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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발렌타인데이었다. 교복을 입은 은오와 안나는 시내에 쇼핑을 갔다.
“엑! 비싸다..”
“그러게..”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은 몇 만원이나 했다.
“넌 누구 주려고?”
은오가 조금 움찔하다가 “아빠..” 라고 대답했다. 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나도.. 그 분한테 드
려야 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서 달력에 빨간 싸인펜으로 표시를 해
두고 가시면서 미소를 지으셨거든.. 무언의 압력인거지..” 라고 대답했다. 결국 너무 비싸지 않고 적당한 가격에
실속은 있어 보이는 초콜릿을 선택했다. 은오도 작은 걸로 하나 샀다. 계산대에서 안나가
은오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도 줘야 할까?”
“글세.. 같이 사니까 줘야 하지 않을까?”
“야.. 그 녀석 할머니가 나 보고 조심하라고 하시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다 커서 같이 사니까 좋아하거나 하지 말라는 뜻 아니겠어?”
“진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긴다.. 그 녀석이 조심해야지. 안 그래?”
“맞아. 남자가 조심해야지.. 설마.. 초콜릿 준다고 그런 오해 같은 거 안 하겠지?”
“안 하겠지.. 남동생이라서 주는 거라는 걸 꼭 말해..”
“후우~~. 그래야겠다. 잠깐만요..”
안나는 그 분 것보다 조금 작은 상자를 하나 더 가져와 함께 계산했다. 은오는 안나와 헤어진
다음 그 가게에 다시 갔다. 그리고 신중하게 작은 초콜릿을 선택해서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왔
다. 다음 날 아침 안나는 식탁에 앉아 있는 새아버지와 재원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조금 당황
한 두 사람이 상자를 천천히 받아 들었다.
“고.. 고맙다..”
그 분이 곧 눈물을 흘리실 것 같아 안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재원이 작은 상자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말했다.
“나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약소한 거라서.. 죄송해요. 미안..”
“그렇긴 하네..”
“이 자식이.. 아니.. 남.동.생. 이니까..”
결국 그 분이 고개를 돌리시고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시자 안나가 움찔하며 급하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보내세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대문을 닫고 그녀는 집 쪽을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것에 눈물을 보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종종거리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
다. 은오는 간밤에 아빠한테는 초콜릿을 미리 드렸고, 어떻게 해야 다른 학생들 모르게 우진에게 전해
줄지 고민하며 학교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나오지 않자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
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우진의 주위에 구름떼처럼
여학생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은오는 ‘그냥 안나랑 나누어 먹어야 겠다..’ 라고 생각
하고 고개를 숙여 우진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문을 여니 안나가 먼저 와 있었
다. 은오를 보고 안나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잘 드렸어?”
“야.. 말도 마.. 우시더라..”
“정말? 우리 안나, 효도했네~.”
“음.. 이상하지만.. 그래도 잘 한 것 같아. 그 자식은 별거 아니라는 말에 그렇네.. 라고 말하더라? 싸가지인 것 같지?”
은오가 미소 지으며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고민을 잠깐 하다가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안나에게 내밀었다.
“뭐야?”
“같이 먹으려고..”
안나가 조용히 은오를 바라보았다.
“아니지?”
“응?”
“줄 사람.. 있잖아.. 그치?”
은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고 씽긋 웃었다.
“그럼 그 사람한테 줘야지.. 이렇게 먹어버리면.. 모르잖아..”
“하지만.. 경쟁이 너무 세서..”
“가서 전해 주고 와. 경쟁이 세면.. 뭐 그냥 던져 주고 와. 누가 줬는지도 모르게..”
은오가 피식 웃었다.
“글세..”
“은오야.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정말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나 그 자식한
테 줬던 것보다 훨씬 고민해서 초콜릿을 고르고 골라서 줬을거야. 그리고 마희도 아마 개똥이
를 무척 좋아했겠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엄청난 다이어트를 하고 싶을 만큼.. 너도 분명히
주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한 거 아니야? 잘 생각해서 결정 해. 그건.. 못 먹겠다. 네 진심이
담겼으니까..”
은오가 덜렁거리는 것 같아 보이는 안나가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하면 가슴에 콩.. 하고 울렸다.
“고마워. 나.. 힘을 내 볼게.”
“그렇지~. 그래야 내 친구지.”
안나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은오는 등 뒤로 작게 포장된 초콜릿을 숨기고 혼자 벤
치에 앉아 있는 우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여학생 십여 명이 구름처럼 그를 에워쌌다. 그도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가까이 다가온 은오를 바라보았다. 우진이 천천히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시선은
은오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은오는 우진에게 어색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종
종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가까운 학교 건물을 돌아가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여학생들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초콜릿 상자들이 떠올랐다. 분명 그는 그 여학생들에게 둘러 싸여 있
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오는 자신의 품에 있는 초콜릿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조금 들어 올려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후우~~. 너무.. 작다..”
“뭐가?”
“네?”
은오가 갑작스레 들리는 우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등 뒤로 초콜릿을 숨기며 놀란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은오가 고개를 저었다.
“얼른..”
은오가 고개를 숙이며 양 손으로 잡은 작은 초콜릿을 그에게 건네었다. 그가 그 초콜릿을 받으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작은 사이즈가 좋아. 큰 건 맛도 별로 없다.”
은오는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은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여학생들이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어디계세요~.”
“아! 또.. 그럼. 또 보자.”
그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려가자 그를 따라 여학생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은오는 손을 들어
두근거리는 가슴에 얹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양 볼에 분홍 꽃이 피었다. 두근
거리는 이유를, 불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
교무실로 돌아온 우진의 양 팔에는 초콜릿이 하나 가득 안겨 있었다.
“우와~~. 역시.. 집에 어떻게 가져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가 자신의 책상위에 초콜릿을 올려놓았다.
“다.. 방법이 있죠.”
그가 서랍을 열자 시장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붉은 색 큰 비닐 봉투가 나왔다. 그가 책상 위
를 가득 채운 초콜릿을 봉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 중에 은오가 준 상자가 눈에 들어왔지
만 그는 애써 다른 상자들과 함께 무심한 듯 봉투에 담았다. 입구를 묶어 책상 아래, 오전에
받은 봉투 옆에 내려놓았다.
“봉투 하나는 개봉하시죠..? 그걸 언제까지 드실 겁니까?”
다른 선생님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먹어야겠죠. 준비한 성의가 있으니까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대신 제가 다른 걸 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우진도 웃으며 고개를 돌려 책상 아래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한 우진은 봉투를 산타처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냉장고
과 냉동실에 상자를 넣기 시작했다. 포장도 풀지 않고 말이다. 그러다가 은오가 준 상자를 집
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냉동실에 던져 넣었다. 다행히 다 들어갔다. 그는 소파에 누
워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을 뭘 먹을지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
었다. 열면서 동시에 “안 돼!” 라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채 자리를 잡지 못한
상자들이 몇 개 바닥에 떨어졌다. 쪼그려 앉아 상자를 다시 냉장고에 넣다가 상자에서 쪽지 2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쪽지 하나를 들어 읽어 보았다.
<유우진 선생님. 사랑해요. 제 전화번호는 XXX-XXX-XXXX예요. 전화 주세요. 꼭이요.>
그는 쪽지를 읽다가 피식 웃었다.
“이름이 없잖아.. 인마..”
다른 쪽지를 읽었다.
<우진씨~>
“뭐? 이 녀석들이.. 어디 선생님한테.. 우진씨라니..”
<우진씨~. 오늘 저녁 7시에 시내 **에서 기다릴게요. 안 오시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에요. 제가 누군지는 나오시면 아실 수 있어요. 기다릴게요.>
“이건 뭐.. 거의 협박인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냉동실 문을 열고 은오가 준 상자를 찾았다. 하지만 무심코 넣어
서 어디에 있는지 몰라 결국 양 손으로 냉동실 안에 들어 있는 상자들을 바닥으로 쓸어 내렸
다. 그러다 안쪽 깊숙한 곳에 그녀에게 받은 조그만 상자가 보였다. 그는 상자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집었다. 그리고 냉동실 문을 닫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쪽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가 마른
침을 삼키며 허리를 굽혀 쪽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손에 배어 나오는 땀을 쓱쓱 바지에
문질러 닦고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펼쳤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세요. 서은오 드림>
우진은 쪽지의 뒷면을 살펴보았다가 아무것도 없이 이것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곧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안나가 입에 막대사탕을 물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골목에서 여학생들이 몇 명이 우르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나가 흠칫 놀라 그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재원오빠랑 같은 학교 다니는 1학년이에요. 혹시.. 여동생 되세요?”
“아.. 누나.. 누나예요.”
“아~. 누나 되세요? 사실은 재원오빠가 학교에서 이걸 안 받아서요. 그래서요.. 이거 언니가 대신 전해주시면 안돼요?”
“내가 들어가서 그 자식.. 아니 재원이 나오라고 할 테니까 직접 줘요.”
“아니에요. 사실은.. 전화했는데 귀찮다고 집에 가라고 했거든요.”
“그래요?”
“그럼.. 언니 부탁 드려요.”
“아니.. 나는..”
“오빠가 중학교를 졸업해서 언제 다시 볼지도 모르고.. 제발 부탁드려요..”
“하지만..”
“언니, 부탁해요~.”
다들 상자랑 초콜릿부케랑 한 아름 안나의 팔에 올리고 그 여학생들이 인사를 하고 갔다.
“뭐야..”
안나는 낑낑거리며 대문을 발로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 이게 다 뭐야?”
“뭐긴..”
안나는 운동화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발로 재원의 방문을 찼다.
“네.”
“야. 문 열어. 빨리!”
안나가 외치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재원이 놀란 표정으로 안나가 안 보일정도로 안고 있는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내가 아냐? 빨리 받아.. 무거워.”
“바닥에 내려놓으면 되겠네.”
“그래?”
안나가 팔을 벌리자 선물상자들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재원이 바닥을 뒹구는 초콜릿상자
들과 부케모양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도 고개를 숙이고
선물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데?”
“집 앞에서 너랑 같은 학교 다니는 1학년 여학생들이 주던데?”
“그걸 왜 받아와? 왜 마음대로 갖고 오냐고..”
“내가 받고 싶어서 받았나? 그냥 막 주고 가는 걸.. 그럼 대문 앞에다 버리고 오나?”
“내가 받기 싫다는 말은 안 해?”
“하더라. 집 앞까지 왔는데 가라고 했다면서?”
“그런데도 받아왔다고?”
“이게 뭐 별거냐? 너 졸업해서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좀 받아주면 안 돼?”
“뭐가 들었는 줄 알고 받아서 먹어?”
“뭐?”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 좋다는 여자는 별로야. 말 했잖아. 들러붙는 여자 별로라고..”
“그래서.. 이거 버리라고?”
“마음대로 갖고 왔으니까 직접 처리해.”
“사람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니야. 너 참.. 싸가지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던지.. 하여튼 이거 치워.”
재원이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선물이 걸리자 발로 상자를 걷어차고는 문을 닫았다.
“싸가지..”
안나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봉지를 갖고 나와 선물들을 집어넣었다.
“저런 녀석이 여자한테 인기가 있는 거야? 저런 싸가지가 뭐가 좋다고..”
몸을 돌린 안나가 자기 방문을 열고 봉지를 어깨에 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원이 살짝 문을
열어 인상을 찡그리며 문 앞에서 사라진 선물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안나의 방문을
노려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안나는 학교에 가면서 선물을 하나, 하나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배가 아파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약을 먹으려고 나가다가 다시 화장실이 급해진
안나가 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안나가 바닥을 기어 나왔다. 열린 방문
으로 그 모습을 문을 열고 나온 재원이 보고는 놀라 달려왔다.
“버리지 않고 그걸 다 먹었냐?”
“그럼.. 버리냐?”
안나가 기운이 없어 조그맣게 대답했다.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걸 왜 먹어? 그러니까 탈이 났지..”
“죽는다~.”
“누나가 죽을 것 같거든? 잠깐 기다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온 재원의 손에는 따뜻한 물과 약이 놓인 쟁반이 들려있었다.
“일단 침대에 누워.”
“아니야.. 소파에 앉아 있을래..”
“그러던지..”
재원이 그녀를 부축하려고 손을 뻗자 안나가 손을 들었다.
“혼자 할 수 있어.”
“그러던지..”
안나가 기어서 소파에 힘겹게 앉았다. 그리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 도대체 뭐가 들어 있었던 거지?”
재원이 앞에 와서 앉았다. 약 뚜껑을 열어 그녀의 손바닥에 약을 올려주었다.
“먹어. 이거 먹으면 괜찮아질거야.”
“먹어 본 적이 있는 거냐?”
“먹기나 해..”
안나는 조금 몸을 일으켜 알약을 입에 넣고 따뜻한 물을 마셨다. 배에서 꾸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한번 끝내주네..”
“물이랑 약이 들어가서 나는 소리야..”
“알아. 이런 거에는 얼굴 붉히지 않네?”
“난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런 것 같아.”
“뭐가 들어있었던 거야?”
“아마.. 설사약?”
“에? 도대체 왜 설사약을 넣은 거야?”
“인기가 많은 사람은 적도 많아..”
“재수없는 놈..”
그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저녁으로 죽 쑤어 달라고 할게. 쉬어.”
재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안나가 중얼거렸다.
“뭐야.. 좋아한다면서 왜 괴롭히는 거야? 진짜 이상하다..”
안나는 처음으로 재원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떨리던 발렌타인데이가 끝나고 그 주 토요일에 안나와 은오는 시내에서 만났다. 서점도 가고, 팬시점에 가서 구경도 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 오자 안나가 말했다.
“우리 마희 이모네 찻집 가서 뭐 좀 먹고 갈래?”
은오가 조금 멈칫했다.
“응?”
“아니.. 다른 데로 가면 안 될까?”
“왜? 응.. 알았어. 그렇게 하자.”
두 사람은 햄버거 가게에 와 있었다. 안나는 그냥 은오가 가자는 데로 왔다. 별 말없이 햄버거를 주문해서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씹고 있었고, 은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응?”
안나가 콜라를 마시며 은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는 햄버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제대로 들을 준비를 마치고 은오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그게 누구냐 하면..”
안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오는 눈을 꼭 감고 “유우진 선생님..” 이라고 말했다. 무
언가 놀란 안나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은오가 오른쪽 눈을
슬며시 뜨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왼쪽 눈도 뜨고 안나를 바라보
며 물었다.
“안 놀라네..”
안나가 햄버거를 다시 손에 들기 전에 은오를 바라보며 “할 말은 그게 끝이야?” 라고 물었다.
“응.”
은오의 대답이 끝나자 안나는 다시 햄버거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오를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줄 알았어?”
“응.. 어떻게 알았어?”
“음.. 처음에는 영어 수업시간에.. 내가 알기로는 불과.. 한.. 두 달 사이인 것 같은데..”
안나가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말을 이었다.
“응.. 하지만 내 감정을 안 건 최근인데..”
“응. 그런 건 원래 주위 사람들이 먼저 아는 거야. 당사자들이 제일 늦게 알아.”
“그래?”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수업에 집중을 하는 너인데, 영어 시간에는 집중을 잘 못하더라고. 왜 그러나.. 처음엔 어디가 아픈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유쌤 바라보는 눈이.. 내가 너와 친구가 된 후로.. 아니.. 여하튼.. 처음 보는 눈이었어.”
“어떤 눈이지? 궁금한데..”
은오가 고민되는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은오야... 고백해 봐.”
“응?”
“너를 바라보는 유쌤 눈동자도 내가 봤다 이 말이야..”
“....”
안나가 미소를 지었다.
“원래 따뜻하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시지만.. 너한테는 뭔가.. 조금 다른 것 같았어.
초콜릿도 숨어 있는 너를 찾아와서 받아갔다면서..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 못하지..”
“하지만 유우진 선생님은 선생님이시고, 나는 아직 학생이고..”
“고백은 할 수 있잖아. 서로 마음만 확인하고 네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되는 거 아닌가? 이제 1년 남았는데..”
“글세..”
“졸업할 때 고백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조금 불안해 질걸? 유쌤 인기가 얼마나 높냐? 그 사이에 누가 채가면 어떻게 해..”
“그런가?”
은오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안나가 햄버거를 내려놓으며 정색을 하고 사과를 했다.
“미안해..”
“응?”
은오가 고민에서 빠져 나와 안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해서는 안 될 말이었어. 네 인생인데.. 친구라도 이건 아니다.. 미안해.”
“아니야. 네가 그렇게 말을 하는 건 어떤 마음에서 하는 말인지 알아.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거잖아.”
“그치만.. 불안해. 마희도 행복해지길 바랬지만.. 결국 큰 상처를 입었잖아. 차라리 그 때 내가 크리스마스 약속을 깨지 않았다면.. 그래서 너랑 마희랑 같이 이모네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면.. 마희를 두 달 동안 못 보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안나야..”
“물론 나는 너랑 마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해. 너도 있고, 마희도 있고.. 정말 너랑 마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괜히 고백하라고 부추겼는데 네가 잘 안 되고 큰 상처를 입는다면.. 오히려 내가.. 너무 속상하기도 하고 또 미안할 것 같아.”
“만약에 고백을 한다면 그건 내가 한 선택이야. 네 응원이 고맙지만 선택에 대한 결과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때 결정을 할 거야. 다른 여자가 채간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은오야..”
은오가 미소를 지으며 그제서야 햄버거 종이를 벗기고 한 입 크게 물었다. 그리고 콜라를 들어 안나에게 내밀었다. 안나도 콜라를 들어 마치 건배를 하듯이 부딪쳤다.
“행복해지자..”
“행복해지자..”
두 사람은 마주보고 미소를 짓고 콜라를 마셨다.
안나와 헤어진 은오는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 불을 켜고 욕실에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감고 나왔다. 로션을 바르고 안경을 썼다. 그리고 헤어 드라이기를 들어 머리
를 말렸다. 그러다 문득.. 우진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이상한 박동을 시작했
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생각을 했다.
그러다 피식 웃고는 다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그녀는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어 수업시간에 말이다.
예전의 눈빛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그녀는 교내에서 그를 만나도 고개를 숙여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봄방학이 시작되는 날 하교길에 안나와 은오는 떡볶이 집에 들렀다.
“너.. 요즘 왜 그래?”
“응?”
“다시 예전의 너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그래? 포기했어?”
“음.. 글세..”
은오가 떡볶이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렇게 보여?”
“응.”
“그럼 다행이네..”
“응?”
“아니야.. 너 안 먹으면.. 이거 내가 먹는다..”
은오가 하나 남은 김말이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야~~. 마지막 김말이를..”
안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은오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같은 반이 되면 좋겠는데.. 그치..”
안나가 은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 너랑 마희랑.. 같은 반이면 좋겠어.”
“후~~. 떨린다..”
“봄방학 잘 보내고.. 학원은 등록했어?”
“응. 내가 내신이 조금 부족하잖아.. 너는?”
“나는..”
은오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뭐.. 내신 성적이 좋으니까..”
“열심히 하자. 원하는 대학 가면 좋잖아.”
“너는 명문대 갈 거지?”
“응. 너는?”
“학교는 상관없고.. 유아교육학과 갈거야.”
“그래. 우리 모두 파이팅 하자.”
“응. 봄방학 잘 보내고..”
“너도..”
은오는 버스에 오르는 안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안나는 봄방학 중에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승용차 뒷좌석에서 조수석을 조금 노려보
듯 바라보았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재원이였다. 재원도 그녀와 함께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들은 TV 뉴스를 보면서 사과를 먹
고 있는 중이었다.
“넌.. 공부 잘 하잖아. 그리고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데.. 벌써 학원 다니려고?”
“응.”
그녀의 질문에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짧은 대답을 하고 고개를 돌려 정말 재미
있는 코미디 프로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뉴스를 봤다. 부모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같이 끝나고 오면 걱정이 덜 되시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불편한 건.. 가족 중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그맣게 한 숨을 내쉬며
눈이 내려서 온통 하얀색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은오랑 마희랑 놀고 싶다..”
그녀는 조그맣게 말하고 예쁜 풍경을 바라보았다. 학원 앞에 내려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인사
를 하고 문을 닫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학원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빙판
에 그만 발이 미끄러져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려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려는 찰나 뒤에서
그녀의 겨드랑이사이로 재원의 손이 들어와 그녀를 잡아 주었다. 그녀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마치 레고블럭에 있는 인
형 손처럼 직각으로 구부려 그녀 겨드랑이 아래에 대고 있었다.
‘어라?’
그녀가 균형을 잡고 제대로 서자 그도 팔을 뺐다.
“조심 좀 해.”
그가 무뚝뚝하게 말을 하고 먼저 학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통수에 대고 조그맣게
“고마워..” 라고 말했지만 그는 못들은 것 같았다. 안나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안
나야~.” 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인간 확성기 진
혜진이 방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온통 눈으로 덮인 오늘 은오는 도서관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주말이 지나면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하기도 해서 그녀는 책을 덮었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고 도서관을 나왔다.
발에 밟히는 뽀드득거리는 눈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희랑 안나랑 놀고 싶다..”
그녀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집을 바라보던 은오는 걸음을
옮겨 이모 찻집으로 갔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창문을 통해 안에 혹시나 그가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자 예쁜 풍경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은오 왔어? 정말 오랜만이네..”
“네, 이모. 건강하시죠?”
“그럼~.”
은오는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안경을 닦고, 다시 쓰고는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옆
자리에 내려놓고 목도리를 풀고 있는데 이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을 그녀 앞에 내
려 놓으셨다.
“오늘은 무슨 차 줄까?”
“음.. 오늘은 석류차 주세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네.”
그녀는 이모가 준 따뜻한 보리차를 손에 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차장에는 하얀 눈이 쌓인
나무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길이 미끄러워졌는지 사람들이 종종걸
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소년이 지나가다 심하게 미끄러지는 모습을 바라보았
다.
“아이고...”
“왜?”
이모가 석류차를 내려놓으며 은오가 바라보는 곳을 보시더니 인상을 쓰시며 걱정 어린 말투로
“멍들겠네.. 어디 부러진 건 아닌 것 같지?” 라고 말씀하셨다. 소년이 일어나 툭툭 옷에 묻은
눈을 털고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이모님도 조심하세요.”
“그래.. 이건 오늘 만든 떡인데.. 한 번 먹어 봐.”
예쁜 과일 모양의 떡이 예쁜 질그릇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와~. 너무 예뻐요. 떡은 안나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거 더 있어요?”
“좀 싸줘?”
“네. 안나한테 주려구요.”
“그래, 알았어.”
“감사합니다~.”
이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시며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은오는 포크를 들어 예쁘게 생긴
과일모양 떡 중에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예쁘게 생겨서 포크로
찍어 입에 넣기가 아까웠다. 결국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석류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면서
떡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눈으로 바라보면.. 맛있어?”
흠칫 놀라 고개를 든 은오의 눈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우진이 보였다.
“선생님..”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뭐야.. 그 표정은..”
“네?”
우진이 그녀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은오를 바라보지 않고 이모에게 같은 차를 주문했다.
이모가 건네준 따뜻한 보리차를 마실 때까지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은오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딱 만났을 때.. 그런 표정이었어. 날 만나기 싫었어?”
“아..아니에요.”
“생각보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구나.. 그래..”
그가 테이블 위에 왼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너한테 미움을 받고 있는 거지?”
은오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우진의 눈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미워하다니.. 말도 안 돼요.”
“거짓말..”
은오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니에요.”
“그래?”
“네.”
“그럼 다행이고.. 제자한테 사랑받는 것이 정말 좋거든. 그래서 미움 받으면.. 마음이 아파..”
그가 상처받은 사람처럼 인상을 쓰다가 씨익 웃으며 그녀가 들었다가 내려놓은 포크를 들어 떡을 찍어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그가 오물거리며 떡을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왜 심장이 불규칙하게 운동을 하는지 그녀는 정말..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진혜진이 안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야?”
“응?”
안나가 인상을 쓰며 재원이 들어간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혜진이 아는 날에는
당장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녀에 대한 소문을 전교생이 듣게 될 테고, 그러면 평온한 그녀
의 고3 생활은 끝이 나는 것이다.
“방금 같이 있던 남학생 말이야..”
혜진이 동그란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고 있어.. 좋지 않아.. 좋지 않다고..’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던데.. 키도 크고, 멀리서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꽤 미남인 것 같고..”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넘어질 때 뒤에서 잡아준 남학생..”
“아.. 그 학생.. 나도 모르는 사람이야.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 학생은 그냥 학원으로 들어간 게 끝이야. 뭐.. 이 학원에 다니는 학생인가부지..”
“음~~. 그래?”
“응. 넌 안 들어 가냐?”
“들어가야지.. 넌 어떤 수업 들어?”
‘내가.. 알려 줄까보냐..’
안나가 혜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굳히며 학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은오는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아래를 바라보았다. 모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숨을 조금 내쉬고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응?”
우진이 창밖에 쌓인 눈을 바라보다가 석류차를 마시며 은오를 바라보았다.
“좋아해요.”
“풉!”
그가 입에 있던 차를 뿜어 은오의 얼굴에 튀었다.
“아.. 미안..”
그가 냅킨을 빼서 은오에게 내밀었다. 은오는 안경을 벗고 냅킨으로 얼굴을 닦고 안경도 닦았다.
“그런데.. 뭐라고..?”
은오는 안경을 닦다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흐릿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고백을 하기 쉬울 것 같아 안경을 다 닦았어도 다시 안경을 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해요.”
“아... 제자로서?”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요? 여자로서.. 여자로서 남자인 선생님을 좋아해요.”
“.....”
안경을 쓰지 않은 것은 고백하기는 좋았지만 너무 흐릿해서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안경을 쓰려고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에
놓인 안경을 집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안경을 집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찡
그리며 최대한 자세히 보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 쓰지 말고.. 들어.”
“네?”
“너에게 이야기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네, 들었어요.”
“그럼 내가 여기에 왜 오는지도 기억하겠네.”
“네.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선생님과 그분의 기념일 마다 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내가 여기 왜 왔을 것 같아?”
“그분과의 기념일이어서..”
“맞아. 오늘은 지수와 처음 만난 날이야. 대학 입학식 전에 궁금해서 들른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어. 첫눈에 반한 내가 그녀와 함께 이 찻집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했지.”
“아... 그렇군요.”
은오는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야? 이런 날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왜요?”
“뭐?”
“선생님이 다른 분을 사랑하시는 건.. 그건 선생님 마음이구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그건 제 마음이에요.”
“은오야..”
“좋아해요. 선생님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 좋아하는 건 아주 일시적인 감정이야. 좋은 대학가서 대기업에 취직하면 더 좋은 사람 만날텐데.. 뭐하러..”
“음..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할래요.”
“뭐라고?”
“선생님도 그 분을 다시 만나실 때까지만 절 만나주시면 되잖아요.”
“이 녀석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는요.. 선생님이.. 정말 좋아요.”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백을 했다.
첫댓글 옛친구들과 옛선생님들이 생각닙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감정이네요. 옛친구들은 어디선가 행복하겠죠? 글 감사히 잘보고갑니다.
참고로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공립이라서 우진선생님처럼 젊고 결혼 안 하시 선생님은 한 분도 안 계셨어요.. ^^
재미있네요
감사합니다..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잼게 잘 봤어요~
고맙습니다.. ^^