9단 변속기는 일단 눈치가 빠르다. 운전자의 의도를 재빠르게 파악해 단수를 적절하게 조정한다. 가속하면 단수를 내려 빠르게 엔진회전수를 높이고, 항속하면 단수를 올려 엔진회전수를 낮추고 안정화한다. 더불어 변속이 빠르게 이뤄지며 충격도 미미하다. 여러모로 흠잡을 데가 없다.
쉐보레는 트래버스가 험로 주파와 트레일러 견인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시승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비 오는 날 임도를 달리며 오프로드를 체험했지만, 코스 자체가 무난해 평가하기 어려웠다. 쉐보레에서 마련한 코스였는데 앞바퀴굴림만으로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트레일러 견인은 아예 경험할 수 없었다. 다만, 레저 활동이 증가하는 요즘이라 트레일러 관련 기능은 구매를 자극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쉐보레가 트래버스를 수입한다고 처음 공언했을 때 가장 우려했던 건 가격이었다. 수입한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비싸게 출시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낮았다. 기본가격 기준으로 4520만~5522만원이다. 국산인 현대 팰리세이드와 수입인 포드 익스플로러 사이를 절묘하게 공략했다. 심지어 이번에 새로 선보인 모하비 더 마스터와는 가격대가 거의 겹친다. 이제 남은 건 결과뿐이다. 트래버스의 성적표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쉐보레 트래버스
기본 가격 4520만원 레이아웃 앞 엔진, AWD, 7인승, 5도어 SUV 엔진 V6 3.6ℓ, 314마력, 36.8kg·m 변속기 9단 자동 공차중량 2090kg 휠베이스 3073mm 길이×너비×높이 5200×2000×1785mm 연비(시내, 고속도로, 복합) 7.1, 10.3, 8.3km/ℓ CO₂ 배출량 211g/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