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4
9월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일/연중 제2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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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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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kS68N1SSkE?si=UhoqKXab4-bB1h_k
(수원교구 이규성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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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만 기억하지 말고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겪는 고통으로 인해 똑같은, 아니 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조금 지나친 말인가요? 농담 말고 진짜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프면 엄마도 따라 아프다.”
자녀들을 양육하신 부모님들 많이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자녀가 아프면 반드시 엄마도 따라 아픕니다. 자녀가 시들시들 죽어 가면 엄마도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곧 성모님의 고통이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의 고통 역시 아들 예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두 분은 일심동체요 한 마음 한 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인류구원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큰 기쁨과 보람도 느끼셨지만, 다양한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과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제자들을 양성시켰지만, 그들은 미성숙했고,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틈만 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기를 썼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건네신 운명적 고난의 잔을 마셔야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골고타 언덕 위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모든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고스란히 성모님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교회 전례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기념일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9월 15일 입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어제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 전례력은 예수님의 고통과 성모님의 고통을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
고통 받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중세 신심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곁에서 성모님도 함께 수난당하셨다는 사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성모님께서도 영신적 죽음으로 동참하였다는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교회는 좋은 것도 아닌데,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억하는 기념일까지 제정했을까요? 아마도 그 고통은 평범한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이어서 기념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의미에서, 고통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닐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은 마치 산고와도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출산을 준비 중인 산모는 분만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지만, 그 고통은 다른 고통과 차원이 다릅니다.
잠시 후 나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희망과 설렘과 기쁨을 간직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할 때 마다 마냥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 영원한 생명을 늘 함께 희망하며 두분의 고통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분의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의 삶에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 곳곳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홀로 감내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한 평생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바로 이런 분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실 것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모님께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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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ah4336ip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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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
오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님의 아픔과 그 결을 같이 합니다. 오늘은 두 복음이 나오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통 때문에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한 시메온의 예언이고 그다음은 골고타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드님을 보아야 하는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마치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는 있어도 교회는 예수님을 새 아담,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부르는 교부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골고타에서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맡기시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맡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는 남편의 힘듦을 얼마나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만큼 구원자로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분은 없으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누가 느껴보았을까요? 그만큼 성모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나에게 해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안다면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까요? 남편은 분명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내어놓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믿으면 아내도 그 돈을 피같이 아껴 쓸 것입니다.
TV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보면 아내의 과소비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이 나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 지옥 ‘금전적 신뢰 깨진 폭탄 부부’를 보니 남편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도 귀걸이 사는데 300만 원 쓰고 피부 관리받는 데 900만 원을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남편은 월 400씩 꼬박꼬박 가져다주며 자신은 한 달에 10만원 이상 써 본 적이 없다는데 아내가 그렇게 과소비하고 빚만 늘어나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도 비싸게 술을 마시고 다니고 한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은 남편이 아는 것들이었지만, 카드 지출 내역과 통장 지출 내역은 남편에게 보여주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치미에서 배우 주우와 김선희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출연하였습니다. 김선희 씨가 지나치게 과소비한다고 남편이 고발하듯이 아내를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자신이 매달 500씩 주는데 생활비는 700씩 들어가는 것에 신뢰를 잃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모든 돈을 다 주는데 아내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혹은 아내가 돈을 얼마나 저축해 놓았는지의 재정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남편이 돈 벌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돈 쓰는 것을 일일이 남편이 안다면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둘은 서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그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해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면 자녀는 생존 욕구가 강해지고 그러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내는 돈에 대해 불투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신자들은 본당 사제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자녀들이 탄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공개하고 혼날 게 있으면 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본당에 내는 돈이 그들의 살과 피와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레위기에도 신자들이 낸 봉헌은 거룩한 것이니 사제들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 잘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의 아픔보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더 중요하게 여겨 두렁이로 몸을 가린 것을 보면 연결이 쉬워집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관계에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었다면 아내도 모든 지출 내역과 통장 잔고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영화 ‘허삼관’에서 하정우는 아내가 이전 애인의 아이를 배어 자신에게 시집왔었다는 것을 10년 뒤에나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의 아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분노하였지만, 키운 정이 작지 않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팔며 자신은 죽어가다시피 합니다. 하지원은 남편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피를 판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신장을 아들에게 줍니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나도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으면 내어줄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나와 가정을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알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가 나를 위해 흘리는 피의 고통을 함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요한으로 상징되는 교회를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피를 결코 헛되이 쓰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배우자의 아픔을 공감할 때 나타나는 표징은 아마도 먼저 재정의 투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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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9,25-27: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 예언의 예리한 칼의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리므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십자가 앞에 계시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으신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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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시나 휴양지는 그곳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성가정 성당’이 있습니다.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북경에는 ‘자금성’이 있습니다. 서울에는 ‘경복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로마에는 ‘바티칸’이 있습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물론 랜드마크 이외에도 볼 곳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랜드마크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먼저 찾게 됩니다. 신문 홍보를 하려고 LA에 갔다가 ‘맘모스 산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맘모스 산에도 랜드마크가 있었습니다. ‘데블스 포인트파일(Devils Postpile)과 레인보우 폴(Rainbow Falls)’입니다. 시간이 부족한 저는 레인보우 폴은 다음을 기약하고 데블스 포인트파일을 다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았을 것 같은 높은 절벽에 기암괴석이 있었습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브라이덜 폭포(Bridalveil Falls)와 글래셔 포인트(Glacier Point)’가 있습니다. 폭포도 좋았지만 빙하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프 돔(Half Dome)은 아름다웠습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자비와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고통’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는 4가지 고통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매일 보는 것은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아픔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좌절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빠져드는 고통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착을 버리면 고요함이 오고,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나의 세계에서 찾기도 하고, 깨달음을 삼라만상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바른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있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라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불교의 고통은 인간의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면 교회의 고통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우리의 노력으로 버려야할 대상이지만 교회에서 고통은 나의 구원과 타인의 구원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교회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현상은 비슷하지만 불교와 교회에서 바라보는 고통의 본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처님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부처님 상은 자비롭고, 너그럽고, 풍채가 좋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예수님 상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처절한 모습입니다. 불교의 고통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교회의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지고가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고통은 아드님,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을 받으셨지만, 좌절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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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의 어머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과 사도단을 완전히 떠난 것은, 예수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마르 14,50),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믿음도 부족하고 용기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성모님과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떤 제자 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까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어 있는 그 제자를 우리 교회는 ‘요한 사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달아나지 않고 예수님 곁에 있었을까? 아니면 달아났다가 되돌아왔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성모님의 사랑은 다른 네 명의 사랑과는 성격도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운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네 명의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입니다. 옆에 함께 있는 것도 분명히 사랑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정도를 넘어서 모든 것을 함께 겪는 것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 것입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성모님의 온 생애는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겪은 생애입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픈 일도, 영광스러운 일도......
3)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맹세했습니다.(요한 13,37) 물론 나중에 순교함으로써 그 맹세를 지켰지만,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말로만’ 사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이나 대답했습니다.(요한 21,15-18)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내 양들을 사랑하여라.”라는 당부로 해석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으로(온 삶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생애 전체가 그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즉 교회와 함께 계셔 달라고 어머니께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있어 주기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8-19) 믿음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또 승천하신 뒤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아처럼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맺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예수님께서 지키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표현만 보면 어머니를 모셔 달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어머니와 함께 있어라.”, 즉 “어머니를 본받아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신 분이고, 중심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어머니 옆에 함께 있으라고 당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 말고 누구를 본받을 수 있을까? 물론 훌륭하고 거룩하고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 많긴 하지만, 성모님은 ‘첫 자리’에 계신 분이고, 그 모든 성인 성녀들도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서, 성모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축일 이름이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되어 있어서 성모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고통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생애 전체를 묵상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습니다. ‘생애 전체’라는 말은, 성모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춰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기쁨의 어머니’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 그 기쁨은 슬픔을 초월한, 또는 슬픔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슬픔이 아니라 바로 그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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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그 누구보다 깊이 동참하셨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러 성전에 오신 성모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예언에 성모님께서는 어리둥절하셨을 것입니다. ‘분명 가브리엘 천사는 이 아기가 큰 인물이 되고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릴 분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리리라 말하였는데(1,31-35 참조), 이 사람은 어째서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시메온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셨고, 그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셔야 하였던 성모님께서는 마치 ‘칼에 꿰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으셔야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시며 그 고통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길에서 넘어지실 때마다 비통하게 우셨고,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는 마치 자신의 몸에 못이 박히듯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성모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 그 어머니에게 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곁에 있던 제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 제자들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아드님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신 성모님께서 이제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여정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는 여정입니다(9,23 참조).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그 여정에 늘 함께하십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께서 직접 보고 느끼신 아드님의 상처를 우리 제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 주십사 성모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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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 잉태 순간부터 일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셨습니다.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가셔야 했으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시는 기쁨의 자리에서도 가슴을 찌르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그분께서 그곳에 남으신 것을 모르고 돌아오시다가, 예수님을 찾아 헤매신 적도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처절한 장면마저도 말없이 바라보셔야만 했지요. 끝내 돌아가신 아드님을 품에 안으신 아픔과 어머니로서 아들의 장례를 치르시는 비통함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이렇게 성모님께서 크게 일곱 가지의 고통을 겪으셨기에,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과거에는 성모 칠고 축일(聖母七苦祝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 뜻으로 파악하고 말없이 받아들이셨지요. 당신께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 내셨기에 끝내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시며 당부하셨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로써 우리에게도 어머니가 되신 것이지요. 온갖 고통을 극복하신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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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성전에 들어섰을 때,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은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이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 예언하였습니다.(루카 2,34-35 참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시간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십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구세주의 수난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고, 인간은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모두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없이 파스카의 부활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의 수난을 두 눈으로 목격하신 성모님의 고통은, 이집트에서 피난살이하며 겪은 고통(마태 2,13-15 참조)이나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고통(루카 2,41-51 참조)보다 더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도 우리의 삶의 고통과 마주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계획 안에 함께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셨다. 거기에 하느님의 계획대로 서 계시어(요한 19,25 참조), 성모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모님을 제자에게 어머니로 주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27 참조)”(교회 헌장 5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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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곁에서 지킨 유일한 제자입니다. 십자가 아래 성모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증언하는 유일한 이 또한 요한 복음사가입니다. 군사들이 당신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계셨고, 그 절박한 순간 그분의 마음은 어머니에게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카나에서처럼 어머니에게 한 번 더 “여인이시여”(요한 2,4)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렇듯 카나의 그날과 예수님의 마지막 날은 맞닿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셨던 당신의 ‘때’가 충만하게 된 이때,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리고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께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요한 2,4)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하고 어머니께 하신 말씀이 냉정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십자가 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온전히 드러내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언자 시메온이 말한 대로, ‘영혼이 칼에 꿰찔리신’(루카 2,35 참조)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성부께 부르짖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셨고, 숱한 고난을 겪으시면서 성부에 대한 순종을 배우셨던 예수님을(제1독서 참조) 닮으시어, 성모님께서는 고난으로 가득하였던 삶 가운데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도 아드님과 함께 성부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세워 주신 성모님을 모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삶에 우리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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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카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고(마태 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 구유에서 해산해야 했고(루카 2,7), 또한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카 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 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쳤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옆에 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우리 곁에 늘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와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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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했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카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카 2,41-50)
4.해골 터로 오르심 (요한 19,17)
5.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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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휴가 때, 경상도의 군위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여기가 너무 멋있다는 평을 인터넷에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위 지역 여행의 첫 번째 장소가 영화 촬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주변 경관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고, 촬영했던 집 역시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른 관광객들은 “너무 좋다”를 외쳤습니다. 여기가 주인공이 앉아 있던 곳이라면서 마루에 앉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면서 주인공이 타던 자전거라면서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찍부터(83년) 컴퓨터 모니터를 봐서 시력이 안 좋아진 후로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극장에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영화 촬영지라고 해서 기억나는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자기가 너무 종교에만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를 가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셨던 분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셨던 분은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당만 가는 것입니까?”라는 불평만 하십니다.
주님을 알아야 미사나 기도를 통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맞게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남기신 유언을 들려줍니다. 그 자리에서 이 유언을 들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성모님과 몇 명의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히 성모님께서 아들과 함께하면서 더욱 하느님의 뜻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 예언자에게 들었던 “이 아기는 이스라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의 말이 다시금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할 것을 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큰 희망을 발견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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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고통도 구원도 함께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나눔을 했습니다만 오늘 주님의 어머니 통고 축일에는 긴 병에 성인 난다는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성인이라면 긴 병에도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들은 어머니가 오래 앓게 되면 엄마를 버려 불효자가 되지만 엄마는 아들이 아무리 오래 앓아도 그 아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 면에서 성인과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과 어머니의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나 성인 모두 내리사랑을 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적인 내리사랑이라면 성인의 사랑은 성스러운 내리사랑이겠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내리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충만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성모님 사랑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에 버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인류 구원과 사랑에 함께한다는 면에서 성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하지만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신부 되는 것을 처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셨지만 그런 다음에도 북한 일과 같이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이 자신을 바치실 때 그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밑에서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가슴이 꿰 찔리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시므온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냐는 매정한 핀잔을 아들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각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이어졌을 겁니다. 얼마 전 읽은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은 생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자란 부분이 혹 있다면 당신이 채우시겠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사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신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도 함께하신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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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 성모님과 함께 -
어제 모처럼 따뜻하고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책입니다. 책표지도 따뜻했고 편안했습니다. 힘들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참으로 성실히, 따뜻하게 소박한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우리 한 수도형제도 참여한 여덟분의 젊은이들의 글모음집, “요즘 잘 지내나요?”라는 책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런 글을 쓰는 영혼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영원한 청춘입니다. 서서히 음미하며 읽을 계획입니다. 책 서두에 “들어가며”중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편하게 안부조차 묻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8명의 작가가 모여 <요즘 잘 지내나요?>를 출간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 삶, 경험이지만 글을 쓰며 좀 더 가까워지고, 깊어졌습니다. 이 깊이는 바다처럼 서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돌아올리 없는, 바쁘게 흘러간 당시의 나는 잘 지냈는지 묻고 싶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도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윗 여덟분의 젊은이들 참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잘 지내십니까? 잘 들여다 보면 바다처럼 깊이 하나로 연결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로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바다같은 깊이의 삶입니다.
오늘은 9월15일,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9월14일 아드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은 어머님의 축일입니다. 이왕이면 기념일이 아니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모자분의 축일이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바로 우리의 순교적 삶 중심에 언제나 살아 계신 모자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어도 성모 마리아 어머님은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산책시 어머님 대신 성모님을 넣어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 전에는 피정온 자매님들과도 함께 불렀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언제나 여전히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새로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부르면 마음은 동심이 되고 참 편안해집니다. 세상의 무수한 고통중의 어머니들 역시 고통의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힘을 받으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모 마리아가 생애 동안 겪었던 일곱가지 슬프고 아픈 사건을 가리키는 성모칠고가 생각납니다. 성모칠고는 가톨릭 교회의 대중적 신심입니다. 이 중 미칼렌젤로의 “피에타의 성모님” 조각은 영원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모칠고를 열거해 봅니다.
1.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고통.
5.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본 고통.
6.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은 고통.
참으로 고난과 시련의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성모님의 삶이었지만 믿음으로 이 모두를 이겨낸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전 20절까지 계속되는 부속가는 얼마나 애절하고 깊은지 성모신심의 절정을 대하는듯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강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도 바로 성모님의 고통스런 모습의 절정이자 철저한 케노시스 자기비움의 극치입니다. 흡사 예수님 중심으로한 이등변 삼각형의 모습같습니다.
저절로 우리 삶의 자리도 계시됩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대변하는 어머니 곁에 선 애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의 자녀가 되어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중심에 모신 예수님의 모습이 히브리서에 은혜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마도 성모님 역시 아드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도 한없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 순종의 여정”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마지막 순종은 죽음입니다.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희망이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삶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인 우리를 보며 어머님께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애제자, 이 사람이 가리키는 바, 바로 우리 믿는 모두입니다. 성모님의 자녀인 우리들,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과연 마리아 성모님의 자녀다운 삶인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이어 애제자에게 하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생 언제나 모시고 살아야 할 성모님, 얼마나 행복한 우리들인지요!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마리아 성모님께서 늘 우리를 사랑으로 기르시고 타이르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니 말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 장면이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모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묵주기도 잘 바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효성깊은 성모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어머님 은혜 2절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머님은 성모님으로 바꿉니다. 오늘 시간되면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불러보시기기 바랍니다.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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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요한19,25)
<엄마의 고통!>
오늘 복음(요한19,25-27)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오늘은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종이후, 한생을 당신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끝까지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에 엄마 성모님의 길 또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더 성모 칠고, 곧 성모님의 일곱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칠고(七苦)'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 고통은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의 고통'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가신 고통'입니다.
세 번째 고통은 '소년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입니다.
네 번째 고통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만나신 고통'입니다.
다섯 번째 고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의 고통'입니다.
여섯 번째 고통은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입니다.
일곱 번째 고통은 '예수님을 돌무덤에 묻으신 고통'입니다.
성모신심이 큰 분들, 특히 레지오 단원들은 고통의 어머니처럼 고통을 잘 참아내고 이겨냅니다. 한생을 아들 예수와 함께하면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제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잘 순종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성모님을 잘 공경하는 이들은 잘 참아냅니다. 그리고 말없이 겸손하게 묵묵하게 행동하면서 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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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K1zd_Qta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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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 26)
사랑을
지켜내시는
어머니십니다.
고통의 중심에
계시는 우리의
예수님과
우리의
어머니십니다.
십자가가
만들어가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세월이
십자가에서
다시 아들을
만납니다.
간절한 기도
간절한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지켜온 세월이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사랑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안쪽과
바깥에도
어머니가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새로운 시작을
불어넣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을 위한
고통은 분명
선물입니다.
고통을
푸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만남과 헤어짐도
십자가이며
사랑도 구원도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로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을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고통으로
단단해지는
구원입니다.
고통을 거치며
우리의 삶은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첫시작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모두의
어머니가
되게하시는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고통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결합되면
하늘의 열매가
됩니다.
어머니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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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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