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심판에는 대개 회복의 약속이 따른다. 심판은 마땅한 정의의 집행이자 인과에 대한 보응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회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형기를 다 마친 죄인이라 할지라도, 마치 죄 짓지 않았던 사람처럼 다시 환대하고 맞이하기란 쉽지도 않거니와, 심판자가 그의 명예나 환경을 다시 회복시켜줄 의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분의 땅에 열정을 가지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한다(욜2:18).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관심이, 징계를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회복을 마련해 두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요엘서 2장의 18~27절까지는 심판받아 핍절해진 땅의 터전에 대한 회복이 적혀있고, 28~32절은 영적인 회복과 구원의 은혜가 적혀있다. 특히, 성령집회나 은사집회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던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의 28~32절이다.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에 너희 하인들과 하녀들에게도 내가 내 영을 부어 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혹독한 심판이 주어진 이후에 일어날 회복의 일이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한번 새롭게 이 구절을 붙들고 성령체험을 원할 것 같으면, 그 이전에 있어야 할 심판과 징계의 체험도 새롭게 다시 한번 맛보아야 할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잡설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 - 공의의 심판 이후 주시는 회복의 은혜 - 이 왜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짐작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고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며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욜2:27)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심판과 회복, 징계과 신원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란게... 봉건적인 왕의 위엄으로, 억압적이고 강제적으로, 막대한 물리력과 높은 수준의 무기로 인해 머리를 조아려야만 하는 굴종적인 위치를 상기시켜주는 단어일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로서는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 것 같다. 만물 안에 속하여, 만물 안에서 생겨나 찰나같은 호흡을 살다가 다시 만물이 깃든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과, 자신의 창조세계를 뛰어넘어 만물 위에(above all)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무협영화 같은 것을 보면 최고수만 쓸 수 있는 비기 중에 항상 1순위를 다투는 것에 '여래신장'이라는 비급이 있다. 지구를 덮을만한 거대한 부처의 손바닥이 상대를 압살하듯 내리쳐 단번에 이긴다. 어느 중국영화에서, 손오공이 본모습인 괴원숭이로 거대하게 변신하여 이를 막아보려 하지만 그 손바닥의 광대하고 광엄한 힘 앞에 앞도당하여, 마치 초파리가 손바닥에 쳐서 죽임을 당하듯 내리눌러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차원이 다른 존재, 차원이 다른 힘과 만날 때 느껴지는 것은 굴종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에서 오는 경외함이다. 굴종은 억울함이 깃들어 있지만, 경외함에는 억울함이 없다.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욥은 경외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에 자신의 의문을 해소했다. 애초에 자기가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님을, 나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심을 목격한 까닭이다.
최근 읽기 시작한 책 '더바이블 전도서'(송민원/감은사) 앞 부분은 잠언서와 전도서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둘다 지혜서로 분류되지만, 잠언서 같은 경우 하나님의 규범적 지혜(standard wisdom)를 다루고 있고, 욥기와 전도서같은 경우 반성적 지혜(speculative wisdom)를 다루고 있다. 규범적 지혜란, 세상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범 즉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미리 대비하는 사람은 지혜자이고, 이를 모르거나 알고도 따르지 않는 이는 무지하거나 아둔한 이들이다.
반면 반성적 지혜는, 규칙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거나,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패턴을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바라보는 지혜다. 욥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도 고난과 불행이 닥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우주적 운용과 섭리에 대해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주 길고 긴 시간(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과 죽음, 건강과 질병 등을 좋고 나쁨의 선악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인간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 뿐이므로, 하나님이 정하시는 규범 자체는 영원하고 불변하실지라도 그 실체적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벨로니아 포로기 심판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느꼈을까? 하나님을 얕보고 오랜시간 화나게 했더니 큰 코 다쳤구나, 아 무서워. 앞으론 하나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 겠어, 근데 뭐 때문에 이리도 화가 나셨지? 아, 자기 말씀을 안 지켜서 그렇다잖아! 그래, 말씀을 지켜야지. 앞으로는 일점일획이라도 철저하게 지켜야 이런 화를 면할 수 있겠다! 그래서 발생한 게 율법준수의 꼼꼼쟁이들인 바리새파. 반면 홀랑 망한 자기네 땅을 보며, 보이는 현상에 매몰되어 하나님이 어딨고 내세가 어딨냐며 현실적인 규범만 중시했던 게 사두개파. 그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을 느끼기 힘들다며 자기들끼리 들판으로 떠났던 게 에세네파. 정도로 나는 이해하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심판과 회복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이 느끼기를 원하신 것이 "아 무서워. 앞으론 조심해. 큰일 나!" 였을까? "그분의 땅에 열정을 가지시고, 그분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분이?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보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고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며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욜2:26)
하나님은, 자기만이 참된 하나님 되심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미 모세의 때에 그렇게 보여주셨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번 보여주셨지만, 그래도 안되니 결국 큰 징계의 날을 잡으실 수 밖에 없으셨던 듯 하다. 자기가 지은 피조세계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백성들을 특별한 보화처럼 여기셨던 그분께선 징계로 끝이 아니고, 징계를 통해 그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그들을 은혜로 회복시켜 다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며 구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듯 하다.
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나도 하나님의 징계를 만났다. 욥처럼 잠잠하지 못하고 목구멍에 핏대를 올리며 대들고 화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화과산의 손오공이 변신해봤댔자, 본모습을 드러내봤댔자 결국 원숭이다. 조금 큰 원숭이. 여래신장을 막아낼 힘도 없고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지혜도 없다. 벼룩은 참 높이 뛰는 생물이지만, 뛰어야 벼룩이다. 딱 그 꼴이었다.
그래도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본색을 드러내고 변신해 보니 비로소 하나님과 나를 바르게 견주어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뭐 대단한 줄 알았는데 부처님 손바닥의 주름 한 줄을 벗어나질 못하는 먼지같고 안개같은 존재임을 목격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간 주를 섬긴다고 했던 것이 실은 굴종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 혹은 모종의 목적을 숨긴 채 예수의 제자가 된 유다같은 존재였다는 것, 아무리 예쁘게 봐줘도 하나님의 섭리는 모른 채 자신만의 규범적 지혜로 예수를 모시려 했던 베드로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 그것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감사하다.
욥처럼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지난 생을 통해 욥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으며, 다 함이 없는 은혜의 하나님을 배워나가면서도, 영원하고 무궁하신 그분의 원의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도 조금은 받아드릴 수 있는 지금이 되어서. 참 감사하다.
첫댓글 "차원이 다른 존재, 차원이 다른 힘과 만날 때 느껴지는 것은 굴종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에서 오는 경외함이다"
아멘! 날고 기어도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그래봤자 하나님 손안의 인간인데... !
경외함을 일으키는 깊고 풍성한 나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