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책 저자 김영민 선생은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로 지냈으며 현재는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은 그가 지난 10년간 일상과 사회, 학교와 학생, 영화와 책 사이에서 근심하고 애정 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동아시아 정치사상사·비교정치사상사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학자로 이 책이 첫 번째 칼럼집이라고 한다.
“삶은 전쟁이고 나그네가 잠시 머무는 곳이며 죽고 나면 모든 명성을 잊는다. 당장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토록 용맹을 떨쳤던 일세의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 소동파(蘇東坡)가 적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을 무시한다.” - 루크레티우스(로마 시인, 철학자)
“바위 위에 누군가 죽어 있다면 그 죽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바위가 더 고통 받을 것이다.” - 키케로(그리스 철학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 현재의 삶이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이에게, 삶이 고해(苦海)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죽음이야말로 차라리 해방일지 모른다. (김영민)
“아침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야 무사로서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다.” - 야마모토 쓰네토모(山本常朝) 에도시대 무사
어쩌면 우리는 죽을 수조차 없다. 이미 죽어 있으므로, 살아가는 일은 죽어가는 일이므로, 그리하여 에픽테토스(로마시대 철학자)는 말했다. “우리는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불쌍한 영혼들에 불과하다.”
또 로마 장군 카이사르는 말했다.
“스스로 아직 살아 있다고 여기는구나.”
“삶이 곧 죽음이라면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저자는 꿈보다 현실에, 내일보다 오늘에, 무게 중심을 더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책에서 느껴지는 느낌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거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느껴지거나 지금 내가 사는 현실과 들어맞는다고 생각된 부분들을 옮겨보면서 독후감에 대신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낙태가 금지된 상태에서도 한국의 낙태율은 OECD 최상위권이고, 출생률은 전 세계에서 최하위권이다. 인구 감소로 인해 2750년 즈음에는 한국은 왜소한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도 애써 이 공동체의 소멸에 공헌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정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들 가운데서 해외이민을 떠난 뒤, 모국 국적을 포기하는 비율이 2014년 이래로 한국인이 가장 높다.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煉獄-천당과 지옥사이, 영혼들이 머무는 곳)상태다. 이것은 어쩌면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지 모른다. ‘한국으로 여행오시면 멸종위기의 공동체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사라지는 중이예요. 상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이런 광고로 말이다.
그런 시절이 오기 전에 공동체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할 수 있고,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고,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으며,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고,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도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열정을 가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그 자체가 지나치게 큰 야망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하는 과정에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과정에서 상처는 불기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인간의 육체는 땀과 침과 피지를 분비하고 각질과 군살을 만들어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타성, 나쁜 습관, 부질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면에서 성장과 노화는 곧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거지 없이 깔끔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에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중국 탕(湯)임금의 목욕통에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본뜻은 일단 잘 씻으라는 것으로 스스로 설거지를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잘 씻고 살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의 설거지꺼리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요.” (설거지 이론과 실천 중에서)
누가 그랬던가. 휴식의 궁극은 죽음이라고. 쉬고자 하는 욕망의 끝에는 죽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만화책으로부터도 우리가 휴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칫 죽음을 통해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들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중에서)
30년 전 6월, 이 땅에는 보리수 꽃향기 대신 최루탄 냄새가 창궐했다. 시민들이 군사정권의 타도를 외친 끝에 6월 29일 마침내 직선제 수용을 선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은 실로 비가 뜨거운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피어오른 여름 냄새와 같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여전히 구태를 답습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30년 전의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향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마법을 써서 돌아간다 해도 향기를 반복해서 음미할 수는 없다. 이제 공동체는 개인의 고독을 인정한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더러움을 찾아서 떠나는 로봇청소기처럼 앞으로 나아갈 때다. (6월의 냄새 중에서)
세밀화를 배우고, 석판화를 수집하고, 시집을 천천히 고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모욕을 피해 달리기 시작한 그들은 정부수립을 거쳐, 동존상잔의 전쟁을 넘어, 현대 국가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것이 결국 무엇을 위한 질주이든지 그들은 일단 세계자본주의 주변부에서 질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잘 조립된 자동차 한 대를 들고 제국주의자들의 면전에 나설 수 있게 되었을 무렵,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신군부에 의해 짓밟힌다. 그리고 그해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 한국인은 다시 질주한다. 마침내 우리도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들은 시청광장을 지나고 광화문 네거리를 관통하여 질주한다. 우리가 쥐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줄 때까지. 그 질주 끝에 도달한 21세기 폐허, 한 세기에 걸친 숨 가쁜 질주가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현대적 공적질서의 오롯한 붕괴, 엘리트 카르텔의 빨대가 꽂힌 공동의 희생양으로서의 정체(政體), 그 위에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서 굿을 한 적이 없으니 믿어 달라며 울먹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스스로를 갱신하여 현대적 공공의 삶을 구현할 수 없는 쥐떼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과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희망을 가진다. (2016.11. 희망을 묻다 중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인생의 의미는 죽음의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 산다.’고 한 말의 의미다.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자유와 존엄이 박탈당한 상태에서 시작되지만, 개개인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조율하여 존엄어린 하나의 사태로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비록 탄생은 우연에 의해 씨 뿌려져 태어난 존재일망정 죽음은 그 존재를 돌보고자한 일생동안의 지난한 노력이 만들어온 이야기의 결말이다. 스스로도 어찌할 도리 없는, 그저 처박아버리기 위해 일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다.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 중에서)
이제 책을 마무리할 시점이다. 책의 마지막 대담에서 저자는 “책은 왜 읽어야 할까요?”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노려볼 만한 어떤 고양된, 성스러운, 초월적인 계기가 세 가지 정도 있다고 보는데 그 중 하나가 책이 아닌가 합니다. 책이란 걸 읽는 행위 자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잖아요. 특히 책을 통할 때는 죽은 저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살아있는 저자는 시샘을 할 수 있잖아요.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물으면 사실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