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7]어느 ‘중전마마’의 북어해장국
귀향 5년만에 인근 면에 사는 형님을 사귀었다. 알고 보니, 이 양반은 대단한 호주가好酒家이자 입담이 보통을 넘어 ‘프로 구라’수준이었다. ‘구라’라고 하니 ‘말 부풀리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전혀 아니다. 어디까지나 팩트를 바탕으로 아주 재밌는 이야기들을 주야장천晝夜長川 전개해 가니, 어찌 재미가 없겠는가? 보통 재주가 아닌 '큰 재주'이다. 어느 정도 호주가인가 하면 호주豪酒 또는 대주大酒로 소문났는데, 앉은 자리에서 보통 2홉들이 소주 5병이 가볍게 사라진다.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어 72세인데도, 하루도 멀다하고 마시는 술을 도대체 어떻게 해독解毒을 시키는지 어울리는 이들이 모두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스마트팜 농법으로 짓는 딸기농사가 3천평도 넘으니 장난이 아니다. 전속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해도 농장주인(00농원)으로서 언제 일을 하는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천하태평 일등 농사꾼’이다.
오늘 오후 생각지 않게 면소재지 농협 앞에서 맞닥뜨렸다. 나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대뜸 “동생, 이 앞에 생맥주집으로 오라”며 가버린다. 난감할 것은 없다. 나로서도 형님과 단 둘이 한가한 오후에 한 잔 하며 그동안 궁금했던 개인 히스토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형님. 형수님은 뭐라고 하세요? 그리고 날마다 속은 괜찮아요?” 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은 제수씨 이름을 핸드폰에 어떻게 저장했는가?” “저야 연애할 때 부르던 애칭으로 저장했지요” “보통은그러겠지만, 나는 마누라 이름을 업그레이트해 ‘중전마마’로 저장했네. 그것을 우연케 본 마누라가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돈도 안들이고 점수를 따는 방법” 이라며 헤헤 웃으신다. 그리고 펼치는 얘기는 점입가경을 넘어, 나의 생활글 글감으로 "딱"이었다. 얘기를 들으며 글제목을 정한 것은 이제껏 처음이었다. <어느 ‘중전마마’의 북어해장국>이 그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이날 이때껏 수많은 주림酒林(주지육림酒池肉林이 아니다, 아니 그것도 모를 일이다)에서 살아나오고, 시방도 술을 마시며 거뜬한 것의 공로는 90%가 마누라 덕분이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술 해독DNA가 좋은 것도 일정부분 있겠지만” “형수님 덕분이라고요? 바가지 긁혀 쫓겨나지 않은 것 말이요?” “그게 아니네. 이 사람아. 나는 한번도 바가지를 긁혀본 적이 없네. 되레 며칠 술을 안먹으면 왜 그러냐며 술 마시고 오라는 헌다네” “진짜요? 해피허네요. 우리 마누라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흑흑” “한학漢學을 한 선친도 술을 좋아했네. 어머니가 끓여주던 북어해장국(황태해장국이 결코 아니네)으로 속을 풀고 사셨는데, 마누라한테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시어머니한테 북어국 끓이는 노하우를 배운 것같어. 해마다 연말이면 망년회네 뭐네 오죽이나 술자리가 많지 않은가. 나라고 왜 새벽에 창시(창자)가 꼬이고 쓰리는 등 속이 두엄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말이여. 새벽녘 창시가 끊어질 듯 비몽사몽 힘든 상황에, 아내가 대문 밖의 계단에 마른 북어 몇 마리를 놓고 방망이로 두들겨대는 소리를 들작시면, 그 소리에 해장(장을 푼다는 해장解腸은 해정解酲이 옳다)이 이미 60%가 된다네. 그것도 왜 밖에서 두들리것는가? 하늘같은 서방님의 새벽잠을 방해할 것을 걱정한 탓이라네. 그 정황이 이해 가는가? 그런 다음 두들긴 북어를 껍질도 안벗기고 통째로 냄비에 넣네. 절대로 북어껍질을 벗기면 안되네. 껍질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보통이 아니거든. 그리고 두들겨 짓이겨진 북어의 살을 고대로 넣는다네. 마지막은 끓인 국을 국그릇에 담을 때, 고춧가루와 통깨를 손바닥으로 와지근 비비고 뭉개 가루를 만들어 뿌리는 것이네(아, 그 흉내를 내는데, 나는 그만 뒤집어졌다). 끓인 국물에 고춧가루나 통깨를 먼저 넣으면 완전 파이고, 숟가락으로 처음 맛을 볼 때 넣어야 제맛이네. 통깨가 아-그-작 부서질 때의 그 소리에 나의 ‘해정’은 80%쯤 풀리고, 국물을 딱 한 숟가락 떠 입으로 가져가 맛보는 순간, 해정이 120% 돼버린당개로. 그때 드는 생각이 무언지 아는가? 아내가 고맙다는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고, 오늘 저녁에 나하고 어울릴 친구들의 얼굴들이 떠오른다네. '너그는 인자 죽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시. 알것는가?”
와하-, 이건 굉장맹장한 자기고백이자 팔불출 아내 자랑이다. 세상에 아무리 양처良妻라지만, 허구헌 날 술만 퍼마시고 밤늦게 들어서는 남정네를 위하여 무엇이 이쁘다고 그 새벽, 지극정성으로 북어를 두들겨패 그렇게 기가 막힌 북어해장국을 끓여댄다는 말인가? 얼마나 술 마시는 횟수가 많았으면, 결국 다듬이 방망이가 부러지기까지 했을까. 아아, 그 형님은 무슨 복이 넘쳐 그런 홍복洪福을 누릴까? 연산군이 그랬을까? 아아-, 조선의 여인이여! 그대 이름이 '중전마마'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혹시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처럼 북어를 미운 남편으로 생각하며 두들겨대는 것일까? 믿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많이 지나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 끓이는 과정을 얘기하는데, 그 단계 하나하나가, 그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같다. 그게 팩트라 해도 저 입담이 너무 대단해,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아이고, 형님, 고것이 비결이구만요" 깨갱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중전마마 형수님으로부터 그 북어국 한그릇 얻어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고춧가루와 손바닥으로 짓이긴 통깨가루 고명, 두들겨 뭉개진 북어살이 해정의 핵심인 것을. 우리의 중전마마 만세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